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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요셉은 (히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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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요셉은 (히 11:22)

유언의 힘

구역예배 때나 남녀선교회 등 작은 그룹이 모였을 때 이런 프로그램을 가져보면 좋습니다. 우선 가급적 조용한 저녁시간에 집안에 모여 조명을 약간 어둡게 해줍니다. 촛불을 한두 개 켜두면 더욱 좋습니다. 조용한 음악을 틉니다. 찬송가 중에서 장례식 찬송을 경음악으로 연주한 음반이 있는데 이것을 틀면 더 분위기가 납니다. 그런 다음 모두에게 흰 종이 한 장과 볼펜을 나누어줍니다. 그리고 맨 위에 이렇게 씁니다. 유언장(遺言狀)! 그리고 그 밑에 자신의 이름을 적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내용을 쓸 차례입니다. 내가 만일 유언장을 쓴다면 어떻게 쓸 것인가? 자손들에게나 아니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남기는 형식이 될 것입니다. 내용은 자유입니다.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것도 좋고, 내 재산을 어떻게 자녀들에게 분배할 것인지 써도 좋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유언장'이라고 부르는 영성훈련 프로그램입니다. "아니, 유언장이라니 무슨 재수 없는 소리를..." 하는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꽤 의미가 있습니다. 유언장은 절대 재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조용히 둘러앉아 유언장을 쓰는 과정에서 나도 언젠가 세상을 떠날 텐데 그 때 자손과 가까운 이들에게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부탁할까 명상하노라면 어느새 내 인생을 성찰하고 죽음을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 김에 아예 유언장을 정말 써두는 분도 있답니다. 우리도 한 번 해보면 어떨까요? 다음은 어떤 사람이 실제 남긴 유언장 내용입니다. 누구일지 생각해 보십시오.

첫째, 유일선의 딸, 즉 손녀인 유일링(당시 7세)에게는 대학졸업 시까지 학자금 1만 달러를 준다.

둘째, 딸 유재라에게는 유한공고 안에 있는 묘소와 주변 땅 5천 평을 물려준다. 그 땅을 유한동산으로 꾸미고 결코 울타리를 치지 말고 유한중, 공고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여 그 어린 학생들이 티 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더불어 느끼게 해 달라.

셋째, 내 소유의 주식 14만 941주는 전부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한다.

넷째, 아내 초미리는 재라가 그 노후를 잘 돌보아주기 바란다.

다섯째, 아들 유일선에게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

이 다섯 가지 유언을 남긴 분은 바로 유한양행의 창립자인 고(故) 유일한 박사입니다. 1895년에 태어난 유일한 박사는 일찍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회계사로 일하며 성공한 삶을 누리다가 일제시대에 병원과 약품이 없어 죽어가는 조선인을 보고 고국으로 돌아와 유한양행을 창업합니다. 그런데 그는 기업의 이윤을 거의 모두 종업원들에게 배분해주고 학교를 세우는 데 씁니다. 그 흔한 탈세 한 번 안 하고 박정희 정권에게 정치헌금 한 번 안 하다가 미움을 받아 세무사찰까지 받지만 아무리 털어도 먼지가 안 나자 박 대통령은 오히려 감동하여 그에게 훈장을 주고 1년간 세무사찰을 면제해 줍니다. 1971년 유일한 박사는 세상을 떠나면서 앞서 말씀드린 유언을 남기고 자신의 전 재산을 공익기업에 기부합니다. 이 분의 딸인 유재라 여사도 자신의 재산 200억을 사회에 환원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그 아버지에 그 딸입니다. 그래서 후세의 많은 사람들은 이 분을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기업인으로 기억합니다. 특히 그가 남긴 유언장은 참 아름다운 유언장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한 장의 유언장이 이렇게 자손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영향력을 남기고 있으니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셉의 유언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한 위대한 신앙인의 유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은 내용입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의 유언을 좀 더 자세히 보려면 창세기 50장을 읽으면 됩니다. 24절부터 26절까지 같이 읽습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요셉은 어떤 유언을 형제와 자손들에게 남겼습니까? 장황하고 복잡한 유언이 아니라 딱 두 가지 내용입니다. 첫째는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은 형제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 애굽에서 인도해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하는 내용인데 이것은 앞으로 있을 출애굽 사건에 관한 예언입니다. 둘째는 "출애굽 할 때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고 맹세하라"는 것입니다. 유언치고는 참 간단합니다. 그러나 이 간단한 유언 속에는 요셉의 놀라운 신앙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전당>은 이 유언 속에 요셉의 믿음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간단한 유언 속에 들어있는 요셉의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함께 찾아봅시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보는 믿음

첫째, 요셉은 믿음의 눈을 통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보고 유언을 남기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즉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 현재 보이지 않는 것들도 볼 수 있고, 나아가 앞으로 일어날 일까지 내다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니, 그러면 믿음만 가지면 앞날을 미리 내다볼 수 있는 점쟁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하고 생각되십니까? 물론 성경에 보면 앞날을 미리 내다보는 경우가 종종 나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경우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의지하여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보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예언'이라고 부릅니다. 글씨는 똑같아도 성경이 말하는 예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미리 예(豫) 자를 쓰는 예언(豫言)인데 '예약'(豫約)이나 '예비고사'(豫備考査)라는 말처럼 그야말로 앞서서 미리 내다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종류의 예언, 즉 앞날을 미리 내다보는 예언도 있습니다만 성경이 말씀하는 예언은 주로 예언(預言)입니다. 여기서 쓰는 '예' 자는 옥편을 찾아보면 똑같이 '미리 예'라고 나와 있지만 사실은 '미리'라는 뜻보다 '맡긴다'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그래서 돈을 맡긴다는 의미에서 '예금'(預金)이라는 말도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예언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내가 앞날을 미리 내다보고 말하는 것이지만 후자는 하나님이 앞날에 대해 미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을 맡기셔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예언은 어디에 가깝겠습니까? 후자,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시면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다."라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오늘 요셉은 이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참 후에 일어날 일을 미리 보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는 것은 이때로부터 거의 400년 이상 지나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는 미리 보았고 또한 그대로 될 줄로 믿었습니다. 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무슨 앞날을 내다보고 몇 백 년 후의 일을 예견하는 점쟁이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고 보여주시니 그대로 될 줄 믿고 그렇게 유언을 남긴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앞에 어떤 일이 생길 지 누가 압니까? 아무도 미래를 모르기에 늘 불안 초조한 것 아닙니까? 몇 백  년 후는커녕 내일 무슨 일이 생길 지도 모르는 불안한 인생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천하태평입니다. 왜? 분명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 앞길을 인도하실 줄 '믿기' 때문입니다. 내 앞날에, 그리고 자녀들의 앞날에 어떤 일이 있을지 우리는 모르지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니 분명히 좋은 일이 있을 것이요, 구원의 길이 있을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줄 믿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가 바로 요셉의 믿음이었고 오늘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의 눈입니다. 이 믿음만 가지면, 이 믿음의 눈만 가지면 우리 앞날에 대해 아무 걱정도 없습니다.

약속의 땅을 사모하는 믿음

둘째, 요셉은 이 유언을 통해 약속의 땅을 사모하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요셉은 애굽 땅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정말 고생 고생해서 겨우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형들에게 팔려 노예생활도 했고 감옥에 갇혀 죄수 노릇도 해보았습니다. 보잘것없는 히브리 노예요 죄수의 처지에서 이제 한 나라를 다스리는 총리대신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41장 42절에 보면 애굽 왕 바로가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직접 요셉의 손에 끼워주었다고 합니다. 이 인장 반지는 귀한 보석 반지일 뿐 아니라 당시에는 중요한 서류에 결재를 하는 도장으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바로 임금이 이 인장 반지를 빼서 요셉에게 끼워주었다는 것은 이제부터 애굽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총리인 요셉에게 일임한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로는 요셉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어주고 자기의 '버금 수레'에 태워 모든 백성에게 그 앞에 엎드리라고 명령합니다. 엄청난 권세와 부귀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저도 이 '버금 수레'를 타본 적이 있습니다. 군대에 가면 지휘관이 늘 타는 지프차를 1호차라고 부르는데 이 1호차 한 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스페어로 타는 2호차도 있습니다. 이 2호차가 '버금 수레'입니다. 제가 군목으로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제가 최전방 철책선에 방문을 가야 하는데 마침 부대에 지프차가 남은 것이 한 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수집사님인 연대장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목사님, 그러면 제 2호차를 타시지요."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그 2호차, 즉 '버금 수레'를 타고 전방에 나타나자 모든 부대에 비상이 걸린 것입니다. 2호차가 나타나니까 연대장이 불시에 순시 나온 줄 알았는지 부대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병사들이 허둥지둥 대더니 곧이어 대대장이 거의 맨발로 뛰어나옵니다. 그제야 저는 이 '버금 수레' 2호차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했습니다. 요셉도 이 바로의 2호차를 타게 되었고 모든 백성이 그 앞에서 마치 바로에게 하듯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립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비천한 히브리 노예소년이요 죄수가 졸지에 이런 대단한 권력과 부귀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개 요셉처럼 자수성가한 사람들, 어렵고 힘들게 살다가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부자 된 사람들은 그 권력과 부에 대해 유난히 집착이 강합니다. "내가 어떻게 얻은 자리요 재산인데..." 하는 마음에 그 권력과 재산에 지나치게 집착합니다. 어렵게 얻은 것들을 내 생명보다 귀하게 생각하고 절대 안 놓치려 들다보니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오늘 요셉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어떻게 오른 자리입니까? 어떻게 얻은 재산입니까? 그 부귀영화가 너무도 귀해서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요셉은 어떤 유언을 남기고 있습니까? 나중에 후손들이 출애굽을 하면 꼭 자기 해골을 메고 가나안으로 올라가 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요셉 자신의 소망이 이 풍요롭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애굽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온갖 좋은 것을 누리는 지금 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사모하는 믿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오늘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참된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약속의 땅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가 이 땅에서 이룬 지위나 명예나 부귀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약속의 땅인 하늘나라보다 이 세상에 더 소망을 두고 이곳을 더 사랑하며 절대 그것들을 놓치려 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찬송가 450장 가사처럼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이별 하는 날 주 앞에 가리라. 꿈같이 헛된 세상 일 취할 것 무어냐 이 수고 암만 하여도 헛된 것뿐일세" 하고 찬송하면서 오늘 이 세상에 참된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 가나안에, 하나님이 영생을 약속하신 저 하늘나라에, 세상에서 결코 누릴 수 없는 영원한 복락과 기쁨이 있는 그곳에 소망을 두고 그곳을 바라보며 소망하는 믿음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소망의 믿음입니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진다는 믿음

마지막 셋째로, 요셉은 자신과 후손들이 한 약속이 반드시 지켜질 것이라고 믿었고 이 믿음대로 후손들은 약속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저는 몇 해 전 창세기 50장 24~25절과 여호수아 24장 32절 본문을 가지고 <400년 전의 약속>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창세기 50장에는 우리가 방금 살펴본 것처럼 요셉이 자기 해골을 가지고 올라가라고 유언하는 내용이 나오고, 여호수아 24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때 요셉의 해골을 세겜에서 장사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가지고 어떤 성도님 가정의 이장예배 때 설교를 한 것입니다. 아마 이 가정도 가정형편이 어려워 아버지의 묘를 임시로 썼다가 이제 좀 형편이 나아져 좋은 묘지로 이장하게 된 모양입니다. 물론 기독교인에게 좋은 묘지, 나쁜 묘지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마는 아무튼 저는 이장예배라는 것을 처음 인도해 보는 지라 어떤 설교를 할까 고민하다가 이 본문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들어보니 이장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님들마다 이 본문으로 설교를 한다더군요. 성경에 묘지 이장(移葬)에 관한 본문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나요? 아무튼 요셉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사모해 출애굽 할 때 자기 뼈를 들고 가 가나안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한 것도 중요하지만, 400년 넘는 세월이 흐른 후에도 이 약속을 잊지 않고 정말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요셉의 해골을 들고 가 세겜 땅에 장사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참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셉은 자신의 소망처럼 후손들이 자신의 유언을 반드시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고, 후손들 또한 수많은 세월이 지나도 그 유언과 약속을 결코 잊지 않고 그대로 지킨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믿는 사람은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약속이든 사람과의 약속이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신의와 정직이 중요하기에 꼭 지켜야 하고, 만에 하나 내가 손해를 볼지라도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약속을 잘 어기고 신의와 정직을 헌신짝처럼 생각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까? 조금만 제게 손해가 된다 싶으면, 아니면 내게 이익이 안 된다 싶으면 약속도 신의도 다 져버리는 세상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그럴수록 약속과 신의를 우직하게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빛과 소금의 역할입니다.

또한 우리의 유언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아야 합니다. 앞서 소개한 유일한 박사도 만약 여느 재벌들처럼 제 자식에게만 재산을 물려주었다면 사람들은 그를 그 흔한 부자 중 한 사람으로만 기억할 것입니다. 요즈음 재벌들은 자식을 '황태자'를 만듭니다. 고생도 안 해보고 세상에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믿는 엉터리 황태자 말입니다. 심지어 어느 재벌 회장님은 아들이 매 맞았다고 자기가 직접 달려가 보복폭행까지 합니다. 하지만 유일한 박사는 달랐습니다. 그가 평생 일구고 모은 소중한 재산을 직원들에게 나누고 자식들에게는 "아들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는 유언을 남겼으니 그가 영원히 기억되는 것 아닙니까? 그가 이런 아름다운 정신을 물려주었으니 그 자식도 아버지와 똑같은 아름다운 길을 걸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유산 때문에 자식들이 싸우자 차라리 돈이나 없었으면 자식들이 우애 좋게 살았을 것이라며 슬퍼하는 분을 보았습니다. 형제가 모두 교회 장로님인데도 부친이 남긴 어마어마한 재산 때문에 원수가 되고 교회까지 와서 싸우는 것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이 분들의 아버지도 장로님이었는데 자식들에게 많은 재산은 남겼는지는 몰라도 제대로 된 신앙인격과 가치관을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니 죄송하지만 '실패한 아버지'입니다. 요즈음도 재산 상속 문제로 법정에 서는 형제가 허다하고 아버지가 남긴 유언을 어떻게 해석할까 다투는 소송이 봇물을 이룬다고 합니다. 여러분, 유언 잘 남기십시오. 유언장 제대로 안 쓰면 자식들 싸움 납니다. 하지만 문제는 유언장이 아니라 자손들에게 어떤 유산을 남기고 어떤 유언을 남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후손들에게 유언을 통해 참 소망에 대한 믿음을 남겨주었습니다. 후손들에게 약속의 소중함을 가르쳤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버지에 그 자식, 그 조상에 그 후손, 요셉의 후손들도 아름다운 신앙과 참된 양심과 정직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유일한 박사도 그랬고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뭡니까? 물론 나 자신도 잘 믿어야겠지만 내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특히 내 자손들에게 이어지지 않으면 참 믿음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손들에게 어떤 믿음을 물려주고, 어떤 정신과 가치관을 남기냐가 정말 중요합니다. 이 점에서 성공했기에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전당>은 주저 없이 요셉을 믿음의 대표선수로 인정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믿음 가지기 바랍니다.

어느 아버지가 고3 아들에게 대학에 합격만 하면 자동차를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고 이 아들은 열심히 공부를 해서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도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습니다. 보따리를 싸서 학교 기숙사로 떠나는 날, 아버지는 아들에게 성경을 한 권 주면서 "매일 쉬지 말고 읽어라. 그리고 오늘 저녁에는 빌립보서 4장을 꼭 읽도록 해라"라고 말했더니 아들은 실망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4년 동안 읽지도 않은 채 대학을 졸업했고 졸업장을 들고 나오는 아들과 함께 차를 타고 오면서 아버지는 "너 내가 읽으라고 준 성경 어떻게 했니?"하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글쎄요 책장 어딘가에 있겠지요" 하고 볼멘소리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성경을 찾아 빌립보서 4장 19절을 읽어 보아라" 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은 그 날 밤 편치 않은 마음으로 먼지 묻은 성경을 찾아 빌립보서 4장 19절을 찾아 읽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는 말씀과 함께 봉투 하나가 끼워 있었는데 그 봉투를 뜯어보니 "대학 합격을 축하한다."는 아버지의 글과 함께 자동차 교환권이 들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순종했더라면 4년 전에 자동차를 가질 수 있었는데 4년 간 그것을 모르고 지낸 것입니다. 성경은 약속의 말씀입니다.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보증수표가 됩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습니다. 자손들에게 이것을 가르치고 물려주면 자손은 영원히 복 받은 인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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