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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선과 뱀 (출 4:1~4, 눅 11: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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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은 작자와 연대를 알 수 없는 우리나라의 고전소설입니다. 조선 후기의 판소리계 소설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소설은 흥보가, 놀부가, 박타령 등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흥부와 놀부 형제가 있었습니다. 흥부는 제비 다리가 부러진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제비를 고쳐주고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제비는 박씨 하나를 물어다 주었고 흥부가 심었더니 지붕에 큰 박이 열렸습니다. 가을이 되어 톱으로 박을 갈랐더니 온갖 금은보화가 나왔습니다. 흥부는 큰 박에서 첩도 얻었습니다. 첩이 들어있는 박을 탈 때에 흥부의 부인은 느낌이 이상해서 박 타기를 꺼렸다고 합니다. 심술 많고 욕심 많은 형 놀부가 동생 흥부의 집이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제비 다리를 부러뜨려 고쳐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똑같이 박씨를 물과 와서 심었습니다. 큰 박이 열리자 따서 박을 설었습니다. 그런데 이 박에서는 온갖 잡귀가 다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초라니, 둘째는 양반 천 명이, 셋째는 만 명의 사당거사가, 넷째는 만 명의 왈자들이, 다섯째는 팔도소경이, 여섯째는 장비가, 일곱째는 온갖 더러운 똥이 나와 집을 뒤덮어 알거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고전 소설의 대표적 주제는 ‘권선징악’입니다. 그리고 가장 권선징악을 잘 표현한 소설이 ‘흥부전‘입니다. 외모로는 똑같아 보이는 박이지만 흥부의 박에서는 보물 즉 좋은 것이 나옵니다. 같은 박이지만 한 쪽에서는 잡귀와 똥이 나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기도에 대한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구하는 이에게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반드시 응답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아버지가 없다”고 하십니다. 유익하고 좋은 것 대신 해롭고 나쁜 것을 줄 아버지가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만일 생선이 없어도 뱀은 안 주신다는 뜻입니다.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라는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삶은 달걀은 유대인들의 즐겨 먹는 정식입니다. 전갈은 악이며 위험의 상징입니다. 전갈은 몸을 구부리면 달걀같이 보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달걀 같지만 달걀이 아닌 전갈입니다. 이 것은 선을 위장한 악을 의미합니다. 좋은 것을 위장한 나쁜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전갈을 먹어본 사람이 있습니까? 저는 아주 오래 전에 중국에서 먹어봤습니다. 안 먹는 게 없다는 중국인들은 전갈도 먹는데 그들은 알도 주고 전갈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일반 상식으로는 전갈은 먹을 수 없는 악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기도에 틀림없이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하나님은 응답해 주시되 선한 것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생선을 주십니까? 왜 알을 주십니까? 하나님은 절대 악한 것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악한 것을 주시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본성적으로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왜 뱀을 줍니까? 왜 전갈을 줍니까? 마귀는 절대 선한 것을 주지 않습니다. 선한 것을 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본성적으로 악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유익하고 맛있는 자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해롭고 나쁜 자를 원치 않으십니다. 이 세상에서 생선이 되십시오. 뱀이 되지 마십시오. 알이 되십시오. 전갈이 되지 마십시오. 오늘도 생선과 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피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생선은 몸을 유익하는 좋은 것입니다.

  11절에는 말씀합니다.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는데 생선 대신 뱀을 주며”. 생선은 먹을 수 있고 유익한 것을 의미합니다. 떡과 마른 생선, 삶은 계란은 이 지방의 정식이며 주식입니다. 유대인들은 지중해와 갈릴리에서 생선을 잡아 말려서 주식으로 먹었습니다.

  민수기 11:5에는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이라고 합니다. 생선은 그들이 애굽의 고센에 있을 때부터 먹었던 오랜 식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주식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기적을 베푸신 사건, 보리떡 7개와 물고기 2마리로 기적을 베푸신 사건이 있습니다. 기적을 베풀 때마다 물고기가 등장하는 것은 그들의 주식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른 생선은 당시 서민의 식사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후의 식사에도 생선은 등장합니다. 갈릴리 호수 가에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과 함께 생선과 떡을 드셨습니다. 숯불에 구운 생선과 떡을 드시고 베드로와 대화하셨습니다.
  생선은 먹기 좋고 유익한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를 염려해야 하는 그들에게는 먹는 것이 과제이고 생존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주기도문에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기도문을 루터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양식이 되기 전까지는 음식이 내게 양식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사회에, 타인에게 유익하고 좋은 양식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이라는 말씀에는 좋은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처럼 우리도 좋은 것을 공급하는 자가 되라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유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유익한 것이란 호화로운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생선은 서민의 식사로 보잘 것 없지만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비싼 것이 아니라 싸지만 편하고 맛있는 것입니다. 이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남을 유익하게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낮은 지위에 있고 가진 것도 없지만 유익한 자가 있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고 재물도 많이 가지고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무익한 자가 있습니다. 남을 유익하게 하는 것은 나의 지위와 가진 것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왜 지위도 있고 소유도 있지만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지 못합니까? 자신의 가진 것을 가지고 자신의 유익만 추구하니까 그렇습니다. 심지어 사랑도, 섬김도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일 때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11세기의 성자 성 베르나르드의 ‘사랑의 네 단계’라는 유명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를 위해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가장 고귀한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남을 유익하게 하는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0:33에는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남을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유익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4:11에는 디모데에게 바울이 마가를 데리고 합니다. 왜냐하면 마가가 바울에게 유익한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빌레몬서 11절에는 바울이 도망친 종 오네시모를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전에는 무익하였지만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한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네시모가 주인의 돈을 훔쳐 도망간 무익한 종이었지만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믿고 나니 유익한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죄인이라도 아무리 무익한 종이라도 유익한 자가 되게 하십니다. 마치 그릇처럼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고 유익하게 하는 자가 됩니다.

  존 맥스웰은 “당신은 당신이 가장 큰 유익을 끼치는 분야에서 가장 가치 있는 존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가치는 유익을 끼치는데 있습니다. 아무리 지위가 있고, 소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유익이 되지 못하면 존재의 가치도 없습니다.

  세상에 필요 없는 존재가 있습니까? 모든 것은 유익하게 하려고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유익하게 하지 못하고 무익하게 하므로 존재가치가 무너지고 필요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존재 가치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자신의 존재 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은 유익하게 할 때입니다.

  링컨은 “나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므로 이 세상이 조금 좋아졌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이 세상에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유익하게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잠언 25:13에 말씀한대로 얼음냉수 같아서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존재가 있는가 하면 열 받게 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1에 말씀한대로 도무지 일은 하지 않고 일만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을 정말 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잘 생각해 보세요.

  히브리어에서 1이란 말은 ‘에하토’라고 합니다. 이 말은 숫자의 1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유익하다는 의미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1등이 되세요.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세요.

둘째, 뱀은 몸에 해를 주는 나쁜 것입니다.

  뱀은 생선에 대칭되는 나쁜 것의 대명사입니다. 뱀은 사람을 놀라게 하고 해독을 주는 짐승입니다. 출애굽기에 지팡이가 뱀이 되는 기적이 있습니다. 바로의 마술사들도 뱀을 만들었습니다. 바로는 뱀으로 상징되었습니다. 고대 바로의 조각을 보면 머리에 꼭 뱀이 있습니다. 뱀은 세상의 간사한 힘입니다. 예수님은 “뱀같이 지혜롭고”라고 하셨는데 세상의 지혜는 뱀만큼 가진 자가 없습니다. 지혜가 신앙과 함께 하지 않으면 꾀가 되고 간사함이 됩니다.

  생선 같아 보이는 뱀, 알 같아 보이는 전갈은 결국 해를 주는 것입니다. 결코 유익을 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생선은 서민들이 먹는 주식이지만 뱀은 먹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뱀을 먹을 수 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뱀이 유익하다고 합니다. 뱀을 먹으면 정력이 좋아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뱀은 제법 인기가 있습니다. 일전에 청계천에서 우리 토종 뱀인 누룩뱀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관계자들은 청계천의 먹이사슬이 복원되었다고 추정합니다. 먹이사슬이 복원되고 환경이 보존된 것은 좋지만 그래도 뱀은 결코 좋은 의미를 가지고 유익한 존재는 아닙니다.

  뱀은 원래 교만의 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에덴동산이 한국에 있었다면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선 뱀이 하와를 유혹하기 전에 하와가 뱀을 잡아 뱀탕을 끓였을 것입니다. 자기가 먹으려는 것이 아니라 남편인 아담에게 주려고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설사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 갔다고 하더라도 아담은 절대로 하와의 말 때문에 타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국 남자가 여자 말 듣는 것 봤냐?”

  뱀은 죄의 근원을 제공한 존재입니다. 악을 인간에게 전한 존재입니다. 악의 근원으로 상징되는 짐승입니다. 성경에는 사탄을 다섯 동물로 비유합니다. 뱀(창 3), 새(마 13), 이리(요 10), 사자(벧전 5) 그리고 용(계 12)입니다. 뱀은 가장 보편적인 사탄의 상징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가운데도 악을 조장하고 악을 퍼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 있어도 전혀 유익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혐오’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혐오스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혐오식품도 있습니다. 괜히 다른 사람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혐오감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세상에는 무익한 사람이 있습니다.

  요즘에는 혐오스럽다는 말 대신 다른 말을 하는 것 아시지요? ‘느끼하다’는 표현을 씁니다. 사람에게 느끼하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혐오스러운 사람을 느끼하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0:32에는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라고 합니다. 이 말의 헬라어는 ‘아프로스코포이 기네스데’라는 말입니다. ‘거침돌이 되어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지 않는’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행동 원리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원리는 다른 사람들을 실족케 하는 일을 피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 다음에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막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하십니다. 누가 넘어지게 합니까? 베드로입니까? 아닙니다. 사탄입니다. 넘어지게 하고, 거치게 하고, 악에 빠지게 하고, 시험 들게 하는 이 모두는 사탄의 짓입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내가 사탄의 도구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사역하다 보면 교인들의 방해가 많을텐데요?” 그 때 목사의 대답은 “당연합니다. 그렇게 방해받는 게 바로 나의 사역이니까요”였답니다. 방해받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방해하는 사람이 언제나 손해입니다.

  마태복음 18:7에는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라고 하십니다. 소자 하나에게 실족케 하는 자는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빠져 죽는 것이 낫다고 하십니다. 남을 실족하게 하고 쓰러지게 하고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는 것은 엄청난 죄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8:13에서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실족하지 않게 하려는 바울의 믿음입니다. 바울의 통 큰 복음입니다. 복음의 여유이기도 하고, 복음의 멋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고기도 안 먹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을 실족치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믿음이 아니라 남의 믿음을 생각하는 큰마음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진수입니다. 이런 신앙적 유연함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함이 될 수 있습니다.

  남에게 유익을 주십시오. 남에게 해를 주지 마십시오. 넓은 마음을 가진 자가 되십시오. 남을 포용하는 자가 되십시오. 믿음의 통 큰 자가 유익을 줍니다.

결론

  어느 날 소크라테스와 마주친 어느 친지가 흥분해서 말했습니다. “방금 제자 한 사람에게 들었는데 그거 알고 있소?”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 소문이 틀림없는지 확인했어요?” “아니요. 그저 들었을 뿐인데요.” “그게 무슨 좋은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나에게 유익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아닌데요.” “진실도 아니고 좋은 이야기도 아니고 내게 유익한 이야기도 아니라면 굳이 내게 이야기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 아내를 구타한다는 사실을 끝까지 알지 못했답니다.

  유익하지 않는 말, 유익하지 않는 일, 유익하지 않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유익하게 하는 길입니다. 유익한 일을 하는 자가 유익한 자입니다.
  맛을 주고, 생명을 주는 말을 하세요. 거치는 자나 실족하게 하는 자가 되지 마세요. 여러분의 마음을 설었을 때에 겉으로는 다른 사람의 마음과 같아 보이지만 흥부의 박처럼 금은보화를 내고 큰 기쁨을 내는 유익한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있음으로 세상이 아름답고 좋아지게 만드는 유익한 자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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