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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찬이 주는 영적 의미 (고전 11: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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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이 주는 영적 의미 (고전 11:23-32)

오늘은 성찬주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매 달 첫 주일을 성찬예배로 드립니다마는, 교파에 따라서 성찬을 행하는 회수가 다릅니다. 어느 교파는 일년에 2-3회 정도 성찬을 행하는가 하면, 우리처럼 매월 한 번 씩 행하는 교파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는 매 주일 모일 때마다 성찬을 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행 2:42). 그리스도인들은 모일 때마다 성찬의 떡과 잔을 나눔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생각하고 그들이 받은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렸습니다. 그 당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으므로 예수님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후대의 우리보다 더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성찬을 대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뜻 깊은 의식이라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하면 그저 하나의 종교의식에 불과하므로 그 의식에 참여할지라도 별 유익이 없습니다. 아니, 유익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주님께 죄를 짓는 결과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성찬의 의미를 성경적으로 올바로 알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성찬예식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상징적인 의식입니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합니다. 물론, 떡은 떡이지 주님의 살일 수 없고, 포도주는 포도주이지 주님의 피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천주교가 주장하는 화체설(化體說)은 비 성경적입니다. 화체설이란,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삼킬 때 그것이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체설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단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성찬을 통해서 임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인 교통이 있습니다. 우리가 단지 떡 한 조각을 먹고, 작은 잔의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전부라면, 성찬의식을 계속해서 행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성찬의식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찬을 나누는 이 자리에 주님께서 영으로 임하여 계심을 알아야 하고, 우리가 주님과 영적인 교통을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희생하신 주님의 사랑을 깊이 생각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며, 또한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점검하고 주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생각과 행실을 회개하고 새롭게 되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찬의 떡과 잔은 주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소중한 의미를 갖게 되고,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행위는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상징적인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우리의 양식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는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영의 양식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매일 같이 먹고 마시는 음식을 가지고 영적인 진리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신 이적을 행하신 그 이튿날, 떡을 얻어먹은 사람들 가운데 여러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어제 이적을 행하신 디베랴 들판에 갔다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자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자 반가워하면서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습니까?” 인사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묻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저희가 묻기를 “그려면 무슨 기적을 보여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시겠읍니까? 선생님은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어제 저녁에 떡을 배불리 얻어먹었지만 그 정도로는 양이 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광야시대에 그들의 조상들이 40년 동안 만나를 먹었던 일을 들어서 예수님보고 거기에 비길만한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떡은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그 조상들이 먹었던 만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생명의 떡을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니, 유대인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서로 다투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더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그러나 저들은 이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하면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도 가려느냐?” 하시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님, 주님께서 영생의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에게 가겠읍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알고 믿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을 먹고 당신의 피를 마시라고 하신 것은 영적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듯이, 우리의 영혼은 예수님을 믿어야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려면 음식을 먹어서 그것이 우리의 살과 피가 되어야 하듯이, 우리의 영적 생명은 예수님에게서 공급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곧 그 분을 영의 양식으로 삼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의미합니다.

대속이란, 대신해서 값을 주고 속량한다는 뜻입니다. 속량이란, 값을 지불하고 종 된 자를 사서 양민으로 만들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남의 종이 된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은 달리 없습니다. 부자 집의 종이든, 권세가의 종이든 불쌍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하게 살아도 남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종은 자유가 없기 때문이지요.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아니 종의 신분에서 해방되지 않는 한 일평생 자유가 없습니다. 하기 싫어도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고, 쉬고 싶어도 쉴 수 없고, 어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고, 누굴 만나러 외출 할 수도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일일이 주인의 승낙을 받아야 합니다. 언젠가 티비에서 외딴 섬에 끌려가서 종살이하는 사람들에 관한 르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건장한 남자들이 어쩌다가 그런 곳에서 종노릇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이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음지에는 인신매매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돈에 자신을 종으로 파는 사람들도 있고, 폭력배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서 종노릇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보면 그렇게 종살이하는 사람의 부모나 형제가 그 주인노릇을 하는 사람을 만나서 대신 몸값을 지불하고 그 사람을 수렁에서 빼내오는 일이 있습니다. 그렇게 대신 몸값을 지불해서 자유케 하는 것이 대속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속하셨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한번은 예수님께서 그를 따르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시자, 저희가 대답하기를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합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35)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고 하셨습니다.

죄의 종이 되면 죄가 시키는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가 시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 죄를 지은 결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동시에, 죄의 종은 마귀의 종이기도 합니다. 마귀가 시키는 대로,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합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의 종이 되는 것도 불쌍하지만, 죄의 종, 마귀의 종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대속은 죄의 종, 마귀의 종 된 자를 죄와 마귀의 속박에서 풀어내어 자유케 하는 것을 말합니다. 종 된 자를 해방하려면 대속하는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성경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으므로 죄의 종 된 자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죽을 목숨을 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군가가 그 사람을 대신해서 죽어야 합니다. 그것도 죄 없는 사람이 대신 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죄인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 없는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이를 위해 창세기 3장 15절 말씀과 같이, ‘아담의 후손’이 아닌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하심에 대하여 히브리서 4장 15절에 이르기를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이르시기를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요 8:46)고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는 이 말씀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실제로 죄가 없으셨으므로 이 같이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죄하신 분으로 오신 이유가 바로 죄인들을 대속하기 위함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하나도 없으셨으나 죄인들을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훌륭한 교훈을 베푼 성현들은 많지만, 가련한 인생들을 대신해서 자기 생명을 희생한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으십니다.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비웃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람이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이 아닌 친 아버지가 자식을 위해 간을 나누어 주거나 신장을 하나 떼어 주어도 신문에 나지 않습니까? 물론, 자식이 아버지에게 그같이 해도 신문에 납니다.

때로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그런 선행을 하는 사람도 있어 세인들의 칭송을 받습니다. 그러나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사형수를 대신해서 처형당한 사람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그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전 750년경에,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실 것에 대하여 이같이 예언했습니다.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목숨을 희생하지 않고서 죄인들을 대속할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히브리서 9장 22절에 나와 있습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왜 하필이면 ‘피’여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피는 곧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창세기 9장 4절에 보면, 고기를 먹되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레위기 17장 11절에 보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것은 달리 말하면 생명을 희생하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생명으로 우리의 생명을 바꾸셨습니다.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강조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기독교는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길을 가르쳐주거나 인생의 번뇌를 해결하는 길을 가르쳐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죄와 마귀의 종살이하는 인생을 실제로 해방시켜서 참 자유를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를 위해서 무죄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며 죽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저마다 남을 희생시켜서라도 자기가 잘 되려고 하는 이 각박한 세상에, 성도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려 준 이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라도 이 사실을 진실하게 받아들인다면 그 기이한 사랑에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이 다름 아닌 저와 성도님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생명을 희생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여기 오신 성도님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 사실을 알 때, 그리스도의 대속이 우리를 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온 인류의 죄를 다 사하고도 남는 무한한 효능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9장 13절로 14절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13)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아무리 흉악한 죄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용서를 받습니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서 1장 18절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하였고, 요한일서 1장 9절에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대하면서 우리 각 사람을 위해 생명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성찬을 대하는 성도의 자세에 관해서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올바로 이해하고서 성찬에 참예해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를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찬의 떡과 잔이 날 위해 생명을 버리신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목숨을 희생하신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내가 무엇이라고 주님께서 고귀하신 생명을 희생하셨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놀랍지 않습니까? 과연, 내가 무엇이라고 주님께서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단 말인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사랑은 이해타산을 초월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랑에 감격해서 이같이 말씀했습니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

주님께서는 우리가 무익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다 아셨으면서도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사랑입니까! 이 사랑이 주님의 희생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죄인들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시고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육체의 고통도 컸겠지만, 심적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요? 오죽하셨으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마 26:38)고 하셨을까요? 대속의 고난이 얼마나 힘든 것이었으면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셨을까요?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직전에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우리는 성찬을 대할 때마다 주님께서 받으신 대속의 고난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대속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찬을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찬을 대할 때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하신 대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널리 전하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완고한 사람이라고 포기하지 말고 부지런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찬을 대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은 자로서 형제 사랑을 실천하기로 다짐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신 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해타산을 버리고 순수한 아가페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명심할 것은 성찬을 경홀하게 대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에 대하여 “27)…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28)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 29)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귀한 것일수록 귀하게 알고 대해야 합니다. 성찬은 비록 상징적인 것일지라도 그것은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함부로 취급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예할 때는 먼저 자신을 살피고 경건한 자세로 대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되새기는 거룩하고 고귀한 예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의 떡과 잔을 대할 때마다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감격이 넘쳐야 합니다. 오늘 성찬에 참예하는 성도님 마다 심령이 새로워지고, 타성에 젖은 상태를 벗어나서 열심 있는 신앙인이 되고,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주님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복음의 증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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