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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화산에서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막 9: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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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산에서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막 9:2-13)

기업에서 가장 우선시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인재라고 합니다. 기업 최고의 가치는 인재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삼성그룹 회장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몸소 챙기는 임직원이 있다고 합니다. '삼성 펠로우'라고 불리는 5명의 '장인(匠人)'급 인재라고 합니다. 살벌한 글로벌 경쟁 체제에서 매순간 피 말리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초일류 기업들에게는 '인재 경영'이 생존의 화두라고 합니다. 경쟁사들에게 인재를 빼앗기는 것은 곧 회사의 추락을 뜻하고, 반대로 인재를 많이 확보한다는 것은 든든한 날개를 다는 격이라고 합니다. "훌륭한 인재들과 하는 사업은 반드시 성공한다"고 합니다. '위대한 회사'(great company)를 만들려면 인재를 최우선적으로 확보해야 한다고 합니다. 1981년 회장에 취임한 잭 웰치는 재임 20년 동안 회사 가치를 무려 40배나 끌어올려 GE사를 세계 1위의 기업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핵심인재가 기업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사람이야말로 기업의 진정한 경쟁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 맥킨지(Mckinsey & Co.)는 작금의 경제 전쟁을 가리켜 그 핵심은 '인재 전쟁(The war of for talent)'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20개 기업 13,000명의 임원을 대상으로 실제 인재 활용 사례 및 해당 관리 결과에 대한 분석 작업을 5년에 걸쳐 연구했답니다. 연구 결과, 우수한 인재의 발굴 및 유지가 기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핵심 사안이라는 것입니다. 전략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그 전략을 실행하는 것도 사람이고 기술도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계 초일류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MS)도, HP도, 제너럴 일렉트릭(GE)도, 도요타 자동차도 핵심 인재 양성에 사활을 걸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가장 중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인재입니다. 12명의 제자를 뽑았습니다. 인류 구속사역의 대업을 성취하시고 그것을 전파하기 위해 제자를 뽑았습니다. 그 중에는 한 명의 배신자도 있었지만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한 충성스러운 세 명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 2절에 나오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야고보는 첫 번 순교를 당하신 분이십니다. 요한은 가장 오래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복음을 증거하며 계시록을 기록한 분입니다. 베드로는 수제자로 수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을 믿게 하여 초기 기독교의 초석을 놓으신 분이십니다. 이들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핵심인재로 양육을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복음 사역의 미래가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사역을 할 때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은 꼭 데리고 갔습니다.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막5:37) 이들만 데리고 갔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기도하실 때에도(막14:32) 이들만 데리고 갔습니다. 오늘 변화산에도 이들만을 데리고 갔습니다. 이들을 변화시켜 복음 증거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 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을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어 주님의 나라의 인재로 쓰임 받을가를 상고해 보겠습니다.

1. 우리가 변화산에서 변화되어야 할 마음의 변화는 부활에 대한 확신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회사에서도 교회에서도 정말 좋은 인재는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헌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실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목숨을 걸고 사명을 감당하는 충성도입니다. 아무리 실력이 좋고 배운 것이 많아도 충성도가 없으면 그는 회사를 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지혜가 있고 높은 직책을 가질수록 더욱 회사에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을 수 없어 작은 회사들은 핵심 인재를 인척을 쓰는 것입니다. 이사라고 세워놓았는데 사장 비난이나 하고 다니고 자기가 사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역적 모의나 하고 다니면 그 사람이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겠습니까? 사장이 핵심인재로 중책을 맡겨 놓았는데 사장과 의견이 다르다고 사장 비리나 깨러 다니고 자신의 의견과 다른 사람을 몰아내기 위해 패거리를 만들어 모의나 하고 있으면 회사가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직원들에게 자신 보다 인정받는 사람이 있으면 그 꼴을 보지 못하고 자그마한 일을 가지고 침소 봉대하여 중상 모략하고 있지도 않는 말을 지어내 퍼뜨려 상대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매도해 버린다면 그 회사는 결코 성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식이 조금 부족해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죽음을 무릎쓰고 임명한 사람의 뜻을 관철하는 충성도입니다.

하나님은 변화산 사건을 통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바로 그런 사람으로 변화시키릴 원했습니다.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종을 만들길 원했습니다.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방법은 죽음 후에 죽음의 고통보다 훨씬 영광스러운 삶이 죽음 후에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경험하고 확신하면 됩니다. 변화산 사건에서 바로 하나님은 그것을 먼저 보여주고 있습니다.

엿새 후라는 말을 통하여 이것이 신화적 사건이 아니고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역사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엿새 후에 예수님께서 무엇을 보여주시는지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의 눈 앞에서 신비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부활 후에 가질 신비한 형체로 변형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화적 기록이 아닙니다. 역사적 사실이라는 확증하기 위해 엿새 후라고 명백하게 적어 놓고 있습니다. 어떻게 변형되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옷이 눈부시게 빛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히 희어졌다고 했습니다. 영화로운 모습으로 변모된 것입니다. 본래 영화로운 분이셨는데 잠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이 잠시 제자들 앞에서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 영광스러운 광채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미 죽은 엘리야와 모세도 나타난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존경하는 율법의 대표자입니다. 대망의 메시아의 모형(신18:15)이었습니다. 시내산에서 이미 여호와의 영광을 경험한 자(출31:18)입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예언자 중 대표적인 위치를 차지한 자입니다. 메시아의 선구자에 대한 모델(말4:4,5 눅1:17; 마11:14)로 기록된 자입니다. 이미 여호와의 영광을 호렙산에서 경험(왕상19:8)한 사람입니다. 모세는 죽었으나 엘리야는 산체로 승천한 자입니다. 모세는 주님의 재림시에 무덤에서 일어나 주님을 맞으러 나올 죽은 성도들을 대표하는 자로 보여 주십니다. 엘리야는 주님이 강림하실 때에 살아서 맞을 자들을 대표하는 자로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겠다는 의미를 그들은 실제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변화산에서 실제적으로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변화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변화되어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머리를 사로잡는 것은 무엇이었겠습니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지 6일째 되는 날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권을 가지고 로마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평화의 나라 번영의 나라를 이루시길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반드시 버린 바 되고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살아 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 생각이 그들의 머리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다시 변화산 사건을 보여 주시고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부탁하십니다.

이 때 제자들이 서로 이야기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이 세 사람을 귀중한 인재로 쓰시길 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순교를 각오하고 복음을 전할 사람들입니다. 1세기를 변화시킬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인재로 만들기 위해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세 사람은 이미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은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부활한 후 어떻게 살아가는가는 실체적으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이 어떻게 죽음을 정복하는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변화산에서 분명하게 경험하고 목격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경험했을 것입니다. 신비의 세계를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훗날 베드로도 야고보도 요한도 이 사실을 증거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벧후 1:16-17)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 인재로서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도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는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한 세계에서 살게 됩니다. 잠시 십자가의 고난을 받는 것 영원한 것 아닙니다.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생각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절) 우리의 부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가를 보십시오.(고전15:50-58) 이 사실 믿고 신앙에 흔들리지 말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전 15:58)”

2. 우리가 변화산에서 변화되어야 할 마음은 예수님은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핵심인재의 충성도는 어디에서 나옵니까? 무엇보다 사장과 확실한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장을 사장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때는 충성도는 나오지 않습니다. 사장이 자기 군대 후배이면 우습게 봅니다. 사장을 자기와 동등한 사람이라고 보면 늘 경쟁 대상으로 봅니다. 사장을 이용해 그 자리를 찬탈하려고 생각하면 사장의 비리를 사원들에게 폭로하면서 자신이 사장보다 더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은근히 선전합니다. 충성도는 사장을 사장으로 존경하고 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라고 인정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바로 하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은 바로 “내가 인정하는 메시아다. 내 아들이다.”라는 사실을 그 신비한 경험 현장에서 분명하게 경험하게 하고 확증해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변화된 예수님께서 엘리야와 모세와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고 어떻게 반응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님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고 말합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호칭하면서 초막이 필요한 인간 예수님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나 엘리야 모세가 무슨 초막이 필요하겠습니까? 초막이 필요하다면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 말을 할 당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심리상태를 6절에 바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심히 무서워하였다고 했습니다. 초자연적이고 눈부신 광경을 보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변형 사건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냥 조용히 있었더라면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가 느끼는 바를 꼭 말하고 마는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부적당한 말을 했고 하나님의 마음과 동떨어진 말을 했습니다.

이 때 마침 구름이 왔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만난 것도 구름 속에서 이며 하나님은 구름 속에서 장막에 임하였고 솔로몬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바쳤을 때 성전이 구름에 덮였고 메시야가 강림하엿을 때 하나님의 임재의 구름이 성전에 돌아온다는 것이 유대인의 꿈이었습니다(출16:10; 19:9; 33:9; 왕상8:10) 구름이 임하였다는 것은 메시야가 왔다는 것을 알리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어떤 음성입니까? 7절에 보십시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아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확실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의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메시아에 대한 믿음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는 정치적 왕권을 가지고 세상을 지배하고 참 평화를 주시는 분으로 알고 있었는데 돌아가신다니까 이것은 이해가 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직접 메시아이신 것을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거해 주시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지시하는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는 근거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죽기 위해 간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부정되고 부인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당황하고 난처하고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성만 황당한 것이 아니라 심정도 실망시켰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예수님께 대한 하나님의 인정을 들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영광의 증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시다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영광스런 증인으로 만들기 원했습니다. 피난처로 만든 초막이 아니라 진정한 피난처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하나님은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진정 영원히 거할 집은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분에 의해 다스림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포기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례 받으실 때에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메시아 신분으로 공생에 시작할 때 성부 하나님께서 공적인 선언을 하였습니다.(막 1:11)”

수난 주간 기도하실 때에도(요 12:28) 메시아 되심을 증거해 주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이십니다. 이 믿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인재로 쓰임받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성경적 지식이 있어도 이 믿음이 없으면 능력은 없습니다. 율법의 상징인 모세와 예언의 상징인 엘리야도 이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율법과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완성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죽은 모세와 승천하였던 엘리야와 함께 나타난 것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지배하시는 메시아의 능력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메시야의 그림자였던 저들이 이제는 예수가 참 메시야 인 것을 증거하기 위해 나타난 것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두 세 증인 있어야 하는데(신17:6; 히10:28) 모세와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은 주님이 메시야라는 진리를 확증해 주는 것입니다. 아직도 의심이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변화산 사건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은 확실히 우리의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고 따르는 마음으로 변화되길 원하십니다. 이렇게 마음이 변하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3. 우리가 변화산에서 변화되어야 할 마음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방법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입니다.

기업에서 핵심인재가 되려면 죽음을 무릎쓰고 사명을 감당하는 충성도도 중요하고 사장을 사장으로 인정하는 확신한 신뢰관계가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다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사장의 기업 운영 방침과 지시를 잘 따라야 합니다. 사장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제 멋대로 하면 아무리 뛰어난 인재일지라도 회사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화산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예수님이 내 아들이라고 증거해 주시면서 7절에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오면서 그들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오늘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기 전까지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잘못된 내용이 전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전달하는데 의미를 축소하거나 왜곡하거나 확대하여 전달하는 것이 인간의 버릇입니다. 그래서 부활한 후에 부활을 경험하고 그 때 이 사실을 전하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인 수 있기 때문에 그 때 전달하라고 합니다. 자신들도 보았기 때문에 전달해도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그들이 힘과 권력의 메시아 개념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는 그들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산상에서 하나님의 임재,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일, 변화된 사건을 말하라고 하면 그 당시 메시아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에 맞장구를 치기 위해 어떤 표현을 할지 알지 못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세계 모든 민족 위에 하나님의 복수의 힘이 폭발할 서막인 것처럼 말할지도 모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하면 변화산 사건이 하나님의 복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십자가의 서막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때 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의심이 생겼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날 것이 무엇일까 서로 논의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메시아에 대한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상식과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당황케 하는 것에 대하여 질문을 합니다.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메시아의 선구자로 올 것을 믿었는데(말3:5-6) 아직 엘리야가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어찌된 영문이냐는 것입니다.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랍비의 전설에 의하면 메시아 삼일 전에 엘리야가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첫째 날에는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산에 서서 그 땅의 황폐를 탄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계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들릴 음성으로 “평화가 세계에 왔다. 평화가 세계에 왔다.” 외칠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날에는 “선이 세계에 왔다. 선이 세계에 왔다.” 셋째 날에는 “예수아가 세계에 왔다. 예수아(구원)가 세계에 왔다” 외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출현으로 이스라엘은 승리할 것이고 예루살렘은 회복되고 많은 백성은 이스라엘에 굴복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고난받는 메시아가 아니라 영광스런 메시아 정복의 메시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제자들이 의심을 품은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엘리야는 어떻게 되었는가?”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2,1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미 엘리야는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그를 대우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망각하고 제멋대로 그를 붙잡아 죽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세례 요한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에 대하여서 다시 말씀합니다. 12절 보십시오.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할 것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미 예언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구속을 위해 반드시 버림받고 고난받고 죽임을 당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방법에 집착하여 하나님의 방법을 아는 것을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려고 하지 않고 그들이 바라는 대로 하고자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 마음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해가 가지 않아도 하나님의 방법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법궤를 메고 가라하면 가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을 돌라하면 도는 것입니다. 지팡이를 손에 들라고 하면 드는 것입니다. 외치라고 하면 외치는 것입니다. 기드온 300명 용사를 남기라고 하면 남기는 것입니다. 상식에 맞지 않는 것같고 비 이성적인 것같고 논리에 맞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순종한 만큼 우리 삶은 풍요로워지고 기적을 체험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변화산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무엇이 변화되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변화산에서 변화되어야 할 마음의 변화는 부활에 대한 확신입니다.
우리가 변화산에서 변화되어야 할 마음은 예수님은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변화산에서 변화되어야 할 마음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방법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입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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