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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교회 공동체의 우선 순위는 (고후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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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 공동체의 우선 순위는 (고후 1:3-7)

구약학자인 부르스 워키(Bruce Waltke) 교수는 그가 쓴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딸이 어렸을 때 어린 딸과 함께 숲 속을 거닐다가 거의 태어나고 있는 나비를 목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작은 누에고치가 꿈틀거리며 돌고 있었는데 나비의 한쪽 날개가 이미 나와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딸이 갑자기 딸이 소리를 치기를 “아빠, 나비가 나와요. 그런데 너무 힘든 모양이에요. 아빠, 도와주면 안돼요?” 이때 순간적으로 부르스 워키 교수는 도와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고치에 다가가서 고치 밑부분을 잡고 그것을 찢어 주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고치는 자기를 해치려는 줄 알고 놀라서 작은 덩어리가 되어 부서져 버렸고 나비는 죽어 버렸습니다”
그 날 부르스 워키 교수가 배운 소중한 교훈은 “생명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고통이 필요하다”는는 것을 적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이 땅의 삶 가운데 고통은 삶의 한 부분이며,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면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실제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경험해야 하는 고난을 예언하고 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 성도들이 만나야 하는 고난을 가르칠 때, 결코 고난만을 예고하지 않고 고난을 극복하는 처방으로서의 위로를 동시에 약속합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의 교훈이기도 합니다.

본문에 보면 가장 많이 출현하는 단어가 둘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과 위로입니다.
그런데 고난은 성도의 신앙 여정에서도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가 고난을 직면할 때 우리는 동시에 하늘의 위로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편지를 고린도교회를 향해 쓰고 있는 바울 자신의 경험이기도 하지만, 바울은 더 나아가 이 편지를 통해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 모습이 바로 위로의 공동체이어야 한다고 가르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고난을 만날 때 고난을 극복하는 위로를 기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1.고난에는 목적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고 6절에서는 “우리의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한자어 가운데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병을 앓은 사람끼리 서로를 불쌍히 여기게 된다”는 말입니다.

옛날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절에 자녀를 기다리다 유산을 한 신하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 여인이 그후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죽음을 생각한다는 소식을 듣고 여왕이 친히 그녀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왕의 방문이후 이 여인은 놀랍게 회복되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사람들이 도대체 여왕이 찾아와 무슨 말을 해 주었느냐고 묻자 이 여인은 말하기를 “여왕은 제 손을 잡고 꼭 한마디 말을 하셨는데 당신의 마음이 어떤지 내가 알아요 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저는 여왕폐하께서 얼마 전에 나처럼 유산한 것을 기억하고 그것이 여왕께서 나 같은 여인까지 찾아온 이유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분의 손을 잡고 있는 순간 이 고난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상하게 제 가슴을 죄고 있던 고통이 저에게서 떠나갔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로의 능력인 것입니다.
위로라는 말은 “함께 힘을 돋운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고통받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자리에서 동병상련의 짐을 가진 자로서 누구나 위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께 하는 공동체는 고난을 이기는 새 힘을 공급받는 능력의 자리요, 치유의 자리인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이런 우리의 소명을 “상처받은 치유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고난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크게 쓰시려는 목적으로 허용되는 하나님의 은총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위로의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여기서 “자비”라는 말은 복수로 되어 있고, 위로라는 단어 앞에도 “모든”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체험한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요, 위로의 하나님이신데, 그 분은 우리가 경험하는 온갖 사건과 상황 속에서 자비를 베푸시고 이 모든 일에 위로자가 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왜 나에게 찾아온 이런 고난과 고통을 막아 주시지 않았느냐?”고 묻지는 마십시오.
이유는 아무리 성경을 묵상해도 그 대답은 쉽게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그것을 “고난의 신비”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마치 자기 자식의 고통으로 함께 아파해 주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의 아픔을 이해하시고자 인간의 고통의 극치를 친히 기꺼이 경험하신 분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친히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그 이상의 고통을 경험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우리를 고난을 방관하지 않으시고 우리 곁에 찾아오셔서 위로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래 여기 본문에 사용된 “위로”라는 의미는 헬라어의 본 의미는 “부름받고 달려와 곁에 서 계시는 분”이라는 뜻으로서 파라클레테(paraclete)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이 바로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그의 영으로 고난받는 우리 곁에 오셔서 그의 임재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회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 중에도 5절의 약속처럼 “넘치는 주님의 위로와 회복과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사요 가정 사역자인 제임스 답슨(James Dobson)의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가 일하던 병원에 다섯 살 짜리 소년이 폐암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소년의 엄마는 늘 병상을 지키며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주며 함께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잠시 병상을 비운 사이 병원의 간호사는 “아이가 종소리가 들려요, 종소리가 들려요”라고 소리를 치는 것을 들었습니다.
얼마 후 돌아온 엄마는 병원 복도에서 간호사를 만나 아이가 좀 어떠냐고 묻자 간호사는 “아이가 좀 환각증세를 일으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꾸 종소리가 들린다고 하더군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엄마는 단호한 목소리로 “절대로 환각이 아닙니다. 제가 아이에게 네가 숨쉬기도 힘들고 너무 아프면 넌 예수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해라. 그러면 하늘에서 너를 위해 종이 울릴 것이고 예수님이 오셔서 도와 주실거야 라는 제가 말해 주었어요” 라는 말을 하면서 단숨에 병실로 달려가 아이를 끌어안고, 기적의 치유를 주신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며 하늘에서 들리는 종소리에 대하여 그 종소리가 메아리가 될 때까지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동일하신 주님께서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는 여러분의 자녀들을 위해 어김없이 위로와 치유의 회복의 종을 울리며 다가오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3.함께 하는 공동체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6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여러분, 여기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고난, 위로라는 단어가 아니라 “우리”라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지금 단순히 자신의 개인의 고난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난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우리 공동체의 위로와 회복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쁨을 함께 나누면 기쁨은 갑절이나 더해지고, 고난을 함께 나누면 우리의 고난의 무게는 한결 가벼워 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의 축복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극도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하여 현대인들은 교회생활을 해도 소속감이 없이 주일예배 중심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이 제일 당황하는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갑작스럽게 고난이 찾아 올 때입니다.
왜냐하면 가족 중 초상이나 무거운 질병 혹은 어떤 사고를 만날 때, 비로소 공동체를 떠난 그 소외와 고독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에서 당당하고 여유있게 승리하는 이웃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대부분 교회 공동체에 깊이 헌신하며 나눔의 지체로 살아가시는 성도들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가 목장모임과 주일의 모임을 신앙생활의 두 날개로 강조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여러분, 부탁합니다.
꼭 목장모임에 소속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축제의 기쁨과 고통의 슬픔을 함께 나눌 줄 아는 정상적이고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요즈음 전 세계적으로 읽히는 동화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호주의 자연주의 작가인 나타니엘 레첸메이어(Nathaniel Lachenmeyer)가 쓰고 로버트 잉펜(Robert Ingpen)이 그림을 그린 “부러진 부리”라는 이야기입니다.
공원 나무에서 살면서 빵 부스러기를 주어먹던 참새가 어느날 부리가 부러졌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그의 불행을 아무도 동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는 참새들의 세계에서도 왕따를 당하여 춥고 배고프고 외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먹지 못하고 야위어 가고 씻지도 못한 그를 동료들은 더러운 새로 취급해 버릴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어느날 그에게 손을 내밀어 빵을 먹이는 손길이 있었습니다. 집을 나와 떠돌아다니던 노숙자 아저씨였습니다. “너와 난 같은 처지인 모양이지”라는 말과 함께 웃으며 그가 내미는 빵을 먹으며 오래만에 참새는 행복을 느낍니다. 빵을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아저씨와 꼬마 참새는 그날 저녁 처음으로 자신들만의 집(목장 교회)을 만듭니다. 아저씨는 공원의 벤취 위에서 무릎을 세우고 몸을 웅크립니다. 꼬마 참새는 아저씨의 덥수룩한 머리 위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아저씨가 꼬마 참새의 깃털을 쓸어주며 “안녕, 내일을 위하여 잘자”하고 속삭입니다. 꼬마 참새도 부드럽지만 힘차게 “짹”하고 대답합니다. 그날 밤 아저씨는 가족들의 환영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참새는 부러진 부리가 다시 반듯해 지고 이웃들과 어울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가정이 치유되고 세상이 변화되는 꿈을 꾼 것입니다.
여러분, 이 꿈을 위해 우리 교회는 지난 15년을 달려 온 것입니다.
특별히 이 꿈을 위해 지난 5년간 우리는 “목장교회”를 가꾸어 온 것입니다.
그리고 한 여름 더위를 피하기 위해 방학했던 목장모임을 갖기 위해 이제 드디어 오늘밤 그 사랑의 축제를 열고자 하는 것입니다.
집을 떠난 나그네의 피곤함 그대로 오시길 바랍니다.
부러진 부리의 피 흘림과 아픔을 갖고 그대로 오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드디어 영혼의 공동체 안에서 인생의 새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상처를 치유받고 그토록 사모하던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새 역사의 내일을 춤추며 꿈꾸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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