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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기 부인의 은혜 (눅 9: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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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부인의 은혜 (눅 9:23-27)

우리가 잘 알듯이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구원받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죄에서 심판에서 지옥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죄를 이시시고 심판을 이시고 지옥을 이기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그분을 믿음으로 더 이상 죄로 정죄받지 않습니다. 심판받지 않습니다. 지옥가지 않습니다.

여러분 구원받았습니까? 확신하시지요.그렇다면 “구원받은 그 이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끌고 가시지 않고 우리가 따라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때 인격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시기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이제 인격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인격의 반응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각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질문에 제자들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한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말씀하십니다. 이제 구원받은 제자들에 해야 할 일은 바로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들에게 최대의 장애물이 무엇일까요?
믿지 않는 가족입니까? 환경입니까? 사단입니까? 본문에서는 자기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최대의 적은 외부에 있지 않고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본문 24절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여기 자기 목숨을 구원하기 원하면 오히려 자신을 잃을 것이라고 합니다.반대로 자신의 목숨을 잃으면 오히려 구원받으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설입니다. 기독교는 잃어버릴때 얻어집니다. 기독교는 얻으려고 할때 잃어버립니다.

우리가 믿음을 얻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더욱 따라가기를 소원하십니까? 은혜가 더욱 내안에 충만하기를 구하실 것입니다. 주님에게 더욱 인정을 받으시기를 소원하실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먼저 자신을 잃어버릴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이런 은혜와 결단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한번 다같이 믿음으로 고백하겠습니다.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얻는 것입니다”.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최대의 적 나 최고의 적 나를 잃어버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1. 나를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23절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합니다.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님을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과연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기독교 속에서 종종 오해되는 부분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여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자기 부인은 “자기 소멸”이 아닙니다.종종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을 아예 나의 자아가 없어지는 소멸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자아가 소멸되어 아예 없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자기 부인은 “자기 멸시”도 아닙니다.자기를 멸시하는 사람은 자기를 천하고 무능한 존재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기 부인은 자기 멸시가 아닙니다.

이런 자기 소멸 자기 멸시형의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낮은 자존감”의 모습입니다. 자기의 자아에 소멸하고 멸시하는 낮은 자존감의 사람들은 “나같은 존재는 아무 쓸데없는 사람‘이라고 학대하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이런 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류의 사람들을 향해 데이빗 a 씨맨즈 라는 유명한 목사님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라“는 책에서 자기에 대해서 어린아이같은 개념의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우리 주님께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는 것은 이런 류의 자기 학대가 아닙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자기”라고 하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하고 그 가치가 높은가를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에 대해서 얼마나 강조하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얼굴도 못생겼습니다. 키도 작고 아무 볼품이 없는 별볼일 없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관점에서는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 너무 귀한 존재입니다.

여기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자기 부인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 안에는 두모습의 자아가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자아가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물려받은 자연인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자아는 예수님을 믿고 새로워진 자아가 우리 속에 있습니다. 이 두자아가 우리 속에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 공존의 상황은 어떤 것일까요? 가련 여러분의 마음 속에 예배를 드려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변화된 자아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냥 집에서 잠자고 싶다는 타락한 자아가 있습니다. 이 공존하는 두자아는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바울도 두자아가 있고 저도 있고 여러분도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 속에 예수님 앞에서 변화된 자아 만이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기를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두자아가 우리 안에 있어서 우리를 힘들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두자아 가운데 어떤 자아를 부인해야 할까요?
옛사람의 자아를 “아니요”라고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타락한 옛사람의 본성인 옛자아에 대해서 ‘아니요’라고 단호하게 부인하고 선언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그 옛사람의 자아는 어떻습니까? 주님을 따라가기를 싫어합니다. 철저하게 육체적이요 세상적이요 마귀적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21절에 보십시오.“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옛사람의 나에 대해서 “NO"라고 해야 합니다. 안돼라고 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이미 그런 죄에 많은 경우에 ‘중독’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항상 시기하는 사람,분내는 사람,당짓는 사람의 예사람에 매여 있는 사람은 그것이 어느 하루 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내안에 마음의 습관으로 굳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너무나 견고한 진과 같이 굳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그 습관을 ‘아니요’라고 할 수 없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분명하게 죄요 그것이 분명히 주님의 뜻이 아니라고 한다면 단호한 결단과 함께 버리는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새집을 장만하여 가실때에 많은 주부들이 겪는 어려움이 무엇입니까?
헌집에 살던 짐을 가져갈 것인가 버리고 갈 것인가? 많은 경우에 아까와서 헌짐을 갖다가 새집에 놓습니다. 정도 들었고 돈도 들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돈이 좀 생기면 결국은 새것 사고 헌것을 버리게 됩니다. 사실 그래야 잘 어울리는 것입니다.
가장 꼴불견은 어떤 사람입니까? 새집오면서 못쓰는 헌집 물건을 가져와서 헌집 만들어 버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종종 교회 속에서 겪는 혼돈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은지 오래되었고 많은 경험을 하였는데 왜 사람이 변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주소가 새집으로 이사왔는데 예사람의 온갖 습관을 다 갖고 새집에서 살아가고있다면 그것은 정말 보기 싫은 모습입니다. 버려야 합니다. 버릴때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버릴때 주님이  살아납니다. 버릴 때 놀라운 주님의 충만한 복을 경험할 줄 믿습니다.

루이스 팔라우라고 목사님이 쓴 “내가 누려야 할 하나님의 부흥‘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개인적으로 여러분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지치고 힘든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유를 밝히고 대안을 밝히는 책입니다. 열심히 성경도 읽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사역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왜 부흥의 심령이 아닐까요? 우리 주님이 우리 안에 충만히 임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에사람의 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하는 영화 중에서 타이타닉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호화로운 유람선 타이타닉의 객실요금은 약 4천만원이었습니다. 길이 250미터 적재량이 66000톤이 되는 그 배는 문자 그대로 타이타닉(거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배는 첫 출항일인 1912년 4월 14일 대서양에서 침몰되고 말았습니다. 왜 그 배가 침몰하였습니까? 바로 작은 빙산 때문이었습니다. 바다 속에 작은 빙산을 피하다가 결국은 좌초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타이타닉처럼 우리에게 거대한 존재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좌초될 수 있습니다. 바로 “자기” 라는 빙산의 벽앞에서는 좌초될 수 잇습니다.
이시간 저와 여러분들의 나 속에 자기에 대해서 ‘아니요’라고 버리시는 청산과 결단으로 하나님께 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2.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서 날마다 자기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여기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인생을 살다가 힘들게 하는 일을 만나면 십자가라고 합니다. 가령 아이들이 속을 썩이면 ‘자기 십자가’라고 푸념합니다. 어떤 어려운 사건이 생기면 ‘자기 십자가’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남편을 자기 십자가라고 합니다. 시어머니가 자기 십자가라고 합니다. 질병을 자기 십자가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종종 부실한 그리스도인들중 일부는 십자가를 지라고 한다고 해서 십자가 목걸이를 목에 걸고 다니기도 합니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은 지라고 했지 달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기독인의 삶에 가장 오용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우리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였습니까?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고난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그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심을 알면서도 그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길을 가실 때 심지어는 제자들조차도 ‘그리하지 마옵소서’라고 말렸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제자는 마태복음 16장 22절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주님을 향하여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어떤 의미입니까?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날마다 삶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고통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과 관계없이 내가 고통을 받고 어려움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고통일뿐이지 십자가는 아닙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여러분은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비록 고통이 있고 눈물이 있고 힘든 것이 있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십자가를 지는 사람입니다. 그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주님을 좇는 사람이요 그 사람에게 주님이 나타나고 주님이 충만하게 임재하는 복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

우리가 주님을 날마다 따른다는 것은 큰 것이 아니고 별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작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것입니다. 가령 오늘 새벽에 나의 몸을 쳐서 복종하여 일어나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였다면 나는 이미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오늘 주일 놀고 싶고 자고 싶고 쉬고 싶은 마음을 접고 예배를 드리고 주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면서 살아가고 있다면 나는 지금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목회를 하면서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될때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조용히 말씀만 연구하고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이 좋습니다. 설교의 자리에 설때 가장 자유롭습니다. 가르침의 자리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그러나 교회에 들어와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만나고 싶지 않는 사람이지만 만나야 하고 가기 싫은 곳도 가야합니다. 부수적인 많은 일들도 일어나고 그것을 해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싫지만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비록 힘이 들고 개인적인 취향은 싫지만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종종 신앙 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겪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자기 성격대로만 믿으려고 합니다. 자기 취향대로만 믿으려고 합니다. 조용한 분들은 조용하게만 믿으려고 합니다. 급한 분들은 급하게만 믿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그것은 믿음 생활이 아니라 믿음의 취미생활일 수 있습니다. 믿음 생활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나는 조용하지만 주님이 떠들라고 하면 나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십자가는 헌신입니다.십자가는 희생입니다.많은 경우에 우리들의 신앙 생활의 현주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나는 십자가를 지지 않고 너는 십자가를 지라고 합니다. 나는 희생하지 않고 나는 헌신하지 않으면서 남들은 십자가를 지고 가라고 말만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가짜기독교입니다. 그것은 참신앙이 아닌 거짓신앙입니다.

먼저 가정 속에서 우리 각자가 자기 십자가를 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내뜻을 죽이고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가정의 문제는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어른들의 문제입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하면 주님이 역사하지 않는 가정이 됩니다. 십자가 없는 어른들의 교회 생활은 결국 아이들의 신앙을 왜곡되게 합니다.

교회 속에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시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향해 간다면 그 하나님의 뜻에 십자가를 지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양육을 받고 훈련받는 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전도하는 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예배하는 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목장에 함께 참여하여 교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기본적인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십자가를 지시기를 바랍니다. 그 십자가를 지실때에 나는 없고 주님이 임재하시고 역사하실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십자가를 날마다 지는 것입니다. 오늘도 져야 합니다. 내일도 져야 합니다. 매일 같이 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3.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서는 주님을 신실하게 좇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소극적인 의미라고 한다면 이것은 적극적인 명령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은 평생 계속하여 지속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신실한 사람입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잇는 신실한 사람만이 주님을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좇을 수 있습니다.
점점 이 시대에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라는 이기주의에 너무 집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폴비츠라는 심리학자는 현대의 가장 무서운 종교가 있다면 ‘자기숭배의 이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자기를 좇을 것인가 주님을 좇을 것인가 유혹에 부딪힐 것입니다. 그때 자기에 대해서 아니요 라고 말하고 결단할 뿐 아니라 주님을 신실하게 좇아가는 삶이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주님을 신실하게 좇기 위해서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구약에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리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하나님을 좇을 수 있도록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막이었습니다. 가나안땅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리 하나님께서는 성막에 빛 가운데 임재하심으로 그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에게는 어떻게 보여주실까요?
본문에서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어떻게 행동하십니까?
제자들을 이끌고 변화산에 올랐습니다.12명중에서 3명의제자들이 주님을 좇았습니다. 그 산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친히 주님의영광을 보여주었습니다.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거기서 주님의 제자들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36절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고 합니다.

저는 이시간 저와 여러분들의 눈에 오직 예수님만 보이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람은 보이는데로 좇아갑니다. 눈에 돈이 보이면 돈을 좇아갑니다. 눈에 명예가 보이면 명예를 좇아갑니다. 눈에 쾌락이 보이면 쾌락을 좇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지금 내가 보는가 하는 것입니다.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구약의 모세보다 엘리야보다도 큰 구원주이시며 주이신 예수님을 빛가운데 제자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였을까요? 주님을 신실하게 좇아가라는 것입니다.

오늘 누가 주님을 잠잠히 좇아갈 수 있습니까?
주님을 믿음으로 마음에 영접하고 믿음으로 주이심을 바라보는 자입니다. 지금 믿음으로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그분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들은 더 이상 나에게 집중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지 않고 그분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길을 좇아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여러분에게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하시는 예수님을 온전히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믿음 생활은 예수님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나를 좇아갑니다. 세상은 돈을 좇아갑니다. 명예를 좇고 권세를 좇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나를 잃어버리고 새로운 행복 풍성한 자유를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나가는 말 )))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나를 살리는 길입니다. 나를 죽이는 길이 주님을 살리는 길입니다.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서 먼저 나를 부인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좇지 못하도록 하는 예사람의 나를 부인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지시기 바랍니다. 내가 져야 할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실하게 주님을 좇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서 진정한 나를 회복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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