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육체의 가시를 주신 이유 (고후 12:5~10)

  • 잡초 잡초
  • 767
  • 0

첨부 1


육체의 가시를 주신 이유
고후12:5~10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제가 어릴땐 저의 집은 아궁이에 불을 때어 밥을 하고, 그것으로 난방을 하던 때입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소에게 주는 여물도 솥에다 삶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소죽을 끓이는 일이 큰일이었습니다. 지금은 소에게 죽을 끓여 주는 경우를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데 그때는 소도 사람처럼 끓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당시는 소는 재산 목록 1호였습니다.

그때 소죽을 쑤는 것을 제가 많이 했습니다. 헛간에 쌓아둔 땔감을 아궁이에다 넣으면서 불을 땠는데 그때 장갑이 어디 있습니까? 맨손으로 나뭇가지를 꺾어 넣다보면 손바닥이나 손등에 가시가 많이 찔렸습니다.
큰 가시에 찔리면 빼기가 쉬워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잔가시에 찔리면 가시가 잘 보이지도 않고 빠지지도 않았습니다. 그 가시를 빼지 않고 지내면 옷에 스칠 때마다 따갑고 불편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바늘로 그 가시를 파내 주었는데 그 가시보다 바늘이 더 무서워 빼지 않고 그냥 지낼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다가보면 어느 때 그 가시가 빠져 나갑니다.

아주 작은 것인데 우리 삶에 상당한 고통을 주는 것이 가시입니다. 우리 생활 속에 그런 가시들이 참 많습니다. 작은 것인데 아주 힘들게 합니다.
오늘 봉독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가시를 ‘사단의 사자’라고 표현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어 마치 마귀가 보낸 사자같이 힘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가시를 제거하기 위해 하나님께 3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시가 해결되기 보다는 오히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하시면서 오히려 그 가시가 바울에게 유익한 것이라는 응답을 받았다고 소개합니다. 따라서 합시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가졌던 육체의 가시가 무엇일까요?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어떤 가시가 있을까요?
그 가시를 제거해주지 않고 그냥 두신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기를 축원합니다.

1. 우리가 갖고 있는 가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중심으로 몇가지로 생각해보려 합니다.

1)육체의 질병의 가시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다고 했는데 그 ‘가시’로  번역된 헬라어 ‘스콜로프’는 ‘십자가’ ‘가시’ 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육체의 가시는 바울의 활동에 막대한 지장을 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에 보면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가 갖고 있던 육체의 가시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학자들에 따라서는 바울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를 안질, 두통, 간질 등 육체적인 질병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학자들은 끊임없이 뒤따르는 핍박이라고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바울이 체험하는 각종 유혹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 보면 바울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는 육체의 질병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4장에서는 바울이 갖고 있던 가시가 眼科적인 고통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갈4:13~15을 보세요.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바울은 이 성경에서 자신의 육체의 약함을 언급합니다. 그것 때문에 성도들이 시험을 당할 만한데 오히려 업신여기거나 버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천사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대접을 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15절에 보면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하면서 눈을 빼주었을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시각적인 장애가 있었다고 추정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이야 시력이 나쁘면 안경을 쓰면 되지만 그때는 무슨 안경이 있었겠습니까?
아마도 사도 바울이 시력이 극도로 약해 사람도 잘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라 추축해 볼 수 있습니다. 시력이 약하신 분들은 안경이 없으면 얼마나 불편한지를 아실 것입니다. 제동생도 안경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보인다 합디다. 잠잘때도 늘 머리맡에 벗어놓고 깨면 안경부터 쓰는 것이 일입니다.
시력 장애도 육체의 가시라고 할 수 있고 또 저같이 지체 장애가 있는 것도 육체의 가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밖에도 청각 장애, 송명희 시인같이 뇌성 마비장애, 신장의 기능이 이상이 생겨 매주 혈액투석하시는 분들, 심지어는 언어 장애인까지 다양한 육체의 가시가 있습니다.
현대의학으로 쉽게 치료가 안되는 질병을 가진 분들도 일종의 육체의 가시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게중에는 선천적인 것도 있고 후천적인 것도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지 않았는데 주어진 모든 것이 육체의 가시일수 있습니다. 이런 가시가 때로는 치료될 수도 있으나 치료가 안되는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장애인을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장애인이라 표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엄청난 일을 하셨습니다.
시력 장애인 이삭을 보세요. 이삭이 얼마나 눈이 어두웠는지 자기 아들 야곱이 변장을 하고 축복을 받는데도 구별을 못할 정도로 눈이 어두웠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축복의 전달자로 사용하였습니다. 야곱도 장애인입니다. 얍복강변에서 천사와 씨름하다 환도뼈가 부러져 평생 다리를 절면서 살았습니다. 지체 장애인입니다. 하나님은 그 야곱에게 축복의 증거를 보여 주었고 자식들을 축복하는 권세자로 삼았습니다. 모세도 일종의 언어 장애인입니다. 오죽 말을 못하면 아론을 말하는 사람으로 붙여 주셨겠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그 모세를 사용하였습니다. 오른손 지체 장애자 에후를 사사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범죄하고 시각장애자가 된 삼손의 기도를 응답해 주었습니다.
장애는 결함이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의 차이일 뿐임을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실 장애와 비장애는 단지 시간과 공간의 차이일 뿐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냐 부정적으로 받아 들이냐는 것입니다. 단지 손바닥에 박힌 작은 가시에 불과한 것입니다.

2)환경 가시도 있습니다.

육체의 가시만이 가시는 아닙니다. 때로는 내가 처한 환경이 나를 힘들고 고통스럽게 하는 가시인 경우도 있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돌아가신 경우, 평생 홀로 살아야할 경우도 가시입니다. 자식이나 가족이 장애를 갖고 태어나거나 중도에 장애를 갖게 되어 그로 인해 고통을 겪는 경우도 가시입니다. 그렇다고 헤어지거나 버릴 수 없잖습니까?
심지어는 믿지 않는 남편이나 부모, 친척으로 인해 신앙의 핍박을 당해 고통을 겪는 경우도 일종의 가시입니다. 그렇다고 이혼하거나 맞붙어 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16:24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쫒을 것이니라.”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십자가’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사명도 되지만 자기가 처한 환경도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벗어버리고 따라 오라하지 않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환경 장애는 믿음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전라남도 해남 한 섬에 소년이 있었습니다. 이 소년은 책읽기를 좋아하고 공부도 잘했지만, 너무 가난하여 중학교에 갈 수 없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따라 지게도 지고 풀도 베며 2년이란 시간을 보내지만, 해가 갈수록 배우고 싶은 열정은 억누를 길이 없었습니다. 중학교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섬에는 중학교가 없었고 육지로 나가야 하는데 가정 형편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세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다녔지만 하나님은 멀리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소년은 열다섯 살이 되던 1955년, 여름성경학교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께 편지를 쓰자고 결심을 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중학교에 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집이 가난해 갈 수가 없습니다. 저를 중학교에 보내주십시오. 굶어도 좋고 머슴살이를 해도 좋습니다. 제발 중학교에 보내주십시오.”

자신의 주소는 적었지만 하나님의 주소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겉봉에 큰 글씨로 ‘하나님 전상서’라 적어 우체통에 넣었습니다.
읍내 우체부 아저씨가 편지를 정리하다가 주소가 없는 이‘하나님 전상서’를 발견하였습니다. 난감해 하다가 ‘하나님 전상서’니 하나님과 제일 가까운 사람에게 전해주는 것이 좋겠다 싶어 당시 해남읍 교회 목사님께 전해주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소년의 편지를 눈물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주소의 소년을 찾아 교회 장학금으로 그를 중학교에 보내주었습니다. 중, 고등학교를 우등생으로 마친 소년은 1962년 한국신학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하였습니다. 그 뒤 스위스 바젤 대학교로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84년 귀국 한국 신학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지난 2000년에 총장에 취임하였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한국 신학계의 석학 오영석 박사입니다.

환경을 탓하고 체념하면 끝입니다. 그러나 환경이 어려우면 “하나님 전상서”라도 쓸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환경의 가시를 믿음으로 극복하면 그 가시가 복이 됨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3)사람 가시도 있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내게 끊임없이 고통을 주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 가시일수도 있습니다. 어떤이는 가정의 아내가 가시가 될 수 있고 남편이 가시인 경우도 있습니다. 회사의 동료나 사장이 가시인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 목사나 성도가 가시인 경우도 있습니다. 목사에게는 성도 중에 가시 성도가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없는 것 같으나 양이 아닌 가시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 성도가 자기가 가시인지도 모르고 가시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이중표 목사님의 간증을 보니 그분에도 성도가시가 있었답니다. 그 분이 시골 교회에 시무하고 있을 때 성도 가시 한 분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가시 교인을 뽑아내려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주님, 저 가시 교인 때문에 목회를 못하겠습니다. 설교도 찌르고 매사에 찌르니 너무 아파서 목회가 안 됩니다· 저 교인은 지금까지 수많은 목사들을 찔러서 교회를 떠나게 했고 저도 견딜 수 없습니다. 저 묵은 가시를 다른 데로 보내 주시옵소서.”
그때 주님의 응답하셨습니다.
“종아, 그가 갈 데가 없다. 그 가시를 누가 받아 주겠냐? 그냥 거기 있는 것이 좋다.”
“주님, 그러면 그 늙은 가시를 천당으로 일찍 데려가 주옵소서.”
“아직 때가 안 되었다.”
“오 주여, 그러시면 그 가시를 꺾어 주옵소서. 그 못된 버릇을 고쳐 주옵소서.”
“나도 못 고치겠다. 나도 그 가시는 고칠 능력이 없다.”
“전능하신 주님, 병든 자를 고치시던 그 능력으로 고쳐 주옵소서.”
“병든 자는 고칠 수 있었고, 죽은 자는 살릴 수 있지만, 가룟 유다는 못 고치고 데려 내가 죽었다. 너도 고칠 생각 말고 너나 죽을 생각을 해라. 그 가시를 뽑으려고 하다 보면 네 명대로 못 살고 죽을 것이다.”
그때 목사님은 얼른 깨닫고 순종했습니다.
“주님, 가시를 손대지 않겠습니다. 나를 죽여주옵소서.”
목사님은 기도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가시가 찌르지만 아프지 않았으며 얼마 후 그도 가시를 그만 두었답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 가시는 힘으로도 안 됩니다, 기도로 안 됩니다, 금식으로도 안 됩니다. 가시를 통해서 은혜를 받아 내가 변하면 해결됩니다.
9절의 말씀처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하신 말씀처럼 가시가 나에게 족한 은혜가 되도록 내가 죽으면 됩니다. 

이런 갖가지 가시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신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2. 우리에게 가시를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1)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7절을 보세요.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로 받은 계시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받은 은혜 또한 많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앞 구절을 보면 셋째하늘도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낙원을 다녀 온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자만하거나 교만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단의 사자’ 라는 말은 마귀의 역사라는 말로, 곧 사단이 나를 찌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직접 사단이 고통을 주는 것을 뜻합니다.
온갖 종류의 가시가 사단의 사자 노릇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직접 우리에게 고통을 가하고 있으나 하나님이 배후에 계시어서 저를 주장하신다는 것입니다. 욥기를 보면 사단은 자기 마음대로 성도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그런 권리나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허락 하에 의인에게 접근하여 가시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가시가 내게 있을 때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범주 안에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코 불행이라고 여겨 스스로 낙심하여 저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받아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잠잠히 가시의 공격이 지나가도록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고통이 휘몰아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으로 받는 것이 현명합니다. 실제로 바울은 표현할 수 없는 육체의 고통이 자신을 찌를 때 이를 하나님이 주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유익을 주시려고 하나님이 보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란 말은 스스로 교만하지 않도록, 즉 겸손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겸손과 낮아짐이 승리의 비법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교만하면 언제 어떤 가시가 우리를 찌를지 모릅니다. 사람 가시, 질병 가시, 환경 가시가 우리를 무척 아프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약으로도 안 되고 기도로도 안 됩니다. 별수를 다 써도 해결이 안 됩니다. 해결책은 낮아지는 것입니다. 겸손해지면 그 가시도 해결됩니다.


2)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9절을 다같이 봅시다.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분은 못하시는 것이 없고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시가 우리에게 찾아왔는데도 해결을 안 해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약한 모습, 고통당하는 그 모습 그대로 놔두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를 의심하게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통해 당신의 강함을 들어내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연약한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들어 큰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하게 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강한 사람이라면 내가 했다고 건방을 떨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약하면 하나님이 돕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기에 약한 것을 창피하게 여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못 배운 것을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연세 많으신 것을 감추실 필요도 없습니다. 가난한 것을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우리의 약함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런 약한 모습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 최 목사가 그렇잖습니까? 육체적으로 가시가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이것을 창피하게 여겼습니다. 감추려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뭐라 할까 두려워 내 약점을 숨겼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난 후로는 달라졌습니다. 나의 약함이 하나님이 은혜로 채워져  주의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오히려 약한 나를 더 강하게 하시고 부족한 나를 더 크게 쓰임을 받게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그 약함이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약한 나로 강하게” 라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 하게 눈 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 하게 눈 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그렇습니다. 약한 나를 강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가난한 아를 부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눈먼 나를 볼 수 있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위해 죽으셨고 그러기 위해 다시 사셨습니다. 할렐루야


3)주님 능력이 내게 늘 머물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9절 하반절을 다시 보세요.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하나님의 능력, 그리스도의 능력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연약함을 알고 그분들을 의지할 때 머물게 됩니다. 내가 강하다고 착각하거나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교만해 지면 주님의 능력은 내게서 떠나갑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나의 한계를 알고 겸손히 의지할 때 머물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은혜가 사라졌습니까? 첫사랑이 식었습니까? 그 원인이 누구에게 있을까요? 하나님에게 있을까요? 아니면 교회에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 원인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내가 사모하는 심령이 없어졌습니다. 부족함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그다지 사모하지 않습니다. 왜요? 다 풍요합니다. 그다지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프면 병원가면 되고 자식교육 대학까지 다 보낼 형편이 됩니다. 빈곤이 남과 비교되어 보면 힘들고 어렵지 내 자신 스스로만 보면 옛날보다 훨씬 잘살고 넉넉합니다. 그러니 주님의 은혜를 목매여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픈 가시를 주십니다.

내 힘으로 해결키 어려운 가시도 적당히 주시고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가시도 주십니다. 여기 이 자리에도 보니 여러 사람이 가시를 통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 가시가 해결되길 원하십니까? 그 가시는 겉으로는 가시 모양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입니다. 그러기에 그 가시가 은혜임을 알 때 비로서 강함이 들어납니다. 그 가시가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달을 때 그 가시는 사라지든지, 그 가시가 더 이상 가시가 아닌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가시를 가지고 계십니까?
그 가시를 원망스럽게 여기거나 힘들어하고 괴로워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 가시를 자랑하시고 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더 이상 그 가시를 감추거나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들어내시기를 축원합니다. (최일화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