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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썩는 양식과 영생 양식 (요 6: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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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는 양식과 영생 양식 (요 6:22-35)

우리나라 사람들은 '먹는 일'에 꽤 많이 신경을 쓰고 정성을 들입니다.
  실제로 미국사람들의 먹는 것들과 비교해 볼 때, 우리나라 음식들이 월등히 맛있고 또 엄청나게 다양하기도 합니다.
  또한 소위 '몸에 좋다고 하기만 하면 뭐든지 다 먹어치우는' 왕성한 식성까지 가지고 있으니, 결국 '먹는 문화'라는 말까지 생긴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뭐든지 다 먹는' 것이 곧 건강과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비만을 오히려 조심해야 하는 시대에는 육류보다는 채식의 중요성이 더 강조되고 탄수화물의 섭취를 어떻게 하든지 줄여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온갖 종류의 좋다는 '생수'들에서부터 시작하여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채소'라든지 '녹차를 먹여 키운 돼지고기'에 이르기까지, 소위 '몸에 좋은 음식'을 찾아 먹느라고 다들 야단입니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식생활의 바른 자세는 역시 '간식(間食)'을 피하고 '주식(主食)'을 잘 먹는 것입니다.
  즉 '입에는 달지만 건강에는 좋지 못한 기호식품'들을 피하고 그 대신에 '어머니나 아내가 해 주는 삼 세끼의 밥'을 꼬박꼬박 잘 먹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강요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뭐든지 다 잘 먹는 것'이 아니라 '몸에 좋은 것을 잘 먹는 것'이 진짜 바른 식생활이며 건강을 지키는 기본인 것입니다.

  어떤 음식을 잘 먹는가 하는 식생활 습관이 곧 육신의 건강과 직결된다는 원칙은 사람의 영적 건강에 있어서도 꼭 같이 적용됩니다.
  과연 사람이 영적으로 건강하게 되기 위해서 되도록 '삼가야 할 간식'과 꾸준히 '잘 먹어야 할 주식'이 무엇입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우리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영적 식생활의 원칙을 주신 말씀을 통하여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교회에 나와서도 자기 입맛에 맞는 기호식품만 찾는 '기복(祈福)'은 결국 영적 건강을 잃게 만듭니다.

  본문 22절부터 27절에 기록하기를 "22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척 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23(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의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24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튿날"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주신 그 다음날을 가리킵니다.
  그 하룻밤 사이에 제자들은 벳새다에서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건너왔으며 예수님께서는 밤중에 물위로 걸어오셔서 그들과 동승하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벳새다 사람들은 어제 바닷가에는 "배 한 척밖에" 없었고 "제자들만" 그 배를 타고 건너가는 것까지만 보았었습니다.
  그러니 그들 생각에는 예수님은 벳새다에 남아 계셨어야 했는데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중에 "디베랴에서 온 배들이" 마침 벳새다로 왔기 때문에, 그들은 그 디베랴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그 배들을 타고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까지 예수님을 뒤쫓아 가게 됩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예수님을 만나게 되자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즉 예수님께서 밤에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과 합류하신 것은 꿈에도 모르고, '도대체 언제 이리로 건너오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실로 이들은 아주 열성적으로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속셈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일침을 놓으셨던 것입니다.
  바로 어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에게 베풀어 주셨던 풍성한 잔치를 맛보았던 그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요 6:15) 했었습니다.
  즉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하면서도 겨우 자기네들 식욕이나 채워줄 구세주를 찾고 있었던 것이었으며,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그 무리들을 피하여 "혼자 산으로 떠나가셔서" 기도하셨던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31절에 보면 그들은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자기네들 입으로 예수님께서 친히 베풀어 주시는 '오병이어의 잔치'를 먹은 자들이 예수님을 이토록 열렬히 따라와서 한다는 말이 '우리 조상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을 먹었는데, 우리에게도 그런 떡 좀 먹여 봐 주십시오.'하고 나왔던 것입니다.
  정말 무슨 '식탐'병에 걸린 사람들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표적'(sign)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구세주로 오셨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 즉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자이시며 세례 받을 때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하늘로서 소리가 들린 사건 등을 통하여 그 사실에 대한 공적 인증 또한 이미 받으신 분이셨습니다.
  물론 '오병이어의 기적' 역시 그 증거가 되는 표적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제대로 '눈 뜬' 사람이라면 벌써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산 넘고 물 건너' 예수님을 열심히 찾아온 이 무리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게 되어서 온 것이 아니라 순전히 '떡 좀 더 얻어먹으려고' 왔으니, 예수님께서 장탄식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떡의 맛'만 보았지 '떡의 표적'이 명백하게 증거해 주는 의미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단지 '떡을 먹고 배 부르는 재미'만을 찾아 예수님 만나러 나오는 자들은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복(祈福)주의' 기독교인들입니다.
  이들은 순전히 자기의 필요한 것을 찾기 위해서, 자기의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하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떡의 복'만을 찾아다니는 자들의 신앙생활에는 아주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지적하셨듯이 '표적'은 보지도 못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아주 열심히 예수님 따르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기복신앙'을 가진 교인들은 실제로는 예수님이 성자 하나님이시며 죄인의 구세주라는 이 사실을 깨닫지도 믿지도 못하고 있으면서도 남들 보기에는 아주 열성적인 신자처럼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바른 신앙생활에는 '복'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참된 복은 그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부터 성경의 '표적'을 통하여 확실히 깨닫고 믿고 고백한 이후에 따라오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저 '떡을 먹고 배부른' 상태에만 만족하고 앉아 있는 것을 '복'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가면 내 생활문제에 대하여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라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썩는 양식'에 불과하다고 하신 것만을 찾아다니는 교인, 교회에 와서 지내는 시간을 무슨 여가활동 즐기는 것처럼만 여기고 제 혼자 '트림이나 하면서' 늘어져 있는 교인, 자기에게 직장 제공해 줄 사람을 찾거나 표를 던져 줄 유권자들을 모으려고 교회 출석하는 '제 잇속만 차리려는' 교인들이 실제로 이 지상교회 안에 수두룩한 것입니다.
  이런 교인들은 백날 교회에 모인다 해도 '장터'나 '사교 파티장' 밖에 되지 않는 것이며 천 명 만 명 교인들이 모인다 해도 사실은 '영적 식탐'에 걸려 있는 병자들의 집단이 될 뿐 아니겠습니까?

  밖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오면 즉시 냉장고를 뒤지고 간식거리만 찾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정성껏 차려 놓은 밥은 먹으려 하지 않고 매일 사탕이나 과자나 아이스크림 따위만 먹으려 하는 것입니다.
  '기호식품(嗜好食品)'이라는 것은 원래부터가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하기 위한 음식'이 아니라 그저 '맛과 향기에 끌려 사람들이 즐기고(嗜) 좋아하는(好)' 식품입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회복제는 될 수 있지만 과량으로 섭취하게 되면 오히려 '약물 혹은 독의 작용'까지 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학술적인 사실은 모른다 하더라도, 그처럼 제 입에 단 것만 찾는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은 상식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신앙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자가 되는 목적이 어떤 의식주 문제 해결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교회 올 때마다 무슨 '떡 한 덩어리'만 찾는 교인은 자기 영적 건강을 스스로 망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썩는 양식'만 열심히 먹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내 딴에는 열심을 가지고 신앙생활한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혹시 내 입맛에 맞는 기호식품만 찾는 잘못된 습관으로만 하는 것이 아닌지를 스스로 잘 반성해 보고, 그저 '떡'만 찾지 아니하고 그 떡을 통하여 뚜렷하게 증거되고 있는 진짜 중요한 '표적'을 꼭 깨닫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께서 친히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잘 먹는 '신앙(信仰)'만이 영생의 건강을 누리게 해 줍니다.

  28절 이하 35절에 기록하기를 "28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30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33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앞서 27하반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썩는 양식"과 대조되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언급하시면서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의 인치신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앞에 나아오는 자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은 그처럼 육신이 사는데 필요한 음식이 아니라 사람이 영생하는 데에 꼭 필요한 아주 특별한 양식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경천동지할 말씀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양식은 이 지상에서의 육신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양식뿐이었는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그 육신뿐 아니라 영혼까지 함께 영원히 살게 만들어 주는 양식이 실제로 있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순전히 '썩을 양식' 좀 더 얻어먹겠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던 그 갈릴리 사람들은 그런 놀라운 말씀을 듣고도 전혀 감을 잡지도 못했기 때문에 "도대체 영생양식이 어떤 것입니까?"라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는 엉뚱한 질문을 예수님께 던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영생'이라는 것을 언급하시니까, '하나님의 일을 해야, 즉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영생구원을 받을 수 있다.'라는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던 것이었습니다.
  기복종교는 복 그 자체에 대한 개념부터가 잘못 되어 있으며, 이런 율법종교는 최고의 복인 영생구원을 얻는 방법에서 아주 포인트가 빗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바로 그런 잘못을 고쳐주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당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보내신 자'라고 하신 것은 당신의 신성(神性)을 스스로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또한 앞에서 사람들의 질문에서는 "일(works)"이라는 단어가 복수로 되어 있지만, 예수님의 대답에서는 단수(work)로 바뀌어 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합니다.
  즉 율법주의자들은 '여러 가지 선행들'을 행함으로서 무슨 '공로'를 쌓아야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영생구원 얻는데 필요한 '일' 즉 조건이나 방법은 '단 한 가지뿐'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 가지 '일'은 곧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 이것뿐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영생 구원 받기 위해 필요한 일'은 곧 '예수 믿는 것' 외에 다른 아무 조건도 공로도 필요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 또한 얼마나 놀라운 말씀이었습니까?
  '영생'이라는 기가 막힐 구원을 주시는 데도 다른 아무 어렵고 힘든 것 요구하지 않으시고 그저 당신을 믿기만 하면 된다고, 너무나도 쉽게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은혜롭기 짝이 없는 말씀을 듣고도 지금 예수님 앞에 있던 무리들은 전혀 감동 받을 줄 몰랐습니다.
  웬걸, 오히려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라고 반문했습니다.
  이 말은 '당신이 무슨 표적을 행하여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믿게 만들어 주겠습니까?'라는 뜻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지금 당신을 믿으라고 말씀하시니까 '우리가 당신을 믿을 표적이 될 만한 일을 당신이 한 게 뭐가 있소?'라고 따지고 대어드는 소리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참 얼마나 무례하고 건방진 말이었습니까?

  그 정도로도 끝나지 않고 이들은 또 한술 더 떴습니다.
  "모세는 우리 조상들에게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 만나를 먹여 주었는데 당신도 우리에게 그런 떡 한 번 먹여 줄 수 있으면 우리도 당신을 믿을 수 있겠소."라고 나왔던 것입니다.
  이들은 바로 어제 자기네들 육안으로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목격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표적'도 그들의 성에 차지는 않았고 그런 예수님도 아직 모세보다 못한 존재처럼 여겼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한심하기 짝이 없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우선 그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주의에 빠진 유대인들이 국부(國父)처럼 받들던 모세도 사실은 오직 하나님의 종에 불과하다고 바로잡아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만나 정도 가지고서는 비교도 아니 될 진짜 "하늘에서 내린 참 떡"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떡"을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했습니다.
  아직도 예수님 말씀의 의미는 모르면서도 무슨 '하늘에서 내리는 떡'이라는 소리를 들으니까 당장 그 떡을 달라고 요구하고 나왔던 것입니다.
  그 요구 속에는 이 예수님이 그들에게는 '두 번째 모세'가 되어서 만나 같은 떡을 하늘에서 내려주기를 원하는 기대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처럼 잘못된 기대감에 들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더 더욱 놀랍고도 위대한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바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나는 ...이다.'('I AM')이라는 예수님 특유의 유명한 '자기선언'입니다.
  요한복음에 이런 표현이 총 일곱 번 나오는데, 오늘 본문이 그 첫 번째 선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고 선포하신 것은 예수님만이 사람에게 영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너무나도 생생하고도 강력하게 증거하시는 말씀입니다.
  어머니가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를 자식에게 먹여 자식을 살려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우리 예수님이야말로 당신의 온 몸을 다 우리의 양식으로 주셔서 우리를 살려내시는 분이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지금 사람들이 기대하는 '하늘에서 떡을 내려오게 만드는 선지자'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기 자신이 사람에게 영생 구원의 떡이 되어 주시려고 스스로 하늘에서 내려온 성자'이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영생의 떡을 먹는 방법은 과연 무엇입니까?
  35절을 다시 보시면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고 선언하신 후에 곧 이어서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전후의 문맥에 따른다면 '나를 먹는 자'는 주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셔야 할 터인데 그 말 대신에 '내게 와서 나를 믿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것이야말로 그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는'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실로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 얼마나 쉽고도 깊이 있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시는 것이겠습니까?
  갓난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금세 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엄마의 젖을 빨아 먹는 것입니다.
  '먹는' 행위는 그처럼 간단하면서도 반면에 생명유지를 위해서는 가장 필수적인, 가장 중요한 행동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생의 건강을 누리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인데, 그러면서도 그처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이 떡을 먹는 것처럼 아주 쉬운 것입니다.

  '먹는' 일이 어렵다는 사람, 잘 안 된다는 사람, 배워야 하겠다는 사람 있습니까?
  '누워서 떡먹기,' '식은 죽 먹기'라는 말도 있듯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 '먹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로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이론적으로 많이 배워서 '복잡하게,' 이것저것 온갖 규칙들과 법령들을 지키면서 '까다롭게' 믿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눈앞에 있는 떡을 그냥 집어서 한 입에 먹듯이, 화육강생하셔서 우리 눈앞까지 친히 나타나 주신 이 성자 하나님을 그냥 간단하게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내가 믿습니다.'라고 단번에 고백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행함으로써 구원 받는다'라고 하는 율법종교와 비교해 볼 때, 그야말로 '떡 먹듯이' 쉬운 일 아닙니까?

  우리 교단의 파송선교사이신 최기만 목사님께서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생선회를 잡수시지 못하셨습니다.
  어디에 가서 원로목사님과 함께 생선회를 먹고 있다가 그 뼈를 가지고 매운탕을 끓여 주겠다고 식당 종업원이 접시를 가지고 들어오니까, 최 목사님께서는 생선뼈뿐 아니라 회로 썰어놓은 살점들까지도 함께 가져가서 끓여오라고 내 주시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행히 원로목사님께서 만류하셔서 참변(?)은 면했지만, 하마터면 그 비싸고 맛있고 싱싱한 회가 한꺼번에 매운탕 속에 몰사당할 뻔 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잘 잡수십니다.
  생선회는 단지 최 목사님께서 그 맛을 모르셨을 뿐이지 결코 먹기 어려운 음식이 아니며 일단 먹기만 하면 정말 맛있고 건강에도 좋은 음식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이처럼 음식을 '먹는 것'과 꼭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정말 맛이 있는 일이며 자신의 건강에 너무나 좋은 일이며 에너지를 발휘하면서 신행일치의 행동을 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잘 믿는 신자는 신앙생활에 항상 즐거움이 가득하고 힘이 넘치며 절로 열심히 충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 떡을 먹는 것은 그 정도만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라, '영원히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아니하는 영생'으로까지 이어지게 되는 여기에 진짜 '맛' 참된 '영양분'이 가득 들어 있다는 사실은 오직 그 떡을 먹어본 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맛있고도 좋은 영생양식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하고 매일 매끼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떡을 주식으로 받아먹음으로써 영육 간에 건강한 신자로 자라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요즘 음식과 관련해서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자기 몸에 좋은 음식은 바로 자기가 사는 땅에서 생산되는 식품이라는 뜻입니다.
  교회가 바로 그처럼 그 안에 살고 있는 신자들의 영적 건강에 정말 좋은 양식을 제공해 주는 곳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들 중에 그저 냉장고 안에 기호식품들, 패스트푸드만 가득 쌓아 놓은 집들이 있습니다.
  일단 먹을 때에는 맛도 있고 편리해 보이지만 결코 건강에 좋지 않고 나중에 꼭 뒤탈 나게 되는 음식들만 교인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처럼 교인들이 원하는 대로만 해주는 교회와 목사는 자연히 교인들의 '입맛'을 버리게 만들고 영적 영양실조에 빠지게 하며 결국에는 그 영혼을 죽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오직 예수님의 생명 양식을 정기적으로 잘 먹는 교회는 매사가 강건합니다.
  예배부터 은혜롭기 짝이 없고, 성도를 서로 섬기는 교제도 즐겁기만 하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도 모르게 하는 구제도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행하게 되고, 주일 오후에 하는 교구대항 농구리그도 신나기 짝이 없고, 주중에 또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까지도 조금도 힘든 줄 모르고 그저 보람차기만 한 것입니다.
  기호식품이라고 해서 전혀 먹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단 주식을 잘 먹고 건강한 교인이 되어야 다른 기호식품들도 적절하게 즐길 수 있지 않습니까?
  일단 예수님을 분명히 믿고 구원의 확신이 있는 성도가 되면, 교회생활 중에 절로 따라오게 되는 나머지 '즐겁고 좋은 복'들 역시 건강하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말이 간단해서 '생명 양식'이지, 이 얼마나 놀라운 양식입니까?
  사람을 배고프지 않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의 육체가 영원히 썩지 않게 해 주는 양식, 아니 그 영혼과 함께 영생하게 해 주는 양식입니다.
  실로 '불로장생(不老長生)' 정도가 아니라 '불사영생(不死永生)'하게 해 주는 생명 양식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오직 이 '신토불이의 메뉴'만을 교인들에게 공급해야 하며, 성도들은 말씀을 통하여 오직 이 '구원의 메인 코스'부터 꼭 찾아 먹어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배부르게 해 주는 떡' 그러나 결국 '썩는 양식'에 불과한 것을 찾지 아니하고 '항상 우리에게 주어진 주식' 곧 '영생하게 해 주시는 생명의 떡'을 잘 받아먹고 금세의 형통함과 내세의 구원까지 함께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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