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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왕하 2: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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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열왕기하 2장은 우리에게 선지자 엘리야의 삶의 마지막 때의 일들을 알리고 있으며, 또한 스승 엘리야를 계승해서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이며 선지자들의 우두머리의 자리에 서게 된 엘리사가 행한 첫 번째 일들을 함께 전하고 있습니다.

  먼저 엘리야가 어떻게 땅 위에서의 그의 삶의 마지막을 맞았는지를 살펴봅니다. 엘리야는 자기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왔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9절 참조). 그래서 엘리사를 자기에게서 떼어놓으려 했습니다. 2절에 보면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했고, 4절에도 보면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했으며, 6절에도 보면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했다고 반복해서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며 엘리야를 놓지 않고 따라다녔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엘리사에게서 떼어 놓으시며 하늘로 들어 올려 가신 것은 그들이 요단강을 건너 길을 갈 때였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전 둘이 요단 강가에 이르렀을 때 엘리야는 겉옷을 말아서 그것으로 요단강 물을 쳤고 물은 이리 저리로 갈라졌으며 두 사람은 마른 땅 위로 건넜습니다(8절). 강을 건너자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했습니다: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9절). 두 사람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가는데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고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별이야기 속에는 우리가 생각해볼 몇 가지 일이 있습니다. 우선, 왜 엘리사는 “너는 더 이상 나를 따라오지 말고 여기 머물라”는 엘리야의 말을 듣지 않고 그를 끝까지 따라다녔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엘리사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데려가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3절에서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하니 이르되 ‘나도 또한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하니라” 했으며 또 5절에서도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엘리사는 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데려가실 것을 알면서도 세 번씩이나 스승의 말을 거역하면서까지 그를 따라다녔겠습니까?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실제로 하나님께서 스승을 데려가시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자 해서였을 것입니다. 스승의 시대의 종료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엘리사 자신의 시대를 명하시는 시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란 말입니다. 이미 가는 곳마다 선지자의 제자들은 엘리사에게 나아와서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엘리사에게 “이제는 당신의 시대가 되었으니 엘리야처럼 당신이 나서야 할 것 아닙니까?” 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의 사라짐을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스승을 대신하여 그의 자리에 오르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시키실 때에만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엘리사의 확고한 자세를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엘리사는 선지자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잠잠하라” 했습니다. 그는 결코 주변사람들의 말에 따라 움직이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데려 가시기 전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말하기를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는지” 구하라 했습니다. 엘리사는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법에는 자식들이 부모의 유산을 상속할 때 장자가 다른 아들들보다 갑절을 받게 되어있었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있었던 성령의 능력을 제자들에게 물려받을 때 자기는 갑절을 받게 해달라고 한 것은 자기를 제자들 중 으뜸으로 삼아달라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요구라기보다는 정말 하나님께서 자기를 엘리야의 후계자로 쓰시려는 것인지를 확신시키는 표지를 원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한 특별한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구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너서 길을 가고 있을 때 갑자기 불수레와 불말들에 의해 엘리야와 갈리고 그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본 엘리사는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며 소리를 지르고 자기의 옷을 잡아 찢었습니다. 그리고는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요단강 언덕으로 돌아왔습니다. 거기서 그는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외치며 엘리야가 남긴 겉옷으로 강물을 쳤습니다. 그때 요단강물은 엘리야가 치던 때처럼 이리 저리 갈라졌고 엘리사는 다시 그 강을 건넜습니다(11-14절).

  스승 없이 홀로 남은 엘리사가 행한 이 첫 번째 행동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봅니까? 엘리사는 엘리야를 가리켜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했습니다. 병거와 마병은 지도자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특히 군사적 지도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엘리야를 향해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한 것은 이스라엘을 지키는 실질적 힘을 지닌 인물이 떠나가고 있음을 알리는 고함이며, 이제 이스라엘을 지키는 일은 누가 할 것인지를 묻는 급박한 부르짖음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요단강 언덕으로 돌아온 엘리사는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외쳤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킬 영적 버팀목을 잃은 상황에서 엘리사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또한 이제는 누구에게 그 일을 맡기시겠는지를 여쭙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엘리사 자기 자신이라면 과연 하나님께서 자기와도 함께하시겠는지를 확인시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에게도 엘리야에게 주셨던 그 권능을 주실 것인지를 보여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자기의 그 물음에 대한 답을 확인하기 위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엘리야가 남긴 겉옷으로 엘리야가 했던 것처럼 요단강 물을 친 것입니다. 요단강 물은 엘리사가 치는 대로 갈라졌고 그는 요단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3-14절을 보면 엘리사가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 요단 언덕에 서서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가지고 ...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했습니다. 요단강 언덕에 서서 물을 쳤다는 것은 이때 요단강물이 불어나 언덕까지 물이 찼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냥 쉽게 건널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가르고 건넌 사실은 옛날 여호수아가 요단강이 언덕까지 범람하던 때 그 강을 가르고 이스라엘 백성을 모두 안전하게 건너게 한 역사를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그 이전에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을 건너게 한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게 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물을 가르고 강을 건너게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상징하는 증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로 하여금 엘리야의 겉옷으로 요단강 물을 쳐 가르고 건너게 하심으로써 그가 하나님께서 택하여 세우신 엘리야의 권능 있는 후계자임을 여러 증인들 앞에서 확인시켜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첫 절에 보면 “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그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그에게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했다”고 합니다. 그 확신은 그 누구보다도 엘리사 자신에게 주어졌습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엘리사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그에게 경배한 선지자의 제자들은 엘리사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종들에게 용감한 사람 오십 명이 있으니 청하건대 그들이 가서 당신의 주인을 찾게 하소서. 염려하건대 여호와의 성령이 그를 들고 가다가 어느 산에나 어느 골짜기에 던지셨을까 하나이다” 하며 엘리야를 찾아오도록 사람들을 보내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대답하기를 “보내지 말라” 했습니다. 그러나 무리가 하도 강청하는 바람에 허락했지만 오십 명이 가서 사흘 동안을 찾아보았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본문 17절). 엘리사가 무리에게 엘리야 찾는 일을 허락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엘리야를 데려가신 이는 하나님이심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절대로 순종해야 하며 사람이 어찌 하려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확인하기까지는 스승의 곁을 떠나려 하지도 그를 제치고 앞서가려하지도 않았던 그이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확인한 순간부터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인간적인 정과 미련에 매이지 않는 엘리사의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타가 공인하는 이스라엘의 새 지도자가 된 엘리사가 요단강에서 여리고로 돌아와서 행한 첫 두 가지 일을 본문 19절 이하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여리고의 물을 깨끗하게 한 일입니다. 여리고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기를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본문 19절) 했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로서 “종려나무의 도시”라고 불리던 이 여리고가 어쩌다 물이 나쁘고 토산이 익지 못한 채 떨어지는 성읍으로 변하고 말았는지 잘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셨을 때 여호수아가 한 수6:26의 말을 머리 속에 떠올릴 뿐입니다: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아무튼 엘리사는 여리고 사람들에게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가져오라 하고는 물 근원을 찾아가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대로 여리고 성의 물을 고쳐주셨습니다(본문 20-22). 이스라엘의 새 지도자로 세우심을 받은 엘리사가 행한 첫 번째 일이 물을 좋게 하고 토양이 바뀌게 함으로써 오곡백과가 풍성한 도성으로 만들며 경제를 회복시킨 일이라는 것은 의미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뒤이어 엘리사가 행한 일은 우리를 무척 당혹하게 하는 것입니다. 23-24절을 다시 봅니다: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이 이야기는 여리고성을 다시 풍요로운 도시로 회복시키는 엘리사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기를 놀렸다고 아이들을 저주하여 처참하게 죽게 하는 일이 과연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지자가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강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사건 앞에서 우리는 일단 엘리사의 성격에 급하고 거친 면이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고 봅니다. 그것은 어떤 인간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을 경멸하고 배척하는 행위는 참혹한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여리고성의 작은 아이들은 그들의 땅의 물을 좋게 고쳐준 엘리사를 배은망덕하게도 이유 없이 조롱하며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했던 것입니다. “대머리여” 한 것은 놀리는 말이고 “올라가라” 한 것은 여리고를 떠나라고 배척하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이루 다 헤아려 알 수는 없지만, 이것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하나님의 사람을 경홀히 하고 거역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며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라는 강력한 경고를 남기신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국의 지도자가 교체되는 시기에 일어난 이 일련의 일들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는 사건들로 여겨집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참으로 중대한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습니다. 온 국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석 달여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선거입니다. 야당에서는 지난주 대통령후보를 확정지었습니다. 소위 범여권에서는 20여명의 예비후보자가 난립하고 있습니다. 대통령후보로서의 출마의사를 밝히는 것은 누구나의 자유이고 권리이기 때문에 뭐라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건전한 정책제시는 하지 않고 상대방비방으로 자기 표를 모아보려는 행태는 참으로 우리를 절망하게 합니다. 지난번 대통령선거에서 거짓폭로전술로 정권을 잡은 세력들은 이번에도 그런 전술로 또 승리를 훔칠 준비를 다 마친 상태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서 그런지 여권의 인사들은 야당후보를 한방에 날려버릴 수 있다고 이미 장담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 전술이 먹히지 않을 경우에는 아예 대통령선거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 어떤 특단의 사태를 조성할 것이란 우려도 나오고 있습니다. 북한정권은 우리나라에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야당후보를 암살하려 할 것이라는 말까지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시도들은 이 나라와 국민에게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권자이십니다. 모든 나라와 민족의 역사가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모두가 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특별히 쓰시고자 택하신 민족의 역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오늘에 이르렀음을 우리는 믿고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처럼 우리의 역사 속에도 좋은 지도자도 있었고 악한 지도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앞날은 분명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속에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이끌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이루어지도록 신앙인의 본분을 지켜야 합니다. 또 다시 거짓과 비방과 음모에 의해서 우리의 역사가 왜곡되거나 오도되거나 후퇴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나라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나아가고 하나님에 의해 귀하게 쓰임 받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이 나라의 새 대통령으로 만드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누가 되든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이 나라가 풍요롭고 복된 나라 되도록 힘을 모아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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