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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귀 있는 자는 들어라 (마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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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 교수법(method of teaching)은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하는 탁월한 기능적 가치로만 평가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비유 자체가 진리입니다.

여기 『씨 뿌리는 자』란 말은 결국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비유는 씨 뿌리는 자의 씨 뿌리는 방법보다는 씨가 뿌려지는 밭으로 비유된 사람들의 마음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전파되는 천국복음의 메시지는 동일하지만 복음을 어떤 자세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네 종류의 땅 중에 세 종류는 나쁜 땅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시대의 사람들의 영적 상태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씨 뿌리는 사람들의 자세는 어떤 자세여야 되겠습니까? 세 종류의 땅 중에서 세 종류가 부정적이라는 데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한 종류의 긍정적인 좋은 땅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귀 있는 자』는 귀를 가지고 있는 자로 직역됩니다. 『귀 있는 자』의 의미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분별력이 있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순종하여 지키려고 하는 마음을 가진 자를 말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이유는 그 말씀을 영으로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6장 10절에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귀머거리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사람, 한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Ⅰ. 도무지 복음을 받지 않고 거부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본문 13장 4절에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길가』는 밭고랑을 따라 만들어진 길을 말합니다. 이 길은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갔기 때문에 단단해져 있습니다. 이 길은 마음을 굳게 걸어 잠근 청중(audience)들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길가의 결정적인 특징은 씨를 수용하는 자세가 되어 있지 못하고 씨 자체가 자신의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거부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결국 복음 진리를 처음부터 배타하고 불쾌하게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정리해보면 첫째는 의식적인 원인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경험이나 검증된 지식, 이른바 과학적 지식만을 추구하는 교만과 독선 때문입니다. 둘째는 무의식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증거를 얻지 못하는 복음을 무가치하게 평가하므로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서 배타적이기 때문입니다.
씨를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새』는 마음을 굳게 하여 뿌려진 복음의 씨앗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는 자들로부터 말씀을 빼앗아 구원을 방해하는 공중권세 잡은 자, 곧 사탄을 상징합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끝까지 복음을 거부하는 자는 결국 사탄의 먹이가 되어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다보면 이러한 사람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Ⅱ. 복음을 받기는 받되 일시적으로 받 는 자들이 있습니다.

본문 13장 5-6절에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라고 했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은 대부분 암석으로 된 고 지대입니다. 이곳에는 지표면에 흙이 얇게 깔려 있고 바위의 열기 때문에 싹이 빨리 나지만 씨가 뿌리를 내리기는 매우 힘이 듭니다. 길가와 같은 사람들이 진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돌밭의 경우의 사람들은 진리를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복음을 일시적으로 받아들였으나 깊이가 없고 잠시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주를 위해 헌신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다가 시련이 오면 말씀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신앙을 쉽게 버리고 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이런 인물을 찾아보면 바울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지만 세상으로 돌아간 데마 같은 사람입니다(골 4:14; 딤후 4:10; 몬 1:24). 또 다른 인물은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좇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근심하면서 돌아간 부자 청년(마 19:16-22)같은 경우입니다.
『해가 돋은 후에 말랐다』는 말은 조그마한 시련을 인내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환난과 핍박을 오히려 자신의 연단 기회로 삼아 더 큰 신앙으로 성화시킵니다. 마치 바다에서 돛을 단 배가 바람이 불 때 오히려 그 풍랑을 기회로 삼아 항해하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반면에 어떤 이는 그 풍랑으로 인하여 오히려 배의 속도가 늦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배를 침몰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도들의 환난은 신앙 성장에 필요악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욥기 23장 16절에 『하나님이 나로 낙심케 하시며 전능자가 나로 두렵게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시편 66편 10절에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같이 하셨으며』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48장 10절에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1절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Ⅲ. 복음을 받지만 비정상적으로 성장한 결과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본문 13장 7절에 『더러는 가시 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라고 했습니다.
팔레스틴 지방에는 가시 떨기 종류 만해도 200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가시 떨기는 이스라엘의 적(민 33:55; 수 23:13; 겔 28:24)을 상징했고, 악을 행하는 자(삼하 23:6; 미 7:4)를 상징했으며 저주(창 3:18)와 황폐함(사 9:18)을 상징했습니다. 이것은 신앙적 장애를 말하는 것으로 복음을 받은 신앙인들의 성장력을 약화시키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기운을 막았다』는 말은 숨을 막아 질식시켰다는 말입니다. 가시 떨기 위에 떨어진 씨는 가시넝쿨 속에서 성장은 하지만 정상적으로 자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시넝쿨 때문입니다. 그 가시넝쿨이 흙 속에 있는 양분을 다 빨아먹으니 연약한 씨앗이 살아 날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한 년수는 길지만 부족한 영양분으로 말미암아 그래도 다른 식물과 비슷하게 자라는 것 같은데 도무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신앙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능력 있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말에 있지 아니하고 행함에 있습니다. 신앙의 힘은 모양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습니다. 이 세상의 유혹에 하나님의 말씀을 다 빼앗기고 교회를 무슨 회사 정도로 생각하는 인본주의 내지는 합리주의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신령한 하나님의 일보다는 육신의 일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무슨 신령한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늘 하는 말이지만 교회의 행사보다 세상의 문화활동이 더 크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불신자들 가운데는 신앙인들보다 인간적으로 교양미가 넘치고 훌륭한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은 영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신령한 열매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의 자세는 신앙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사회에서 자신들의 생존에 필요한 수단으로서 필수적으로 지켜야만 하는 매너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신앙인격과는 또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 무슨 신령한 열매를 기대한다는 자체가 모순이지만 여기서 신앙인들이 간과하지 말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인격입니다. 신앙인격은 교만하지 아니하는 마음의 샘에서 솟는 겸손한 생수 같은 것입니다.
복음을 받은 후에 신앙이 정상적으로 비슷하게 자라는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이 그 땅에서 성장할 수 없도록 이미 되어 있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Ⅳ. 복음을 받은 후에 백 배, 육십 배, 삼 십 배 열매를 맺는 자들이 있습니다.

본문 13장 8-9절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좋은 땅』이란 식물이 성장하기에 적합한 땅을 말합니다. 복음을 받고 그 말씀을 지키고 인내하고 결실하는 자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8장 15절에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진리에 대한 수용자세가 잘 되어 있어서 가시떨기 밭과는 전혀 다른 상태입니다. 환난과 핍박과 세상의 유혹을 능히 이겨내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은 한 알의 씨가 맺을 수 있는 차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씨를 심으면 언제나 백 배의 결실이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보다 못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씨가 떨어져서 이렇게 결실했다는 사실이 중대합니다.
복음의 씨가 정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좋은 땅에 떨어져야 됩니다. 결국 좋은 땅은 구원받기로 작정된 택자입니다. 복음의 씨가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택자의 밭에 떨어지면 결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의 씨를 뿌리는 자는 항상 힘써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에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택자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 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택자는 귀합니다. 성도는 참으로 존귀한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흙 속에 있는 보석은 그 흙을 제거하여야 빛이 납니다. 때가 묻은 보석은 그 때를 닦아내면 본래의 모습을 만 천하에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택자는 반드시 최후의 순간에라도 신앙고백을 하고 이 세상을 떠납니다. 제가 서울에서 주의 교회를 섬기는 동안 건강할 때 신앙고백을 하고 주의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도 많지만 마지막 순간에 신앙고백을 하고 주님의 품으로 가는 성도들은 더욱 감동적이었습니다.
무거운 병마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최후의 순간에 복음을 수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마지막 순간에 거짓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복음은 인간의 마지막 순간까지 매도당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택자는 자신의 최후까지 하나님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택자는 자신의 최후의 종말이 되면 복음을 가까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불택자는 자신의 최후에 이르러서도 복음을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불택자는 자신의 종말이 가까워 올수록 복음에서 더욱 멀어지게 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인의 종말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복음은 엄격해야 됩니다.
그러나 생존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은 자유해야 합니다. 평상시에 사람들은 복음을 받을 때도 있고 복음을 거부할 때도 있습니다. 먼저 믿은 사람들이 전도하는 과정에서 택자와 불택자를 가차 없이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솔직히 복음이 떨어지는 밭의 성분을 잘 모릅니다. 성장하여 열매 맺는 것으로 보아서 알 뿐입니다. 본문에는 ① 좋은 밭 ② 가시떨기 밭 ③ 흙이 얇은 돌밭 ④ 길가 밭이 나타납니다.

복음의 씨가 떨어지는 곳이 어떤 성분의 밭인 줄을 알면 얼마나 간단하겠습니까? 그러나 밭의 성분 즉 사람의 마음이나 사람의 영적 상태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전도할 때 골라서 주시면 참으로 경제적일 텐데 왜 무작정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라고 하십니까? 라는 질문은 당연합니다. 그 대답은 성경이 밝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피차 핑계하지 못하고 후회가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22절에『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대해서 예레미야 20장 9절에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 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존 트렙은 말하기를 "사랑은 날개 없는 꿀벌에게 꿀을 공급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전도는 그 꿀벌이 스스로 날게 해 주는 기적을 공급해 주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토마스 왓슨은 "하나님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실 계획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데 있다." 라고 했습니다.
전하지 아니하면 전도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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