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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당천(一當千)의 인생 (수 2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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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당천(一當千)의 인생 (수 23:1-16)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

오늘 말씀은 여호수아의 마지막 고별 설교입니다. 1절과 2절에서 거듭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다고 말씀합니다. "나는 나이 많아 늙었도다" 14절에서는 “보라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라고 하여 죽음이 임박했음을 보여줍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에게도 죽음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인생에서 가장 비참하거나 무기력하게 만드는 단어가 아마 이 ‘늙는다’와 ‘죽는다’는 단어일 것입니다. 늙는다는 것은 인생의 무력함, 쓸모없음, 추함 등을 연상시킵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늙는 것을 막아 보려합니다. 비싼 화장품을 바르고, 건강 식품을 먹고, 정기적인 운동으로 젊음을 유지하려 합니다. 그러나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때려 막으려 하지만 백발은 어느 새 지름길로 오고 맙니다(우탁의 시조, ‘한손에 가시들고 한손에 막대들고’). 늙음이 깊어지면 죽음이 찾아옵니다. 죽음은 존재의 끝입니다. 완전한 단절입니다.

그렇다면 늙는다는 것은 우리가 꼭 회피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잠16:3) 말씀합니다.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잠20:29)고 말씀합니다. 젊을 때는 힘이 있어 아름답고, 나이 들어서는 지혜를 상징하는 백발로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철이 든다’라고 말씀합니다. 철이 든다는 것은 인생이란 계절이 깊어감을 뜻합니다. 자연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듯이 우리 인생에도 4계가 있습니다. 꽃이 피는 봄이 있고, 무성하게 성장하는 여름이 있고,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가을이 있고, 모든 것을 떨구고 죽음과 휴식으로 돌아가는 겨울이 있습니다. 철이 들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때가 어느 때인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열매를 맺어야 할 때이건만 봄과 여름에 머물러 꽃을 그리워하거나 아직도 푸른 것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계절을 보면서 느끼는 것인데 모든 계절은 아름답습니다. 봄에는 꽃의 향연입니다. 5월 무렵에는 신록이 눈부십니다. 여름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푸른 잎들과 작열하는 태양의 힘을 느낍니다. 가을의 열매들을 보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열매들이 열릴까 하며 그 풍성함과 충실함에 감탄합니다. 열매가 떨어지고 난 다음에는 마지막 단풍이 절정을 이룹니다. 그러다 찬바람이 불면서 모든 잎들이 떨어지지만 그 쓸쓸함이 주는 맛이 있습니다. 겨울은 모든 것들이 죽습니다. 사실 죽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비우고 봄을 기약하며 생명을 보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의 4계절 또한 아름답습니다. 아기는 아기의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이 있습니다. 어린이는 호기심과 천진난만함이 있습니다. 청년시절은 청년의 도전정신과 준비하는 과정이 아름답습니다. 중년은 그 열매로 영향력 있는 모습을 드러낼 때입니다. 노년은 인생을 겪은 연후의 지혜가 있고 여유가 있고 비움과 내어놓음이 있습니다. 철이 든다는 것은 때에 맞추어 산다는 것입니다. 때에 맞추어 살면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성경에서도 늙는다, 죽는다는 말이 나오지만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보다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성경처럼 노년의 힘을 찬양하는 것도 드문 것 같습니다. 이삭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이삭이 나이 들어 눈이 어두울 정도가 되었지만 두 자녀 야곱과 에서가 아버지를 무시하지 못합니다. 이삭에게 있는 그 축복권을 받기 위해 안달입니다. 늙었지만 힘이 있습니다. 야곱은 어떻습니까?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 하고 고백하지만 그는 바로를 축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49장에는 야곱의 축복이라 하여 자기 12자녀를 하나하나 축복하며 그 운명을 결정합니다. 모세 또한 그렇습니다.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34:7)고 성경은 전합니다. 모세는 죽음에 이르는 나이가 되도록 자기 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 근처까지 인도했습니다. 죽기 얼마 전까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 놓고 율법을 강론합니다. 모세가 하루 동안 강론한 말씀을 모아놓은 것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모세 또한 12지파를 하나하나 축복합니다. 오늘 여호수아의 마지막도 아름답습니다. 황혼이 더 빛나고 아름답듯이 영적 거장은 그 마지막도 아름답습니다.

나이 들고 늙었다 하지만 결코 무기력하지 않고 추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늙음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무엇보다 인간은 늙고 언제가는 하나님 앞에 가야하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데서 나옵니다. 모세는 그가 지은 시편에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고 고백합니다. 인생이 마치 풀의 꽃과 같이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베어 지고 만다고 덧없음을 고백합니다. 인생이 한번 호흡 하는 사이에 다 지나가는 것 같다로 그 아픈 현실을 정확히 인식합니다. 그러면서 참 지혜는 바로 이런 인생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2) 우리 날이 짧음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모두에게 늙는 날이 있고, 죽을 날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늙음과 죽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절대적 숙명이고, 우리는 그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잘 활용하는 것입니다.

죽음 때문에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 죽음은 우리 인생을 새롭게 만들기도 합니다. 갑자기 암 진단이 내려질 때 죽음이 바로 코앞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정신이 바짝 듭니다. 마음은 조급해집니다. 인생에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당연하게 느끼던 것들이 감사하게 받아들여집니다. 또 그것 없이는 못살고, 내 인생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고, 근심 염려가 되었던 것들이 다 부질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죽음을 인식한다는 것은 우리를 지혜롭게 만듭니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던 알프레드 노벨의 일화입니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유럽의 거부가 되었습니다. 광산에서 뿐만 아니라 전쟁터에서도 다이나마이트는 유용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노벨은 무심코 신문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의 사망 기사가 어느 프랑스의 신문에 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그의 형이었던 루드비히 노벨이 죽은 것을 신문사가 잘못 보도했던 것입니다. 이 사망기사도 당황스러운 것이었지만 노벨을 더 당혹스럽게 했던 것은 그 헤드라인 기사의 제목이었습니다. 그 기사 제목은 이러했습니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죽음의 상인' 노벨 사망하다.”

노벨은 사람들이 자기를 '죽음의 상인'이라 부르는 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발명품이 인류의 발전에 도움이 되기도 하였지만, 반대로 전쟁과 파괴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아간 치명적인 무기였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결국 자신은 다른 사람의 목숨을 대가로 돈을 번 셈이 되었습니다. 

이 일 후 노벨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무언가 보람있는 일을 하고자 자신이 모은 전 재산으로 인류의 발전을 위해 혁혁한 공헌을 한 각 분야의 과학자들을 시상하는 노벨상을 만들었습니다. 노벨 평화상은 노벨상의 꽃으로 인류의 평화를 위해 산 위인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상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노벨을 떠올릴 때 그 누구도 그를 전쟁 상인으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노벨상은 개인과 나라가 서로 받고자 원하는 더없는 영광이 되었습니다. 사망 오보 기사가 나간 8년 후인 1896년 노벨은 정말로 죽었습니다. 그때 사망기사의 제목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세계 평화를 위해 살다간 믿음의 사람 노벨 사망하다” 늙는 것과 죽음을 받아들일 때 우리 인생은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여호수아의 유언

여호수아도 온 세상이 가는 길로 자기도 가야하는 것을 깨닫고 준비를 합니다. 여호수아의 준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 말씀에 붙들어 놓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이 말씀은 여호수아가 평생에 지켜왔던 말씀입니다. 여호수아의 좌우명이 되었던 말씀은 여호수아 1장 7절과 8절 말씀입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형통하며 승리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니 여호수아 마지막 유언도 역시 이 말씀 순종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오늘 읽은 23장의 전체 고별 설교의 내용을 요약하면  너희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면 승리하고 복을 받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패배하고 이 땅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는 내용입니다. 24장에서는 전체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놓고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겠다는 다짐을 하고 계약을 맺게 합니다. 여호수아는 사실 이곳에서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승리한다고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고 훈련시켰습니다. 지난 시간에 묵상했던 대로 르우벤, 갓, 므낫세 세 지파를 요단강 동편으로 다시 돌려보내면서도 말씀 순종을 명하였습니다. “크게 삼가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명령과 율법을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수22:5)

여호수아가 노년을 힘 있게 보낼 수 있었던 이유는 평생을 하나님 말씀에 붙잡혀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로 인생을 충성되고 힘 있게 살게 합니다. 이렇게 충실히 인생을 산 사람은 후회가 없습니다. 노년에 빛을 더 발합니다. 죽음의 순간이 오히려 아름답습니다. 죽을 때도 할 말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지막 말은 무엇입니까? 최후에 유언은 무엇입니까? 어쩌면 우리 인생은 유언을 준비하는 인생입니다. 내가 인생을 살아보니 이렇더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 말 한 마디를 할 수 있어야 인생을 헛되이 살았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간증이 있습니다. 확신이 있습니다. 14절입니다. “보라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에 아는 바라” 하나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고 자기 인생과 이스라엘 역사에 실현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인생은 놀라운 일들을 해냅니다. 10절입니다. “너희 중 한 사람이 천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말씀에 붙잡히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일당 천의 용사가 된다는 약속입니다. 모세는 두 사람이 만 명을 도망하게 하였다고 말씀합니다(신32:30). 이것은 지나간 옛날 말씀들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유효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눈에 띄이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오늘날’이라는 단어입니다. 8절입니다.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 9절도 보십시오. “대저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셨으므로 오늘날까지 너희를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느니라”

신명기서에서는 한글개역 성경으로 “오늘”이라는 단어가 72회나 등장합니다. 신명기 서의 말씀은 과거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모세가 말씀을 전하던 그 오늘이지만, 이 오늘은 말씀을 읽는 자가 사는 오늘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죽은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은 여전히 살았고 운동력 있습니다.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우리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합니다(히4:12).

오늘날도 여호수아처럼 말씀에 사로잡히고 말씀에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은 한 사람이 능히 천 명을 이기고도 남습니다. 아니 만 명이라도 능히 감당하고 천만 명이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조선을 성서 위에

우리나라 신앙 위인 중에 이런 말씀의 확신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일제 시대 활동했던 김교신이란 분입니다. 이 분은 처음으로 ‘성서 조선’이란 말을 만들어 냈던 분입니다. 『성서 조선』이란 잡지를 만들어 일일이 제작해서 배달까지 했습니다. 김교신은 조선을 성서 위에 놓으려 하였습니다. “우리는 다소의 경험과 확신을 가지고 오늘의 조선에 줄 바 가장 귀한 선물은 신기하지도 않은 『구약성서』, 『신약성서』 1권이 있는 줄 알 뿐이다.”  선생은 민족의 희망은 오직 성서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는『성서 조선』이란 잡지를 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만 우리 마음의 전부를 차지하는 것은 ‘조선’이라는 두 글자이고 애인에게 보낼 최고의 선물은 ‘성서’  1권 뿐이니 양자의 어느 하나도 버리지 못하여 된 것이 그 이름이었다.”

『성서 조선』은 1942년에 혹독한 겨울에 살아남은 연못 속의 개구리를 보고 ‘아 전멸은 면했구나’라는 글을 올렸다 일제에 의해서 폐간되고 맙니다. 김교신 선생은 이로 인해 1년 옥살이를 한 후 흥남질소 비료 공장 사감으로 노동자들과 함께 지냅니다. 당시 전염병 환자들이 많았는데 선생은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돌보다 동일한 장질부사로 1945년 죽음에 이릅니다.

김교신 선생의 성서조선의 비전은 오늘날 성서한국, 통일한국, 선교한국의 비전으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말씀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바꿉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하나님 말씀보다 세상 가치관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현대 한국 사회는 신자본주의의 무자비한 경제 논리만이 판을 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오직 효율성, 오직 경제입니다.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말씀은 없습니까? 저는 오늘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말씀의 위력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경제와 물질 우상에 빠져 있습니다. 2만 불 시대 3만 불 시대만 되면 잘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세상은 그럴지 몰라도 신앙인들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물질 중심의 사고는 오늘 여호수아가 비판하고 있는 가나안 우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나라들 중에 가지 말라 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에게 절하지 말라” 이 신이 누구입니까? 대표적으로 바알 신입니다. 바알 신은 비와 폭풍을 주관하는 신으로 농사의 신입니다. 가나안 지역은 여름철에 비가 오지 않습니다. 비가 오지 않아 모든 식물들이 메마르고 죽습니다. 그러다 가을이 되면 비가 옵니다. 비가 오면서 농사가 시작됩니다. 바알은 바로 이 농사의 신으로 여름철에는 죽습니다. 그리고 비가 오면서 다시 살아나는 신입니다. 비가 올 무렵이면 여기저기서 바알 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풍요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이 바알 우상을 섬기면 농사가 잘되고 복 받는다는 것이 이들 가나안 우상세력들의 주장입니다.

사실 본질은 우상이 아니라 우상을 매개로 한 물질에 대한 탐욕입니다. 물질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지만 섬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요즘 사람들은 물질이 신이 되었습니다. 부자가 되면 행복하고 구원받는다는 물질 종교에 빠져 있습니다. 물질은 얻은 자는 교만하고 사치하며, 물질을 얻지 못한 자는 불안해하고 비참해집니다. 물질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하니까 온 대한민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자는 뜻이 아닙니다. 100% 신자화 되어도 말씀의 원리를 따라서 우리 생활이 바뀌지 않으면 말씀 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100% 신자의 나라였지만 실패했습니다. 명목상의 신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말씀의 확신을 가지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말씀에 근거한다는 것이 어떤 추상적인 말이나 단순히 종교적 교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압니다. 물질 중심이 아니라 정신과 가치 중심의 삶이 곧 말씀 중심의 삶입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김구 선생님이 존경스럽습니다. 새로운 고액 화폐의 인물로 압도적으로 선호되는 인물이 바로 김구 선생입니다. 그런데 김구 선생은 차라리 천원 짜리 화폐에 어울리지 5만 원 권이나 10만 원 권에는 어울릴 성 싶지 않습니다. 김구 선생이 꿈꾸던 나라는 참으로 고상합니다. 저는 이런 나라가 바로 말씀에 근거한 나라라 생각합니다. 김구 선생은 '나의 소원' 이라는 글에서 내가 원하는 우리 나라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이 꿈꾸었던 나라는 군사 대국도 아니요 경제 대국도 아니요 문화대국입니다. 사람이 중심이 되는 나라, 사랑과 봉사, 신뢰와 정직을 자랑으로 하는 나라, 자국의 이익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민주와 평화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나라, 높은 문화와 예술, 철학과 사상의 힘으로 세상을 선도할 수 있는 나라가 바로 그런 문화대국입니다. 이 또한 성경이 꿈꾸던 사회입니다. 저는 이런 민족적 비전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나오길 바랍니다. 이것이 민족의 희망입니다. 어릴 때부터 부자 되기만을 꿈꾸는 이기적이며 물질중심적인 나라는 소망이 없습니다.

여호와를 친근히 하라

여호수아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합니다. 한 길은 여호와 하나님을 친근히 하는 길입니다. 8절입니다.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 그리하면 9,10절과 같은 승리가 주어집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셨으므로 오늘날까지 너희를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느니라 너희 중 한 사람이 천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편이 되어 싸우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반대로 다른 한 길은 가나안 족속을 친근히 하며 그 우상을 섬기는 길입니다. 12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빠져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피차 왕래하면” 달리 표현하면 세상을 좇아 사는 삶입니다. 그에 대한 대가는 13절입니다.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

친근히 하다는 것은 바짝 붙어서 따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따르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세상입니까? 자신이 가까이 하고 따르는 것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얼굴이 세상을 닮아 있고, 모든 생각하는 것이 세상 가치관 대로라면 우리는 세상을 친근히 하여 따르고 있다 할 것입니다.

영원한 평화와 안식은 하나님을 따를 때 있습니다.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그 중심으로 하나님을 친근히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드리고 있지만 세상과 너무 친합니다. 우리가 삶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도 하나님과 친근히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친근히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겠다 약속하십니다. 일당 천의 인생이 되도록 만들겠다고 약속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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