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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덩이에서 부르는 노래 (욘 1:17, 욘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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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에서 부르는 노래 (욘 1:17, 욘 2:1-10)

설교를 준비하다가 사람들이 인생의 구덩이를 무엇으로 생각하는지가 궁금했습니다. 인터넷에 구덩이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제목 하나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서 살아 나왔다." 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지옥이라는 단어를 썼을까 기대하면서 클릭을 했습니다.
내용은 "10일 정지를 받고 나는 미치는 줄 알았다..자살기도까지 해보았다... 간지러운 손끝을 빨면서 미칠 듯한 고독을느꼇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세상을 다 가졌다... "

얼마나 힘들었으면 미치는 줄 알았을까? 자살 기도까지 했을까? 과연 무엇을 정지당했단 말인가? 무엇을 정지 당했다 회복했기에 지금은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이야기할까? 궁금해서 싸이트를 확인해 보니 게임 싸이트였습니다. 게임싸이트 출입이 10일 동안 정지 되었다고 자살까지 결심했다구 한거입니다. 게임 10일 못했다구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살아 왔다구 간증을 해놓았습니다. 한참을 웃고 있다가 문특 밑에 달아 논 리플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걱정하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저런 어쩌다 정지 받으셨어요." 그런데 밑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이사람 혼자 글쓰고 혼자 답글달고..ㄷㄷㄷ" 게임 10일 못한것 위로받겠다구 자기가 자기에게 위로를 한 거였어요. 어이가 없어서 한 참을 웃었습니다.

여러분 무엇 때문에 아파하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구덩이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좌절 시키고 고통을 경험케 합니까?
저는 이글을 통해 사람마다 고통(구덩이)을 무엇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그 사람 수준을 알 수 있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무엇을 할때 지옥의 불구덩이 같다라고 생각 했는지 되새겨보았습니다. 조금 더우면 지옥 같다..... 조금 힘들면 지옥 같다.....조금 암담하면 지옥 같다...조금 관계가 어려우면 지옥 같다...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게 내 수준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물고기 뱃속에 던져진 요나의 수준은 어떤 수준일까요? 그리고 우리들의 수준은 어느 정도 일까요?

요나가 참 이상한 말이 합니다. 요나는 분명히 물고기 뱃속에서 최악의 상황을 보내고 있습니다. 요나의 인생 중에 가장 큰 구덩이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라는 말은 완료형입니다. 지금 이미 구덩이에서 빠져 나왔다는 것입니다. "구덩이에서 건지실 것이다"는 미래형이 아닙니다. 요나가 처해진 상황으로는 지금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날 건지실 것으로 믿습니다. 지금은 고통 중에 있으나 주께서 날 건지 실 것을 믿습니다." 미래형으로 표현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이미 건지셨습니다."라는 완료형을 쓰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스올의 뱃속, 물고기의 뱃속이 요나의 구덩이가 아니란 말입니까?
젊은 나이에 꿈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인생을 마무리 짓는 그 상황이 요나의 인생의 구덩이가 아니란 말입니까?
모든 권위와 혜택이 박탈당한 그 자리가 요나의 구덩이가 아니란 말입니까?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이 가뿐 숨을 몰아쉬는 마지막 숨이 멈추길 기다리는 그 순간이 요나의 구덩이가 아니란 말입니까?

그럼 요나는 무엇을 구덩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죽음의 상황보다 더 절박한 요나의 구덩이는 무엇일까요?
요나는 물고기의 뱃속을 1절에 스올의 뱃속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스올은 "지옥"이라는 말로 번역되는데 지옥 뱃속에 여전히 묶여있는 요나가 6절에 건짐을 받았다고 감사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과연 이 지옥의 고통 상황보다 더 무서운 구덩이는 무엇일까요. 요나는 자신이 건짐을 받았다는 이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면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찬양 할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줍니다. 요나서 2장은 요나의 노래라고 불리는 장입니다. 이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면 지옥과 같은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요나는 보여줍니다.
우리는 고난이나 실패나 좌절이나 질병이 인생의 구덩이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또 다른 차원의 구덩이가 있음을 오늘 말씀에서 보여줍니다.

요나의 구덩이는 첫째. 기도하되 하나님과 대화가 없는 기도를 했습니다.
요나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물고기 뱃속에서 숨이 끊어지길 기다리면서
2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가 물고기뱃속에서 건지셨나이다 고백했다면 고난으로 말미암아 요나가 깨달은 것이 요나의 구덩이일 것입니다. 요나는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과 대화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는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기도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1장 2절에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는 음성을 들은 것으로 보아서 그는 앉아서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럼 뭐가 문제 입니까? 대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비로소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과 대화가 회복됩니다.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대답하셨다"는 말씀과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똑같은 말이 두 번 반복됩니다.

그런데 요나가 기도했다 간단하게 표현하지 않고 요나가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은 대답하고 또 요나가 스올의 뱃속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께서는 음성을 들으셨다는 형식을 쓰고 있습니다. 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대화가 없었습니가? 1장엔 상호작용이 없습니다. 상호교통이 없었습니다. 그냥 하나님은 이야기하셨고 요나는 그 말씀이 자기에게 맞지 않았는지 니느웨로 가라는 음성을 멀리하고 정반대편인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대화가 없는 기도가 요나를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의견을 주요시하여 다시스로 가게 하는 불순종에 구덩이에 빠지게 했고, 대화가 없는 기도가 풍랑을 만나게 했고, 대화 없는 기도가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 재물이 되게 했습니다. 대화 없는 기도가 지옥의 뱃속의 고통을 느끼게 했습니다. 대화 없는 기도가 진정한 구덩이입니다.
요나의 기도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고 요나 자신이었습니다. 대화 없는 기도는 자신을 하나님자리에 앉혀 놓습니다.
우리의 뜻대로 기도응답을 받으면 정말 좋은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세계적인 전도자 빌리그래함 부인은 이렿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처녀때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을 것을 감사한다. 그때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다 들어 주셨다면 난 빌과 결혼하지 않고 부상당한 풋볼선수 부인으로 알콜중독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과 대화를 시작 합시다. 그는 대답해 주실 것 입니다.

'어떤 어린이가 방에서 간절히 기도하더랍니다. 엄마가 들어보니, "하나님, 미국의 수도가 워싱턴에서 뉴욕으로 바뀌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 엄마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기도가 범상치 않은 기도입니다. 아주 거창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감격하며 사과를 깎아서 간식으로 갖다 주었답니다. 그러고는 뿌듯한 마음에 아이에게 슬쩍 물었습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으려고 들은 것은 아닌데..... 너무 큰 소리로 기도해서 들리더라. 그런데 도대체 무슨 마음을 먹고 미국의 수도를 옮겨 달라고 기도하니? 네가 미국 대통령도 아니고?" 그랬더니 아이가 사과를 먹으면서 하는 말이 이랬습니다. "사실은 이번에 사회 시험을 봤는데요, 제가 미국 수도가 뉴욕인 줄 알고 뉴욕이라고 썼거든요."'

참 어이없이 웃기면서도 공감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대게 이런 식으로 기도합니다. 자신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는 수단의 하나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요구사항을 관철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면 안됩니다. 정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면 오늘 말씀에 해답이 나와있습니다.

그럼 요나는 스올의 뱃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대화 했을까요?
우리는 고난의 환경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대화 해야 할까요?

요나는 "하나님!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묻지 않고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대답대로 하기로 결단합니다.

요나서에서는 2가지 요나의 결단이 나옵니다.
첫째는 2장 4절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둘째는 2장 9절에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감사하는 목소리로 제사를 드리겠다고 결단합니다.

2절에 하나님께 물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결단했다면 요나는 왜라고 질문했을까요?
아니면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고 질문했을까요?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결단하고 감사의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결단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 그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 요나는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됩니까?

대화를 막는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가 "왜"라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대화를 막는 요소 중에 "왜"라는 질문이 많습니다.

어떤 여집사님이 이렇게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가장 난감 할 때가 딸애가 이럴 때 가장 힘들어요. 왜 우리 집은 이렇게 가난해. 왜 엄마는 그런 일을 해야하는데" 그러면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 났데요. "가난한 환경을 이해 할 수 없어 왜 이렇게 가난해야해 물었고, 아빠는 대답이 없었습니다. 왜 등록금이 안 주냐고 물었고, 왜 딸이라서 그러냐고 따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저런 아빠에게 보내셨는지" 왜 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아빠 내가 어떻게 하면 돼"
"하나님 내가 어떻게 하면 돼 그렇게 만 물었어도"그렇게만 물었어도
"아빠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진 안았을 것을" 후회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해하지 못 할 상황에서 너무 많은 왜라는 질문을 쏟아냅니다.
예기치 않는 일이 우리 삶에 일어나면 우리는 하나님 왜 이런일이 생겼습니까? 하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됩니까? 둘 중에 어떤 질문에 좋은 해답을 가져올까요? 2차 세계대전 중 클라코우에 있는 죽음의 수용소에 많은 유대인들이 잡혀갔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왜 이런일이 벌어졌습니까? 왜 우리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히틀러의 죄악이지. 그리고의 너의 죄 때문이지. 나라들과 지도자들의 죄악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때 스타니 슬라브 스키 레히라는 사람은 하나님께 다른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탈출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시체더미에 숨어서 탈출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질문에 대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왜?라고 물어도 대답하시고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물어도 대답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대화를 시작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대답해 주실것입니다. 그 질문에 하나님은 두가지를 요나에게 이야기 하셧고 요나는 그렇게 하기로 결단합니다.

하나님께 어떡 하면 됩니까? 물음에 두가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요나에게 하나님의 목전에 쫗겨 났을찌라도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 보라고 합니다.
요나는 그렇게 하기로 결단합니다.
4절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그것이 요나의 둘째 구덩이였습니다.
"지금 가장하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암에 걸린 환자분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병석에서 일어나 온가족과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지요.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아십니까?
저는 교육전도사때 교회가 싸움 때문에 갈라져서 예배를 드릴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교회에가서 기도해도 기도도 안 되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성전을 사모하지 못하고 예배를 사모하지 못하는 구덩이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어떡 하면 됩니까? 물음에 두가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둘째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을 버렸어도 감사를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9절에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그것이 요나의 셋째 구덩이였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보냈다는 사실 때문에 감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정말 감사 제목해야 할 것은 니느웨 보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도 감당 할 수없는 일을 맡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버렸습니다. 요나의 정말 감사 제목은 그때부터 시작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버렸으나 하나님은 요나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계속 함께하십니다. 요나를 통해 폭풍이 일어났고 그리고 선원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짐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폭풍을 일킨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요나를 통해 계속되는 요나의 계속 범죄하고 하나 님은 그런 요나를 제자리로 돌아오게 할려고 하는 순간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은혜를 버려도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용하고 하고야 맙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아야 할것이 잇습니다. 우리가 볼때는 고난이지만 하나님 볼 실때는 은혜가 너무 많습니다. 1장 17절"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하나님께서 물고기를 예비하신 것입니다. 물고기뱃속은 고난의 장소가 아니라 구원의 장소입니다.

고난를 잘 살펴보십시오. 그 속에 더 큰 감사의 제목이 있습니다.
고훈 목사님의 시가 생각이 납니다.
"신학생 담임전도사 시절 눈은 온통 땅 위에 쌓이고 쌀은 떨어지고 나무도 다 땠다
저녁밥을 꿂고 나니 첫 아이 갖고 배부른 아내가 가엾고 왠지 무능한 사람같아 서글퍼졌다.
40일도 금식한다던데 눈오고 날씨한테 돈꾸러 갈수도 없고 그렇다고 결혼반지 팔아 먹을 수도 없고, 한 끼 굶자 신앙으로 합의하고 누웠다. 밤10시 다 돼가는데 계시 받고 온 사람처럼 집사님 한분이 쌀 한말과 나뭇가지를 가지고와서 부엌에다 놓고 간다.
늦은 밤 저녁상 앞에 앉아 감사 기도하다가 우리에게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오니 감사 하나이다. 라는 대목에서 나는 울었다. 예수 믿는 날부터 수천번을 주기도문 외웠으나 이제야 그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왜 울었습니까? 감사해서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고 고난당할 때 우리는 주님의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아플 때 우리는 하나님의 치료를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 하는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신앙의 큰 구덩이는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함을 빼앗기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할 수 있는 맘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맘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감사로 제사하며 감사함으로 내주께 받는 은혜 갚으며 살겠습니다. 하는 맘을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나는 이 구덩이에서 빠져 나올 수 있게 되자 하나님은 요나를 사명의 장소로 보내십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10절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영적구덩이에서 해방되면 우리 고난의 구덩이는 아무것도 아니요 하나님은 회복역사를 베푸십니다 .
오늘 내 구덩이는 무엇일까 그곳에서 해방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지선아 사랑해 중에서=
저는 짧아진 여덟 개의 손가락을 쓰면서 사람에게 손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고 1인 10역을 해내는 엄지손가락으로 생활하고 글을 쓰면서는 엄지손가락을 온전히 남겨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눈썹이 없어 무엇이든 여과 없이 눈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험하며 사람에게 이 작은 눈썹마저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알았고 막대기 같아져버린 오른팔을 쓰면서 왜 하나님이 관절이 모두 구부러지도록 만드셨는지, 손이 귀까지 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습니다.
온전치 못한 오른쪽 귓바퀴 덕분에 귓바퀴라는 게 귀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나님이 정교하게 만들어주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잠시지만 다리에서 피부를 많이 떼어내 절뚝절뚝 걸으면서는 다리가 불편한 이들에게 걷는다는 일 자체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중략) 이제는 지난 고통마저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그 고통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남들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할 가슴이 없었을 테니까요.
그 누구도, 그 어떤 삶에도 죽는 게 낫다는 판단은 옳지 않습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 장애인들의 인생을 뿌리째 흔들어놓는 그런 생각은, 그런 말은, 옳지 않습니다.
분명히 틀렸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중략) "저러고도 살 수 있을까?"
네. 이러고도 삽니다.
몸은 이렇지만 누구보다 건강한 마음임을 자부하며, 이런 몸이라도 전혀 부끄러운 마음을 품지 않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런 몸이라도 사랑하고 써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감사드리며 저는 이렇게 삽니다.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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