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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경청, 신앙은 듣는 데서부터 (렘 23:3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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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 신앙은 듣는 데서부터 (렘 23:33~40)

1. 말하기는 쉽고 듣기는 어렵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말하는 것이 쉽습니까, 아니면 듣는 것이 쉽습니까? 당연히 듣는 것은 쉽고 말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저도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듣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도 없고 배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말을 잘 하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그 결과, 말을 잘한다는 소리도 종종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말 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잘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깨닫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는 그 생각을 거의 못하고 살아왔는데, 생각보다는 제가 듣는 것을 잘 못한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우선 제 아내의 말을 잘 듣지 못하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제 아내가 제게 무슨 말을 해올 때, ‘그 말하는 소리와 그 말 속에 담긴 것, 그리고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영혼의 소리까지 들어왔는가?’ 생각해보면, 전혀 제 아내의 말을 듣지 못하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이들의 말도 마찬가지지요. 물론 거기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변명은 있습니다. 어릴 적 단칸방에서 부모 형제들이 함께 살 때, 그나마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려면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닫지 않으면 집중이 안 되었습니다. 시끄러운 가운데서도 그 소리를 듣지 않고 무시하고 공부에만 집중하는 것은 제가 살아남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변명이 될 수 있을까요? 이런 문제는 가족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제대로 듣지 못하고 흘려버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마 엄청나게 많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마찬가지고, 목회자인 저 역시 말하는 것보다 그 전에 먼저 듣는 것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저와 같은 목회자들이 바울 사도가 들었던 말처럼 “말쟁이”로 여겨지고, 또 성도들도 “말 잘하는 사람”으로 여겨지지만, 그러나 우리 모두는 말하기 전에 먼저 들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즉 태초에 말씀이 먼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샤마 이스라엘!”, 즉 “이스라엘아 들어라!”라고 하셨습니다. 또 신약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즉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아가들이 태어난 후 듣기만 하다가 1년 가까이 지난 후에야 말문이 열리는 것처럼, 성도의 삶도 듣는 것이 우선입니다. 성도는 기록된 말씀으로부터 들어야 하고, 성령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하고,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하늘이나 땅이나 다른 사물이나 일들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야합니다. 그 소리를 바로 들어야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신앙은 듣는 것이다!

1) 듣기는 들어도 자기 식으로 해석한 이스라엘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잘 들었는가?’에 관한 말씀입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이 사람들이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듣지 않겠다’ 고 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본문은 예레미야 시대의 기록입니다. 예레미야 당시 사람들은 일반 백성들 뿐 아니라, 신앙의 지도자들인 제사장들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까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찾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당시 사람들에게는 습관적인 행동이 하나 생겼는데요. 그것은 그들이 선지자를 만날 때마다 ‘혹시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계시의 말씀을 받았습니까?’, ‘새로운 말씀을 받았다면 그 말씀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관습에 따라 예레미야 시대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만나면 늘 “선지자여, 여호와의 말씀이 있었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예레미야 선지자를 만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에게 요구한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엄중하다(אשׂמ)’는 말은 ‘무거운 짐’이라는 뜻입니다. 즉 그들이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말씀은 무엇입니까? 비록 그 말씀이 무겁고 짐스러운 것일지라도 우리가 행할 테니까 말씀하여 주세요’라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설사 듣기 좋고 달콤한 말씀이 아닐지라도, 위로의 말씀이 아닐지라도, 축복의 말씀이 아닐지라도, 부담스럽고 힘겨운 말씀이라고 해도,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다 듣겠습니다’라는 태도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엄중한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사람들에게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버리며 내가 너희를 벌하리라(33,34).”

즉 그들이 요구했던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은 자신들이 버림을 받는다는 것,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39절에 “내가 너희를 온전히 잊어버리며 ․․․ 이 성읍을 내 앞에서 내어버리며 ․․․ 너희로 영원한 치욕과 잊지 못할 영구한 수치를 당케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엄중한 말씀은 머잖아 그들이 버림을 받을 것이라는 것, 그래서 선지자는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러하니 여러분들이여, 어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징벌 앞에서 겸손해 지십시오” 라고 말씀을 외쳤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엄중한 말씀”이라고는 했지만, 이 정도로, 즉 자신들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며, 성읍은 훼파되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다는 말씀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엄중한 말씀을 듣고서는 그것을 외면했고, 못 들은 척하면서, 지금까지 저질러오던 죄를 그대로 짓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에 대해 3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시는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씀이니라.” 여기서 “망령되이 쓰다”라는 말은 ‘왜곡시키다’, ‘변절시키다’라는 뜻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레미야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제멋대로 해석한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 식으로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했지,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의 마음, 주님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이 잘 듣지 못한 이스라엘의 문제 있는 태도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헤아리지 못했고, 그 말씀을 하신 주님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하여 듣고, 그 말씀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파악할 수 있는 자리에 있습니까?

2) 잘 들어야 한다.

제 고향 거제도 학동 몽돌 밭에 가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제 고향 바닷가는 몽돌, 즉 자갈이 약 십리 가까이 펼쳐져 있습니다. 마을 바로 아래에는 비교적 작은 자갈들이 있고, 바다를 향해 오른쪽으로 용바위를 지나 내촌 쪽으로는 제법 덩치가 큰 돌들이 있고, 그리고 왼쪽 수산 쪽으로는 그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마을 아래 자갈에 비해서는 비교적 큰 돌들이 있습니다. 어릴 적, 여름이 되면 집이 덥고 모기도 많고 해서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이불을 가지고 자갈밭으로 내려와서는 거기서 잠을 잤습니다.

자갈 위에 자리를 펴고 누워서 잠을 청하면 “철썩 철썩 쏴아”하고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데요. 그 파도 소리를 가만 들어보면 그냥 물이 들어왔다 나가는 소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소리 속에는 물소리보다 더 크게 나는 소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물에 쓸려왔다가 나가는 자갈들이 내는 소리입니다. 마을 가운데 지역의 작은 몽돌 밭에서 나는 소리는 작은 자갈들이 쓸려왔다가 나가는 소리이고, 수산 쪽으로는 제법 큰 돌들이 파도에 쓸려 구르는 소리가 나고, 그리고 용바위 지나 내촌 쪽으로는 돌이 구르는 소리보다는 물이 제법 큰 돌들 사이로 들어왔다 나가는 소리가 납니다. 이렇게 소리의 차이를 구분하다보면 어느새 여름밤은 깊어져 갔지요.

그런데 이와 같이 소리에 민감한 분들이 제법 있으시더라고요? 그 대표적인 분이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소설가인 박지원(朴趾源/1737~1805) 선생입니다. 선생이 사신으로 청나라에 갔다가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열하일기(熱河日記)>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그가 중국으로 가는 길에 건넜던 강과 강을 건널 때의 소감을 적은 부분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입니다.

거기에 보면, “하수(河水)는 두 산 틈에서 나와 돌과 부딪쳐 싸우며, 그 놀란 파도와 성난 물머리와 우는 여울과 노한 물결과 슬픈 곡조와 원망하는 소리가 굽이쳐 돌면서, 우는 듯, 소리치는 듯, 바쁘게 호령하는 듯, 항상 장성을 깨뜨릴 형세가 있어, 전차(戰車) 만승(萬乘)과 전기(戰騎) 만대(萬隊)나 전포(戰砲) 만가(萬架)와 전고(戰鼓) 만좌(滿座)로써는 그 무너뜨리고 내뿜는 소리를 족히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즉 그가 강을 건너면서 들었던 강물의 소리는 오늘로 치면 탱크 수만 대가 이동하는 소리, 수만 대의 대포를 쏘아대는 소리, 전쟁터에서 북을 쳐대는 소리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살던 집 앞의 시냇가에 대한 부분도 있습니다. “산 중의 내 집 문 앞에는 큰 시내가 있어 매양 여름철이 되어 큰 비가 한 번 지나가면, 시냇물이 갑자기 불어서 항상 차기(車騎)와 포고(砲鼓)의 소리를 듣게 되어 드디어 귀에 젖어 버렸다. 내가 일찍이 문을 닫고 누워서 소리 종류를 비교해 보니, 깊은 소나무가 퉁소 소리를 내는 것은 듣는 이가 청아(淸雅)한 탓이요,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듯 한 것은 듣는 이가 분노한 탓이요, 뭇 개구리가 다투어 우는 것은 듣는 이가 교만한 탓이요, 천둥과 우레가 급한 것은 듣는 이가 놀란 탓이요, 찻물이 끓는 듯이 문무(文武)가 겸한 것은 듣는 이가 취미로운 탓이요, 거문고가 궁우(宮羽)에 맞는 것은 듣는 이가 슬픈 탓이요, 종이창에 바람이 우는 것은 듣는 이가 의심나는 탓이니, 모두 바르게 듣지 못하고 특히 흉중에 먹은 뜻을 가지고 귀에 들리는 대로 소리를 만든 것이다.” 선생은 여름철 큰 비가 온 후 시냇물이 흘러가는 소리를 아주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잘 듣는 것으로 대상과 사물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대상이 내는 소리를 잘 들으면 그 소리로서 그 대상을 바로 알 수 있고, 그리고 그 소리를 잘 듣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시인이 될 수 있고 수필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잘 듣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런데 잘 듣는 것이 비단 대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청득심(以聽得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조신영, 박현찬 씨가 지은 <경청, 마음을 얻는 지혜>라는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책은 ‘듣는 사람’보다 ‘말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이 시대와 우리 사회에 상대방에게 귀 기울여 듣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소통의 지혜인지 일깨워주는 책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의 이름은 “이청”인데, 그는 부인과는 별거 중이고, 장애를 가진 아들을 둔 30대 후반의 악기 제조 회사의 직장인입니다. 어느 날부터 그는 심한 두통을 앓게 됩니다. 그러다가 직장에 대규모 구조 조정이 있을 때, 그는 구조 조정에 적극 협조하고, 그 대가로서 ‘대리점 개설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심한 어지럼증을 느끼다가 쓰러지고 맙니다. 의사는 그에게 뇌쪽에 암병변이 있고, 현재로서는 그가 남의 말을 들을 수 없는 병에 걸렸다고 알려줍니다. 평소 건성으로 “알았다”라는 말을 달고 살았던 그는 남들이 무슨 말을 하던 자기 편한 데로 이해하고 결정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을 수 없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그는 이런 병에도 불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근무하던 회사의 악기 제조 공장에 무급사원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못했기 때문에 ‘이토벤’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그는 그것 때문에 엄청난 멸시를 받으며 바이올린 제작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속한 팀은 회사 내에서 가장 개성이 강하고 고집스러운 바이올린 제작 장인들을 모아 놓은 팀이었습니다. 이런 팀에서 일하게 된 주인공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잘 들리지 않았기에, 전과는 달리 팀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말을 그 얼굴을 바라보면서 집중하여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화 도중에 말을 자르고 자기 말을 하는 경우도 없었습니다. 이런 주인공의 모습이 입만 열면 서로 으르렁대던 팀원들의 마음을 녹이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경험해보지 못했던 주인공의 집중적인 경청 덕분에 그들은 자신들의 속마음까지 조금씩 꺼내놓기 시작했던 것이죠. 그래서 이 소설이 가장 강력하게 말하는 것이 “이청득심”입니다. 귀를 기울여 잘 들어주면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이와 같이 잘 듣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특히 여러분들이 귀 기울여 잘 들어야 할 대상, 들으면서 그 중심을 파악하고, 그리고 들은 말씀 그대로 여러분이 살아야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오늘 본문을 보실까요?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신앙적으로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는 선지자나 제사장들, 그리고 백성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사람들에게 이제부터는 누구라도 서로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더냐?” 라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더냐?” 라고 묻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아주 큰 죄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이것이 큰 죄가 됩니까? 그것은 이러한 행동이 살아계신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를 무시하는 행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그저 ‘말씀만 들려주시오’라는 말만 반복하는 것은 정말 큰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말씀은 다 동일한 것이지 엄중한 것이 따로 있고 평범한 것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주의해야할 말씀이 따로 있고, 그냥 듣고 넘겨도 될 말씀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또 우리 편에서 ‘이것은 이렇다 저것은 저렇다’하고 구별할 수도 없습니다.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따로 있고, 너에게 주는 말씀이 따로 있을 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엄중한 말씀과 그렇지 않은 말씀을 구별하여 들으려고 하는 것은 사실 그들이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무게와 권위를 무시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동안 여러분이 들었던 말씀을 그대로 받아 실천하면서 살아오셨습니까? 그렇지 않으면서 오늘 또 다른 새로운 말씀을 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 역시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죄를 짓는 것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말씀을 찾기보다는 여러분이 이미 아는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고, 그 말씀을 주신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회복되고, 그리고 들은 그대로 순종하는 삶이 있을 때, 그때에야 비로소 여러분은 ‘잘 듣는 자’라는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3. 듣는 것이 복이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저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저 자신이 ‘듣는 것을 참 못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잘 듣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하니까 상당수의 사람들이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마음의 정원을 가꾸는 지혜> 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남의 말을 잘 듣기 위한 10가지 충고”라는 글이 있습니다.

남의 말을 잘 듣기 위해서

1. 관심을 집중해서 듣는다.
2. 말 자체보다는 숨겨진 의도를 듣는다.
3. 눈을 바라보며 듣는다. 사람은 눈으로도 말한다.
4. 나의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여 듣는다.
5. 상대가 말하는 도중에 끼어들어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나도 그런 적 있어” 하면서 내 이야기를 길게 하지 말자.
6. 이상한 소리나 몸짓으로 상대방의 신경을 분산시키지 않는다.
7. 말하는 도중에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렇군요' 하는 말은 대화를 부드럽게 이어주는 윤활유가 된다.
8. 중요한 이야기만 듣지 말고 한 마디 한 마디를 주의 깊게 듣는다.
9. 상대의 말을 들으며 메모하는 모습은 상대에게 큰 신뢰를 준다.
10. 상대방의 말에 먼저 찬성한다. 목숨을 걸고 반대할 만한 일은 많지 않다.

성도 여러분, 이 말처럼 듣기를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 잘하는 사람’보다 주님의 말씀을 더 ‘잘 듣는 사람’, 그리고 ‘그 말씀 속에 있는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을 원하시고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새벽 미명에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하나님과 교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새벽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셨던 것이죠. 성도 여러분, 듣는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관심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듣는다는 것은 침묵하는 것입니다. 내 소리를 내지 않고, 내 마음을 멈춘 채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침묵인 것이죠. 그렇게 침묵하며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 예수님의 사역을 더 뛰어나고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보다 듣기를 잘 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성령님에게 민감하고, 여러분의 내면의 소리를 잘 들으며, 가족들과 주위 사람들의 소리를 잘 듣고, 그리고 이 세상과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잘 듣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삶은 보다 풍성해 질 것이고, 무엇보다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과 사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청득신(以聽得神)”이요 “이청득인(以聽得人)”입니다. 즉, “잘 듣는 자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각양 은사를 얻으며, 잘 듣는 자가 사람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따라해 볼까요? “이청득신(以聽得神)”“이청득인(以聽得人)” 여러분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듣기를 잘하여 하나님도 얻고, 하나님의 복들도 얻으며, 세상 사람들도 얻는 복된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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