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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깨어 있으라 (겔 36:24~31, 마 24: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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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으라 (겔 36:24~31, 마 24:42~51)

어제 인터넷판 신문에 마더 테레사에 관한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그 기사 제목은 “신은 어디에...50년 고뇌한 테레사”였고 “내면고백 편지 담은 책 출간...천국과 신의 존재 의심”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습니다.  이 기사는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에 난 기사를 옮긴 것이라고 합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생전에 가까웠던 고해신부에게 보낸 40여 통의 개인적인 편지를 담은 <마더 테레사-나의 빛이 되소서>라는 책이 출간되어서 신의 부재를 고민했던 테레사 수녀의 내면세계를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1979년 9월 피트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 커서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당신이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썼다고 합니다.  테레사 수녀에게 신의 부재는 봉사활동을 시작한 48년부터 숨진 97년까지 계속되었다고 전하면서 자신이 겪는 외로움과 어두움, 고통을 지옥에 비유하고, 가끔 이것이 천국은 물론 신의 존재까지도 의심하도록 자신을 이끈다고 털어 놓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책의 내용을 알 수는 없었습니다마는, 저는 이 기사를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나는, 테레사 수녀가 자신의 의심을 솔직하게 드러낸 그 신앙의 정직성이었고, 또 하나는 신앙인의 삶 속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의 영역 혹은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믿음 좋은 신앙인이란 모두 강철 같은 확신을 갖고 믿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굳건한 믿음을 지키는 인물을 말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기계적이지 않습니다.  한번 켜 놓으면 계속 작동하는 기계가 아닙니다. 

종종 사람들은 자신이 쌓아 올린 어떤 체계와 틀을 믿음이라고 오해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쌓아 올린 체계나 틀, 혹은 우리의 의지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이 다 부수어지고 난 후에, 나의 자아가 다 깨지고 난 다음에 마지막으로 남는 희망을 우리는 붙잡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남은 희망을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 모두 하나님이 자신의 삶 속에서 느껴지지 않는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했고, 그 경험으로 인해 깊이 실망하고 고통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모세, 다윗, 욥, 예언자 등 거의 모든 인물들이 다 그랬습니다. 

우리는 시편을 보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그분의 함께 하심에 감사드리는 시편들이 많이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부재로 인해 고통 받는 한 연약한 인간의 고백들도 많이 들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시22:2)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시38:21)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시83: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22:1)

이 마지막 시편의 말씀은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소리 지르신 바로 그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그 순간부터 십자가에 달려 있는 시간 동안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며 고통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주님도 이런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는 것 같은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했다면, 우리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오늘 신약의 말씀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관한 본문입니다.  예수의 재림은 신약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복음서에서, 특별히 늦게 기록된 마태와 누가에서 예수의 재림은 문제가 되었습니다.  또한 여러 서신서 속에서 예수의 재림은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을 경험하고 성령을 받았던 초대교회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을 때, 그것은 자신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일어날 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임박한 종말이 오고, 예수가 다시 오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재림은 점점 늦추어지고 예수를 직접 본 사람들도 하나 둘 세상을 뜨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한 말씀의 의미들을 다시 생각해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의 재림이 점점 늦어진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계시지 않는 시간, 주인이 없는 시간을 그들이 경험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실존론적으로는 하나님이 없는 시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주인이 없는 시간, 잠정적인 시간을 신앙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 주인이 없는 시간에 두 종의 모습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은 그 집안의 모든 일을 맡아 충성 되게 일하는데, 악한 종은 주인이 더디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친구들을 불러다 매일 술잔치를 하며 먹고 마시는데, 생각지도 않은 시각에 주인이 이를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그 다음 25장에 나오는 슬기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의 비유에서도 나옵니다.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며 등의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과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처녀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처음 듣는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깨어 있어라.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온다는 말씀은 늦게 쓰여진 서신서들 속에도 많이 등장하는 말씀들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말씀을 들으면, 우선 자신이 깨어 있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는 도적처럼 임할 그 날에 불안하고 초조함을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강박적으로 깨어 있으려고 하는데, 그것은 대부분 나의 어떤 행위를 바꾸어 보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기도 생활을 못하니 더 열심히 기도해야겠구나, 더 열심히 성경대로 살아야지, 더 열심히 사랑해야지 등등 자신의 생활태도를 바꾸어야 한다는 강박감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강박적인 생각은 물론 태도를 바꾸는 데까지 가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신앙의 무거운 짐을 하나 더 지게 되고 다시 옛날로 되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흘려버리거나, 어떤 종교적인 생활 속에 우리를 묶어 두려는 성서기자의 음흉한 속셈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두 가지의 태도는 모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해 강박적인 태도를 가지라는 말도 아니고, 그저 우리를 종교적으로 조종할 목적으로 나온 말도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영적 실재 혹은 영적 현실성(spiritual reality)에 대한 기대와 민감함에 있습니다. 

오늘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은 주인이 그 집 사람들을 자신에게 맡기도 떠났을 때, 마치 자신이 그 집의 주인인 것처럼 느꼈을지 몰라도 그것이 자신의 현실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가 언제인지는 몰라도 주인이 반드시 다시 올 것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인의 실재와 주인의 현실성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그는 깨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악한 종은 주인의 실재와 주인의 현실성을 잊어버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분명 우리는 천국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인이 없는 시간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고통이 있고, 어둠이 있으며, 좌절이 있고, 공허가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믿는다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삶은 소위 믿지 않는다는 사람의 삶과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다 사라지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마술이 아닙니다.  폴 추니어는 “하나님은 우리 마음대로는 안된다.  그의 비밀을 꿰뚫어 보고 그의 징조를 알아 그의 능력을 우리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요 마술이다”그랬습니다. 

그러면 믿는 삶과 믿지 않는 삶은 무엇이 다릅니까?  그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다림과 열망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끝 날에 가서 경험할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 속에서 경험하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내 삶이 거부당한 삶이 아니라 받아들여지고 용납된 삶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나의 상처가 나를 갉아 먹는 것이 아니라 삶의 성장에 참된 못자리임을 깨달을 때, 나의 실패와 실수가 나를 좌절시키고 절망시키는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는 은총의 자리임을 깨달을 때, 나의 어둠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여명의 시작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주인의 실재와 주인의 현실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성경의 수많은 신앙의 인물들은,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한 점의 의심도 없이 기계처럼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 속에는 의심도 있었고, 하나님의 부재라는 어둠의 그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의심하지 않은 것은 내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부재와 어둠이 자신의 진정한 현실이 아니라, 육신 가운데 있는 나의 일시적인 감각이나 생각이라는 것, 비록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마귀는 속삭이지만, 그 너머의 삶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믿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삶이 영원한 세계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 당사자는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지 우리의 어떤 노력으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해 오시는 주님을 깨어 맞아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세계를 은총으로 받을 뿐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의 신앙은 매우 수동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는 말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라는 말이 압니다.  우리가 어떤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그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가 할 일은 말 그대로 깨어 있는 것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실재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지금이 주인이 있는 시간인지 주인이 없는 시간인지를 깨어 있는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내가 지금 어떤 시간을 지내고 있는가?  내가 지금 주인이 계시는 시간을 지내고 있는가?  주인이 안 계신 시간을 지내고 있는가?  주인이 계시는 시간을 보낸다면, 우리는 그것에 감사하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대부분은 주인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시간을 지내게 될 것입니다.  이런 때, 왜 주인이 계시지 않는가 고민하기에 앞서 그 시간에도 깨어 있어 주인의 실재, 주인의 현실성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예언자 에스겔의 말씀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깨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현실성, 영적 실재를 민감하게 경험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은 이런 영적 실재의 민감함을 가지고 자신들의 현실을 깊이 들여다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좀 불의한 행동 - 사업상 속이는 것 또는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는 것 -이 있다고 해도 별것 아니다.  예언자들에게는 그 같은 일이 재앙이 된다.  우리에게는 불의란 사람들의 복지를 해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들에게는 사람의 생명이 좌우되는 치명타다.  우리에게는 하나의 에피소드요 그들에게는 세계의 끝장이다”

이것은 예언자들의 영적 민감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언자 에스겔은 아주 희망적인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운 데에서 구원하고 곡식을 풍성하게 하여 기근이 너희에게 닥치지 아니할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이 이스라엘에게 희망이 있었던 시절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가장 절망적이었던 때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에스겔은 예언자 중에서 가장 신랄하게 이스라엘을 비판했던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떠났고, 분뇨를 구워먹어야 할 정도의 비참함이 이스라엘에 임하리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칼로 망하고 칼을 피한자는 기근으로 굶어 죽을 것이라고 극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에 1차 포로로 잡혀갔던 에스겔은 그로부터 7~8년 후 예루살렘이 완전히 망했다는 말을 멀리 이국 땅에서 전해 듣고는 그의 메시지는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완전한 어둠 가운데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재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때, 예언자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에 되돌아 올 것을,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될 것을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깨어 있는 사람의 표본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자신의 감각적인 현실을 넘어, 어둠을 넘어, 하나님의 부재를 넘어, 영적 실재를, 하나님의 현실성을 보는 사람입니다.  오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늘 깨어서 여러분의 현실 가운데서 하나님의 현실성을 경험하며 오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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