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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을 향한 주님의 기대는 무엇일까요? (마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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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향한 주님의 기대는 무엇일까요? (마 4:1-11)

오늘의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의 공적 생애가 시작되면서, 그가 요단강에서 요한이라는 사람에게 세례를 받고 나오시는 바로 그 순간 그의 머리위에 비둘기 같은 성령님이 임하시고, 또 하늘 문이 열리면서 하나님께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리고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사건입니다.
여러분, 하늘의 문이 열리고,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시고,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또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을 들었다면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그 다음 사건은 무엇일까요?
이제 예수님 앞에 신바람 나는 아름답고 놀라운 일들이 벌어져 갈 것을 우리가 예측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 바로 직후에 어떤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습니까?
1절을 읽겠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그렇습니다.
신나는 사건을 예측할 수 있는 당연한 대목에서 갑자기 그 흐름의 맥을 깨는 말씀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3장과 4장이 서로 다른 장으로 분류되어 있었기 때문에 3장과 4장을 연결시켜서 묵상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주 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이 3장과 4장이 같이 연결되면서 이 말씀이 새로운 빛으로 저 앞에 다가왔습니다.

여러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라고 선포한 직후에, 성령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님을 광야로 데리고 가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도록 허용하고 있는 이 장면에는 하나님의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분명 이 광야의 시험을 통해서 그가 사랑하는 아들을 더 사랑하는 아들로 빚어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과 계획이 있었다는 사실을 먼저 우리는 결론적으로 전제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시험이었습니다.
우리가 학창시절에 경험한 일이지만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시험을 내 줄 때, 그것은 학생들을 골탕을 먹인다든지, 학생들을 파괴한다든지, 학생들을 좌절시킬 목적으로 시험을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시험은 선생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그 시험의 과정을 통해서 자기의 실력을 알아차리고,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그 부족을 보완하고 보충할 때, 그들은 더 성숙한 학생으로서 한 단계 Up Grade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시험이라는 것은 반드시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로 이런 시험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기대가 예수님만을 위한 기대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면서도 그 찬바람 부는 광야 속에 저와 여러분을 두시고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험의 폭풍우 속에서 끊임없이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이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1.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광야에서 금식을 하고 계십니다.
이 순간 마귀는 그의 결정적인 약점이었던 그의 배고픔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험을 단순하게 배고픔의 시험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것은 경제력에 대한 시험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돌을 향해 명령하시기만 하면, 돌이 변하여 떡덩이가 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신성을 가지신 예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그 돌을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할 수 없겠습니까?
능력이 있습니다.
이 시험의 촛점은 “이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험이 돈이 없는 사람들만이 받는 물질의 시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물질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이, 그 물질을 내 뜻을 따라서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용할 것인가? 그런 선택의 시험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훗날 이것을 육신의 정욕의 시험이라고 말했습니다.
요일2:15절 이하에 보면 “너희는 이 세상이나 이 세상이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너희가 만약 이 세상을 사랑하며 아버지의 사랑이 너희 속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첫째로 경계했던 것은 육신의 정욕, 바로 그 시험을 예수님이 이 광야에서 받고 계시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험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인 우리들도 이 물질을 사용할 때마다, 그리고 물질을 요구하고 물질을 원할 때마다 동일한 이 시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광야에서 이 물질의 시험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날마다, 아니 오늘도 이 시험 앞에 직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내가 물질을 사용하는 일에 있어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물질을 사용하고, 물질로부터 자유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그러잖아도 어렵고 궁핍한데, 만약 하나님의 뜻대로 물질을 사용하고 사업을 한다면, 내 사업은 망하고, 나는 패가망신하는 것이 아니냐고 어떤 분은 항의하고 싶어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마6:33절에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시리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참으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그것이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심이 되어, 물질을 사용할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결정하는 인생을 구한다면 나머지는 내가 책임지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물질의 욕심으로부터 자유한 인생이 될 때, 하나님은 나를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싶어하십니다.
“너는 정말 내가 사랑하고 내가 기뻐하는 사람이야”
여러분, 오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의 광야에서 오늘도 이 시험의 숙제를 들고, 그분 앞에 정말 사랑받고 기뻐하는 자가 되기를 기대하시며 우리들 앞에 다가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2.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이 시험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가 사람의 인정이 아닌 하나님의 인정만으로 살아가는 자가 될 것을 기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타락한 인간의 본성 안에는 하나님의 인정보다도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심이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정보다는 사람의 박수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박수 받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나쁜 것일까요?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당한 행동을 통해서 그 결과로 받을 수 있는 박수는 그것은 당연한 격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인정과 사람의 박수에 굶주린 나머지 인생에서 연극과 위선을 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그런 내 마음속에 있는 숨어 있는 동기를 살피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지난주간 이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은 내 안에 그런 유혹의 시험이 있다는 사실을 저에게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인정보다도 교회가 점점 성장해가니까 큰 교회 목사라는 사람들의 인정을 은근히 구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 마음속에 있었던 그런 허영의 동기를 꿰뚫어 보시고 저에게 “나의 명예를 꺾어야할 필요가 있다”고 내면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이나 명예나 직책이나 학벌이나 직장이나 사업을 자랑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내면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3.네가 나한테 절하면 천하 만국의 영광을 주겠다는 시험입니다.

8-9절을 읽겠습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여기 “네가 나에게 엎드려 경배하면”이라는 이 말에서 우리는 마귀의 의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그를 숭배하는 자, 그를 경배하는 자, 사탄을 숭배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자기의 동기나 정체를 숨기고 그의 미끼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여러분, 사람들에게 당신은 마귀를 숭배하기를 원하십니까? 물어 보십시오.
아마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펄펄 뛰며 “아니”라고 부인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 돈을 보여주고, 출세를 보여주고, 성공을 보여 준다면, 사람들은 그 성공 때문에, 그 출세 때문에, 그 돈 때문에 신앙을 버리고, 타협하는 일을 너무나도 쉽게 자행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만약 그렇게 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마귀를 경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여러분, 본문에서 “천하만국의 영광을 다 주겠다”는 미끼를 가지고 다가온 사탄을 향해서 우리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그리고 “주 너의 하나님을 섬기라”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오직 너의 주 하나님만을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상숭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따라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안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과는 달리 신약성경 골로새서에 보면 “탐심은 곧 우상숭배이니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탐심이 어떤 종류의 탐심이든지 간에 모든 탐심에는 우상숭배적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상의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우상은 만들어진 피조물이요, 우상은 창조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탐하면서도,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천하만국의 영광” 그것은 대단해 보이고 매혹적이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따라서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에게서 우리의 시선을 떼고, 하나님의 만드신 피조물의 영광에 시선을 두도록 우리를 유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 숭배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하만국의 영광이, 세상의 영광이, 세속적인 영광이 아무리 매혹적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창조주요, 마귀보다 크신 분이라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인류는 끊임없이 인생의 광야에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위한 시험들을 겪어왔습니다.
인류 역사의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마귀가 에덴의 동산에 찾아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여주었을 때, 성경은 기록하기를 보기에 아름다웠고, 먹음직했고, 그리고, 지혜스럽게 할만큼 탐스러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육신의 정욕이고, 안목의 정욕이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착각과 허영, 이생의 자랑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실패했습니다. 저도 실패했습니다. 여러분도 실패했습니다. 우리 모든 인류는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삶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삶의 진정한 현 주소를 잊어버리고, 춥고 외로운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둘째 아담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광야의 이 시험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승리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비밀은 딱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이 이 세상의 허영과 영광을 들고 찾아왔을 때, 대답하신 두 가지의 동일한 반복적인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로 붙들 수가 있다면, 또한 사탄을 숭배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기로 결단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시간 조용히 다가와서 “너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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