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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하는 공동체 (계 4:1~4,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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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하는 공동체 (계 4:1~4, 8~1)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우리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인, 혹은 크리스천, 혹은 성도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평생 해야 되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배드리는 일입니다. 예수 믿는 것과 예배드리는 것은 거의 동일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당에 나오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배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성공은 예배의 성공에 있습니다. 예배에 성공하면 그의 인생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에 실패하면 그의 인생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욱 우리는 이 땅에서만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서 천국에 가서도 우리 예배는 계속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른 모든 일은 중단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중단 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서도 예배는 계속 됩니다. 어차피  한두 번 드리고 그만 둘 예배가 아닙니다. 평생 영원히 드릴 예배라면 우리는 이 예배를 잘 드려야 해요 예배를 바르게 드리고 성공적으로 드려야 해요.
오늘 우리교회 성도들이 예배에 다 성공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약의 많은 인물들이 있지만 그들은 대부분 예배에 성공한 인물이었습니다. 최초의 예배자가 누구냐 아벨입니다. 그는 양의 첫 새끼와 피를 하나님께 드렸고 하나님이 그것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옆에서 형 가인이 그를 질투합니다. 자신의 예물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질투해서 동생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최초의 아름다운 예배자는 이렇게 순교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벨의 이름은 오늘도 우리에게 아름다운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아름다운 예배자의 모습으로 아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꼽는다면 아브라함도 위대한 예배자입니다. 그의 특징은 가는 곳 마다 제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그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그에게 말씀하셨고 인도를 받게 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벧엘 이라는 곳에 외롭게 수 밤을 지낼 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림으로써 그 때에 놀라운 약속을 받게 됩니다. 예배란 그와 같은 것입니다. 예배란 우리 인생에 활력을 주고 소망을 주고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예배를 통해 승리한 인물입니다. 다윗의 시편은 구구절절이 예배 시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찬양 시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예배에 성공자들이었고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받으면서 한 시대를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세대 우리 성도들의 예배의 위기가 무엇입니까? 예배드리는 자, 예배에 참여자로 서기보다는 구경꾼이나 방관자가 많아진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미국 워싱턴에 가면 국립성당이 있습니다. 이 워싱턴 국립성당은 1907년에 착공이 되었습니다. 그 기초석을 예루살렘에서 공수해 와서 기초석을 쌓았다고 해서 유명합니다.  그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과 런던의 주교 그리고 일 만 명의 시민이 참석해서 착공식을 화려하게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건축의 공적이 무려 87년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우리 예배당은 건축기간이 얼마나 됩니까? 한 1년 조금 더 걸렸지요. 87년 동안 예배당을 지었어요. 그러니 얼마나 크고 웅장한 예배당일까요? 여러분 상상할 수 있지요.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예배당이라고 합니다. 종탑 하나의 높이 100미터가 넘는데 그 가격만 하더라도 200만 달러가 넘는다고 합니다. 스테인 글라스, 그 화려한 대리석들, 그리고 웅장한 기둥,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거예요. 매년 10만 명이 그 성당을 찾아오는데 예배드리러 오는 사람이 아니라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당은 예배드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당이 구경하는 장소가 되어버린다면 무언가 잘못되어 졌다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예배드리는 예배자 입니까?  아니면 구경꾼이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배를 구경합니다.
“설교를 잘하나 보자. 성가대가 찬양을 잘하나 보자.”
“연습이 안 되었나 보네, 불협화음인걸 보니.. 저래서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장로님의 기도는 왜 이렇게 길고 지루할까? 아이고 나는 졸려서 혼났네.”
“설교가 왜 이렇게 딱딱하고, 재미가 없고, 헌금이 아깝다 아까워”

자기 입장에서 평가하고 있습니다. 자기 입장에서 예배를 다 평가했어요. 예배를 구경하고 평가하고 감독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자기가 예배드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배를 감독하는 사람입니다 문제가 있지요.

여러분, 성가대의 찬양이 내 마음이 흡족하다고 해서 하나님이 꼭 기뻐하신다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성가대가 찬양을 불렀는데 회중이 아멘을 크게 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찬양입니까? 찬양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찬양을 받으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극히 인본주의적입니다. 사람들로 어떻게 기쁘게 할까? 사람들이 어떻게 내 기도에 은혜 받았다고 할까? 사람들이 어떻게 목사님 설교 너무 재밌고 좋다고 할까? 인간들은 사람을 의식합니다. 형식을 따집니다. 체면을 따집니다. 그것은 나를 위한 예배이지 하나님을 위한 예배가 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물어봐야 합니다. 예배는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구경꾼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내 자신을 드리고 내 마음을 드리고 찬양을 드리고 기도를 드리는 내 중심을 드리는 신령한 예배자가 되야 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이 꿈을 꿉니다. 그런데 아주 큰 예배당이 꿈에 나왔다고 합니다. 우리 예배당 보다 훨씬 큰 예배당입었습니다. 파이프 오르간이 얼마나 비싸고 크던지. 소리가 얼마나 웅장한지 안에는 대리석이 깔려있고 성가대 가운은 얼마나 화려한지. 그런데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이상했습니다. 성가대가 찬양을 하는데 소리가 안 들렸습니다. 아니, 왜 소리가 안 들릴까? 여러분 텔레비전을 보다보면 어느 날 갑자기 텔레비전이 오래되면 소리가 안 들립니다. 사람들은 “아멘! 아멘!” 하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약에 안 받으신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아무리 매끄러운 예배와 찬양과 기도가 흘러나와도 그것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나 중심이고 인간의 편의주의라면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의 예배를 돌아봐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형보다도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마음을 기뻐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가셔서  연보궤 옆에 서계셨는데 부자가 돈을 많이 가져와서 헌금을 자랑스럽게 넣지만 예수님은 칭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어떤 과부가 부끄러운 모습으로 동전 두 닢을 넣고 떠나가는데 오히려 그 동전 두 닢을 칭찬하셨습니다. 부자는 많은 가운데 조금을 드렸지만 이 여인은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드렸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합당한 예배라고 칭찬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어떤 신학자는 마리아의 예배를 최고의 예배라고 평가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놓고 계실 때, 마리아라는 한 여인이 향유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부어드렸습니다. 그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막 비난을 했습니다. “비싼 향유를 허비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면 좋을 텐데.”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를 칭찬하셨어요. 저가 내 마음에 기쁨을 주었다. 여러분! 예배란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것이다. 마리아가 향유를 부어드린 사건이 바로 예수님께 드린 예배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기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쁨을 드렸습니다. 물론 우리가 예배를 잘 드리면 우리 마음에 감동도 오고, 감격도 있고 은혜가 넘칩니다. 그러나 우리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되어야합니다.

이 시대에 지나치게 인본주의적이고, 사람 중심적이고, 편의적인 것을 우리는 한번 반성해볼 여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나 중심의 예배냐, 아니면, 구경꾼 중심의 예배냐! 하는 것을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서 오늘 주일 날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깊은 환상 가운데 들어가게 됩니다. 그가 눈을 들어 보았더니 천사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시고, 그 주위에 24장로가 둘러 서 있습니다. 24장로란, 구약에서는 12지파가 있었고, 신약에는 12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을 합하여 24장로라 부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무리들을 대표해서, 그리고 네 생물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네 생물은 독수리, 사자, 소 , 사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상징 하는 것입니다. 독수리 같이 감찰하시는 눈을 갖고 계시고, 사자 같이 위대하고 참으로 용맹스러운 경외의 대상이 되시는 분이고, 소 같이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고, 사람과 같이 지혜로운 분임을 성품을 드러내면서 네 생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이 바로 천상의 예배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장차 천국에 가면 그 예배에 참석하게 됩니다. 아니, 그 예배는 지금도 드려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란 어떤 예배일까요? 오늘 하나님이 이 예배를 감찰하고 계시고, 이 예배 가운데 임재 해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 예배가  정말 어떻게 하면 진실하고 하나님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는 예배의 정의를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예배란, 하늘 문을 여는 행위입니다. 자, 여러분 오늘 계시록 4장 1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이후에 내가 보니 열린 문이 있는데”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늘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고 천상의 예배를 사도 요한은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보좌 그 깊숙한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저는 예배란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예배란, 하늘 문을 여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교재의 통로입니다. 우리는 정해진 시간에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함께 예배드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고, 기도를 올리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예배를 통하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걸 잘 못 믿습니다. 앞을 아무리 봐도 목사님 얼굴만 보이고 십자가만 보이지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기 딱 서 계시면 예배가 신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성령으로 이 자리에 임재 하셨습니다. 우리 예배 가운데에 역사하고 계신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은혜를 부어 주시고, 위로도 주시고,  격려도 주시고, 소망도 주시고,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질병을 치료해 주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배 가운데에 임재하십니다. 예배란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우리는 이 임재 하는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얻는 유익이 많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닮아가는 체험입니다. 왜?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요. 그리고 하나님이 임재 하는 그와 함께 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여러분 부부란 오래 살면 대개 얼굴이 닮습니다. 저도 결혼을 한지 한 25년쯤 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밖에 나가면 부부가 그렇게 많이 닮았느냐고, 또 어떨 때는 오누이가 아니냐고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제가 볼 때에는 제가 훨씬 잘 생긴 것 같은데, 남들은 우리 집사람하고 나하고 닮았다고 그래요. 참 이해가 안 됩니다. 부부란 닮는것 같습니다. 같이 살면 닮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도 또 그 부모를 닮습니다. 아이들이 아버지 걸음 거리도 비슷하고 목소리도 닮아갑니다. 가끔 우리 집에서 이런 전화 받을 때 헤프닝이 있습니다. 우리 아이가 전화를 받으면 어떤 분이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아이구! 목사님 오늘 집에 계시네요?” 우리 아들인데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어느 날은 제가 전화를 받으니까, “야! 엄마 좀 바꿔줘라.”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아들 목소리하고 제 목소리를 구분 못하십니다. 왜냐하면 닮기 때문입니다. 부부란 닮습니다. 아들도 아버지를 닮습니다. 제가 시골 양평에 있을 때, 교회 놀이터를 지나가는데 놀던 아이들 몇 명이 있었습니다. 초등학생들이었습니다. 저를 딱 보더니 “저 아저씨 좀 봐! 저 아저씨 얼굴이 우리 반 정주하고 똑같다.” 아버지하고 아들이니까 닮을 수밖에 없지요.

여러분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누구를 닮을까요?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성화와 영화의 단계를 거쳐 가는 것입니다. 영화, 성화 점점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면 볼수록 만나면 만날수록 그 횟수가 늘어날수록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20년, 30년, 50년을 믿었는데도 옛 성품을 그냥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건 조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예배란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 예배드리는 사람하고, 일주일에 다섯 번, 여섯 번 예배드리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일주일에 한 번 예배드리는 것은 부족합니다. 여러분 더 많은 예배에 시간을 여러분들이 회복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또한 예배란 무엇입니까?
예배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엎드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항복의 의미가 있습니다. 항복의 의미. 여기 이십사 장로들이 자기들의 성 면류관을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던져버립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전쟁터에 나간 왕들이 전쟁에서 지면 자기 왕관을 벗어가지고 이긴 왕의 앞에 보좌 앞에 던지는 것입니다. 항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배란 하나님 앞에 항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엎드리는 것 이십 사 장로가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완전히 낮추는 것입니다. 엎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죄인 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우리의 죄인 됨을 깨닫게 되고 그 죄를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엎드린다는 것은 감사의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임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양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의 댓가를 다 치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 씻음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배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그분이 나의 주인이시오. 그분이 전능하신 창조주이심을 고백하면서 우리 죄를 사해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깨뜨리고 복종시키는 행위가 바로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겠습니다. 계시록 4장 10절 11절 말씀 읽어보겠습니다.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아멘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창조주 하나님 앞에, 구속 주 하나님 앞에 우리가 엎드려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내가 깨뜨려짐을 고백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리고 감사하는 의미에요.

예배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를 낮추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니까 우리 주 하나님이여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이 우주의 주인으로 그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나의 창조주로 고백하고, 그분한테 나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연약한 티끌 같은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고 나면 사람이 교만 할 래야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가서 베드로도 예수님을 만났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소서!” 이사야도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주여 나도 입술이 부정한 자입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고 낮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 예배입니다.

또한 예배는 무엇입니까? 예배란 우리의 삶을 승리로 이끄는 축복의 행위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고 나면 우리 인생에 기쁨과 축복과 은혜가 넘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전반부에 보면 아기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태어나실 때 동방박사가 황금과 몰약과 유황을 가져와서 예수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그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드린 것이 바로 하나의 예배의 행위입니다. 성경에 “경배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하고 돌아갈 때,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서 그들의 갈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헤롯이 너희를 죽이려고 하니까 그길로 가지 말고 다른 길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제 세상에서 우리의 삶을 우리의 가야 할 길을 친히 인도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안전한 길로 보호 받는 길로 승리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인생을 승리 하며 살아갈 수 있어요. 그래서 예배가 중요한 것입니다.

역대하 20장에 보면 유대의 왕 여호사밧이 나오는데 이방 족속인 에돔 족속이 이스라엘에 쳐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의 고백 속에 이런 고백이 있었습니다. 역대하 20장 12절에 보니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습니다. 어떻게 할 줄로 알지 모르는 고로 우리가 오직 주 만 바라봅니다.” 이 대적을 감당 할 힘이 없어요. 그래서 오직 주님만 바라봅니다.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하나님 바라보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걱정하지 말아라. 성가대 노래하는 사람들을 앞세우고 나를 찬양하며 나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성가대를 앞세우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를 드렸더니 그 대적들이 하룻밤 사이에 다 배회하고 허물어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적적인 역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예배를 잘 드렸더니 대적에 승리하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 인생의 승리를 가져다줍니다.

여러분 성경 한 구절을 찾아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17절입니다. “이는 보좌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니라.” 오늘 이 말씀은 예배의 결과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하나님이 친히 저희의 목자가 되어 주셔서 저희의 갈 길을 인도하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그리고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저희들에게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리고 다시금 고난이 있고, 역경이 있고, 시련이 있는 세상으로 나아갈 때 우리만 혼자 나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손을 붙잡고 함께 동행 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우리를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세상에서 어떤 일을 만나도 우리는 승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의 승리자가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배는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대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입니다. 유명한 역사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때 영국이 어려움을 당할 때 영국의 유명한 처칠 수상은 그 당시에 성공회 주교인 윌리엄 테플이란 주교에게 전화를 걸어 부탁을 합니다. “방송을 하셔서 온 국민이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쫌 그렇게 해 주십시오.” 테플 주교는 방송을 통해서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때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전능한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하나님은 이 민족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보호 하실 겁니다. 이 큰 전쟁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비하면 아주 작은 일에 불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영국의 온 교회가 동시에 종을 치며 하나님 앞에 나와 찬양하며 예배하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 예배를 통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고 온갖 불안한 시기에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배란 그와 같은 것입니다. 한 번 예배를 드려도 정말 기억에 남을 만한 예배,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의 은혜가 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예배란 이와 같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너무 예배를 소홀하게 여깁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내 생물들은 밤낮 쉬지 않고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소리 쳤습니다. 그분에게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돌려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요? 좀 더우면 “우리 더운데 방학하자. 방학하자.” 추우면 “추운데 방학하자. 미끄러운데 가다가 미끄러지면 하나님의 영광 가리잖아.” 얼마나 하나님을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미끄러우면 넘어 질까봐 예배드리지 말고, 땀이 좀 나면 땀 흘리니 예배드리지 말자고 합니다. 더운 날씨에 교회 와서 에어컨 켜 놓고 예배드리고 점심도 드시고 교제 하는 것을 보면 참 감사합니다. 저는 한 번씩 절하고 싶습니다. 방학 하라고 얘기 하지 않으니 그냥 알아서 예배를 계속 드리는 것입니다. 알아서 드리는 거지 방학 하라 하지 말라 이런 얘기 안합니다. 지혜로운 분들은 알아서 방학 하시고 순종하시는 분들은 그냥 그대로 예배드리십시오. 왜냐하면? 우리가 천국 갈 때까지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천국 가서도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어느 것을 기뻐하실까요? 말없이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하나님은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배는 최고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여러분이 돈을 사랑하십니까? 그 사람은 돈을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권력을 사랑합니까? 그 사람은 권력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될 가장 중요한 본분중 하나는 바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 하나님은 그 예배를 가장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예배의 성공자가 되시고 신령한 예배자가 다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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