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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에 대한 통찰 (전 9: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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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대한 통찰(전 9:11-12) 
 
삶의 일은 때때로 우리의 계획대로 되지 않고 또 때로는 당연히 그렇게 돼야 합당한데도 불구하고 실제는 기대와 다를 때도 있습니다.
또 전혀 계획하지 못한 것이 기대이상 잘 돼서 기쁠 때도 있고 예기치 못했던 기쁨으로 삶의 기적이 있구나 하고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삶이 모두 다 우연이고 우발적인 것이기에 정상적인 준비나 아무 애씀도 다 필요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삶은 의외성을 가지며 그 의외성이라는 것도 사실은 우리 인생이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간파하지 못해서 일어난 것이지 의외라는 것도 하나님의 질서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이제 우리 삶에 있어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과 사물의 운행의 모습을 보며 삶을 깊이 있게 통찰해 앞을 내다보고 우리 마음을 다스리고 지혜로운 삶의 운행을 이루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전도서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삶을 통찰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우리 삶은 내가 가지고 있는 기능이나 능력, 혹은 여건으로 인해서 예측하고 기대하는 것이 반드시 그렇게 꼭 맞추어 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내 준비와 기능과 능력이 반드시 틀리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자로 잰 듯이 정확하게 일치하지만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에는 너무나 많은 여러 변수가 있어서 우리 삶이라는 것은 내가 이만하니 꼭 이런 일이 이루어져야 된다는 생각과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표현을 시기와 우연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삶의 모든 것은 합당한 때와 시기에 맞추어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삶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준비하고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그래서 오늘의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첫 번째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일반적인 시각과는 다른 차원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의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인생의 모든 것은 기계적인 인과응보로만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빨리 뛰면 당연히 먼저 도착해야 합니다. 힘이 있으면 당연히 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많은 사람보다 다른 것을 더 많이 얻을 수 있어야 하고, 총명한 사람은 재물을 얻고, 기능이 뛰어나면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실제는 늘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입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하는 순서대로 성적의 순위를 매겼습니다. 그러나 사회에 진출해서도 반드시 그 순위대로 소득이 많아지는 것도 아니고, 또 사회에서 신분이 그대로 정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더 나아가면 소득이 많은 대로 사회에서 좀 더 우위에 있는 신분에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은 소망이 없고 부유한 사람은 늘 행복해야 되는데 이 세상의 삶이라는 것은 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세상에는 학문적 능력, 일을 하는 기능, 돈을 버는 능력만이 능력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건강도 능력이고 인간관계를 처리하는 것도 능력이고 성품도 능력이고 예술적 재능이나 체력적 능력도 능력입니다.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것도 능력입니다.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수용의 능력도 능력입니다. 실패를 소화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고 무능력하게 실패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삭힐 줄 아는 것도 능력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공평하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어떤 기능이 뛰어나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다른 것이 어렵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내가 어떤 기능에서 어렵다면 다른 것은 우수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반드시 어떤 한 기준으로만 평가해 될 수 없고, 다양한 삶의 기준과 그리고 슬픔과 기쁨이 공존되어져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삶이라는 것은 의외 적이라는 것을 어찌 생각하면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라 생각하지 말고, 우리의 다양한 면모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옳을 것입니다.
삶의 모든 것은 단순히 인간들의 제한된 사고 속에서 기대되는 기계적인 인과응보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인생의 모든 것이 내게 주어진 한계 속에서 예측한대로 다 된다면 우리는 마음을 졸일 필요도 없고 또 기대할 것도 없고 나아가서는 권태로울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 편한 것이 아니라 긴장도 없고 새로운 기대와 의외를 생각할 수 없는 탄력이 없는 지루한 삶이 될 것입니다.

오히려 인생의 모든 것이 반드시 예측된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면모를 기대할 수 있고, 불안의 요소가 있지만 또 겸손해지기도 하고, 더 나아가 우리는 무엇인가 더 준비해야 되는 발전의 지경에 나아가기도 합니다.
삶의 인과응보란 인간의 관점에서 심은 대로 거둘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짐을 기억해야 하고 그것은 또한 우리의 감사거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기능과 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내 뜻을 어떻게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것입니다.
<잠언 16장>을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내게 있어지는 상황, 그리고 내 능력, 이 모든 것이 왜 지금 이 모습으로 있어지는가 하는 하나님의 근본적인 뜻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애쓰는 것이 믿음의 사람의 지혜로운 모습입니다. 결국 우리의 기능은 인간의 계산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니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모든 기능과 능력과 여건이 되도 그것이 이루어질 합당한 때와 기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9장 11절>뒤를 보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우산을 잘 만들어도, 예술적인 가치가 있을 만큼 우산을 잘 만들고 기능적으로 완벽하게 우산을 만드는 기술을 가진 사람도 비가 오지 않는 곳에 살면 그 기능은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겨울 스웨터를 잘 짜는 사람도 춥지 않으면 그 기술이 아무런 능력이 없어집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어떤 기능과 능력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그 기능과 능력이 사용될 정확한 때와 기회를 주시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이 있다면, 가진 것이 있다면 그것이 내게 힘을 늘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때는 무능해서 그 시대의 집중포화를 피해가는 은혜의 방패가 되기도 합니다.
때론 과연 능력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내가 생각하는, 내가 기대하는 것을 가진 것이 능력이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위험이나 상황까지도 대처할 수 있는 나도 모르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여해 주신 것이 바로 능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믿음의 사람은 이 세상적인 관점으로 볼 때도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실패의 지경을 당했을 때, 낙심의 지경에 도저히 감당되지 못할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고 은혜의 섭리를 인정하며, 마음을 위로 다짐하고 다시 간구하며 부득부득 일어나는 것을 볼 때 그것은 하나님 없는 사람들의 무엇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은혜의 힘임을 보게 됩니다. 결국 믿음이 가장 큰 힘이라는 것은 우리가 잘 됐을 때 교만하지 않게 만들어서 그 위치를 더욱 더 아름답게 하고 실패했을 때 좌절하지 않게 또다시 일어나 우리로 하여금 삶의 길을 가게 하는 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와 시기가 있다면 준비를 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겸손함과 하나님의 때를 만들어가는 열정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의 최종적인 결정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내 몫이되 응답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수고는 내 몫이되 결과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몫까지 이룰 수는 없습니다. 나는 기도를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되 이루어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내가 그 기도의 응답까지 관여할 수는 없습니다. “왜 안 들어주십니까?”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안 들어주시는 게 우리에게 합당하다고 하나님께서 생각하면 들어주시지 않거나 혹은 기다리는 게 합당하면 기다리게 하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생각하면 그것은 내게 합당치 않은 것 같으나 더 긴 시간대 위에서 살펴보면 결국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이 옳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와 기한이 있다는 것은 우리를 낙심시키고 의지를 시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하려는 것이며 오히려 우리에게 좌절하지 않고 용기와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 번째 생각해 보려는 것은 우리 현재의 모든 것으로 앞을 다 예측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러니 아무런 수고하지 말아야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그만큼 겸손 하라는 뜻이고 우리로서는 내가 아는 한계와 범위의 준비가 모든 것이 아니다함을 알고 더 겸허하게 준비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가지고 예측해서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더 겸손해라, 더 살펴보아 준비해라, 그리고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더 기대하고 간구하라는 뜻이란 말입니다.

<잠언 27장 1절>을 보면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무엇인가 좀 준비해놓고 다 됐다 생각하는 것과 많이 준비해 놓고도 내 준비가 전부가 아니다 하는 부족함을 느끼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고 ‘은혜를 주십시오.’ 하고 겸비한 마음을 가지는 것, 또 뿐만 아니라 '준비가 그래도 부족하지.' 하고 무엇인가 준비한 것을 더 찾는 마음은 은혜요 지혜입니다.

이제 앞으로 수험철이 다가온 것 같은데 시험보고 나서 “아, 나 시험 잘 봤어.” 이런 사람 대부분 떨어져요. 그리고 시험보고 나서 “아, 나 시험 못 봤는데......” 하고 틀린 것 생각나는 사람은 붙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열문제중에 두개 맞은 사람은 맞은 것만 생각나니까 잘 본 것 같아요. 그런데 열 개 중에서 두개 틀리고 여덟 개 맞은 사람은 틀린 것만 생각나니까 잘 못 본 것 같단 말입니다. 항상 겸손한 사람이 더 큰 능력을 가진 게 바로 그런 이유겠지요.
시험보고 나서 맞은 것 생각하는 사람, 틀린 것 생각하는 사람, 참 이상해요.
믿음대로 사는 사람이 더 열심히 회개하고 하나님께 눈물 흘리고 용서를 구해요.

그런데 제멋대로 살다가 어쩌다 선한 일을 한 번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내가 왜 이렇게 선한 일을 하는데 나한테 상도 안주고 어려움을 주냐고 하나님께 항의한단 말입니다. 그래도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은 '제가 부족해서......' 하고 더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고 사람들 앞에도 더 겸손한데, 별로 수고한 것 없는 사람 어쩌다 한 가지 뭐하면 그것을 내세우고 휘두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도 어리석은 사람이 더 큰 소리를 치고 지혜로운 사람은 더욱 더 겸비하게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일을 잘 알면 알수록 더 어렵고 힘들고 부족함을 느끼고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의 진리입니다.
초보자들은 아주 교만합니다. 마치 그가 하나님입니다. 모든 사람을 칼질하고 마음대로 올려서 평가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 일을 해보면 얼마나 쉽지 않고 자신의 과거의 우매함이 부끄러운가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는 자신의 삶이 부끄럽다는 것을 이 세상 떠날 때 까지 모르고 이 세상 떠나는 우매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다고 그런 사람을 질시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항상 내 생각이 내 삶이 그릇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겸비하게 내 삶을 수정하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겸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존중한다는 것은 삶의 진지함과 겸손함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존중하는 사람은 삶에 대해서 경박하지 않고 진지하고 겸손하며 따뜻합니다. 무엇인가를 알면 알수록 우리 삶은 겸손해지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말 한마디 하면 이게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전달되고, 그것이 나에게 돌아서 어떻게 올까를 생각하고 말해야 합니다.
내가 이 행동하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그 사람에게 어떻게 전달되며, 그것이 돌아 돌아 나에게 어떻게 올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그냥 뱉어놓은 말 그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한 번 한 행동, 그냥 없어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것이 자라고 열매 맺어 결과를 이루게 될 것인데 그때 결과가 어떻게 내게 주어질까를 생각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말 한마디에 날아가지 않고 자신의 사고와 믿음의 세계를 어리석게 한 순간에 허무는 우행을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 사는 것을 스스로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지 우리 인생은 참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믿음 가운데 잘 쌓아가다가도 말 한마디에 흔들리고 이러저러한 삶의 일들을 잘 쌓아가다가도 한 순간의 감정에 흔들려버리는 어리석은 삶의 모습을 스스로 우리는 목격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처럼 사람도 존중하고 사는 것은 중요합니다.

저는 오늘 우리 성도들이 정말 삶에 대한 진지함을 마음속에 소유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제가 이런 말씀 드릴 때 꼭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산해진미를 가득 쌓아놓고 음식을 먹을 때도 감사하고, 거친 밥에 아무 찬 없는 밥을 먹을 때도 마음에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을 때 그것이 믿음과 은혜의 삶입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이루어졌을 때 감사하지만 내 마음에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도 그것을 감사할 수 있는 내 마음의 여유와 아량이 있을 때,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수 있을 때, 내 마음에 평안함을 소지할 수 있을 때, 그때 우리가 진정으로 축복을 받은 은혜의 모습입니다.

원하는 것 이루어지면 기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기뻐할 수 있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근본적인 삶의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면 우리는 사물이나 삶의 현상 하나하나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 가운데 마음의 평안과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남의 얘기하고 엉뚱한 핑계하고 탓하고 산다는 것은 내 마음에 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은혜를 주셨는데 정말 엉뚱하게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합니다.
과거의 부끄러움에 나를 매어 끝끝내 불행하게 산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과거에 나는 별것 아니었어.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주시니 나는 과거를 끊고 새로운 은혜로 살 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인생의 순위는 언제든지 바뀝니다.

우리는 항상 사단이 우리를 묶어두고 우리를 제안하는 소리에 말려들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삶의 새로운 힘과 은혜와 능력을 겸비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아끼고 소중히 여길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기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내 삶의 일들을 소중히 여길 때 그것은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우리의 삶을 애틋이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루 숨 쉬게 하시는 것, 하나님이 내 손과 발을 움직이게 하시는 것, 한 끼 밥을 먹을 수 있는 것, 내 앞에 있는 사람과 만나 함께 대화를 할 수 있는 것, 그 모든 것을 우리는 애틋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전 아직도 참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제가 목사로서 설교를 참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매번 설교할 때마다 '이번에 잘 못하면 다음에 하지 뭐.' 하고 대강 넘어갈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잘못 하면 모든 게 끝이야.' 하는 절박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설교 마치고 나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이번에 잘 못하면 다음에 또 잘하면 돼지.' 하고 마음에 신상 볶지 않고 마음에 위로를 받습니다. 참 편리한 구조 같죠?
반대로 됐다고 합시다. 설교하기 전에 '이번에 못하면 다음에 하지.'하고 대강하고, 뭐 그러면 대부분 잘 못할 것 아니에요. 그러면 또 히로워서 신상 볶고 괴로워하면 얼마나 인생이 괴롭겠습니까? 우리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내게 주어진 한번 한번의 기회를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극한의 은혜라고 생각해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최선을 다하고 내 수준에서나마 완벽히 노력하고, 그 가운데 어떤 결과가 주어졌을 때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최고의 결과라고 믿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가지고 마음껏 수용하며 누리고 그래도 부족하다면 하나님 앞에 다음에 또 노력하겠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참 지혜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목사니까 성도들 가정을 심방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성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어쩌다 한 번 심방 가는 것 아닙니까? 아주 특별한 경우에 심방을 가잖아요. 그러다보니까 음식을 해서 대접을 하실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참 신기한데 음식을 준비해서 대접을 하고는 꼭 물어봐요. 그런데 그 물어보는 것은 대답을 딱 한 가지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인데, 같은 질문이거든요. 그런데 그 질문의 유형이 두 가지로 다르더라고요. 뭐냐 하면 음식을 잘 준비해 놓고 이렇게 물어봐요.

"목사님 맛없죠?" 이렇게 물어봐요.
그런데 제가 뭐라고 예기합니까? "예" 이렇게 말하면 큰일 나잖아요.
"맛없죠?" 하고 물어보는 의도를 알잖아요. "아, 맛있습니다." 이런 대답이 듣고 싶어서 물어보는 것 알잖아요.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어봅니다.
"목사님 맛있죠?"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 그 대답도 똑같잖아요. "예, 맛있습니다."
그래요 대답은 똑같아요. 우리 서로 알잖아요.
우리가 어른이 됐다는 것은 듣고 싶은 말 좀 해주는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왜 우리 인생을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음식을 잘 준비했어요. 그럼 이렇게 물어보면 어떨까요?
"목사님, 제가 이것 정성들여서 만든 것인데 아주 맛있게 드세요. 맛있죠?"
이렇게 물어보면 얼마나 좋을까요.
왜 하필이면 "맛없죠?" 하고 그렇게 물어봐야 됩니까?
우리의 삶에 대한 모든 일들이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내가 그래도 실력은 없고 능력은 부족하지만 정말 내가 그래도 열심히 살았는데 하나님 제가 좀 부족해도 저의 부족을 덮어주시고 하나님께서 저에게 은혜를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는 게 뭐 잘못됐다는 겁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부족한 능력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덮어주시고 나의 허물을 덮어주셔서 은혜가운데 작은 일이나마 열심히 할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부족한 부분을 하나님이 채워주시고 은혜로 이 일을 이뤄주시고 제게 은혜를 주십시오."라고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대하는 마음이고 우리는 늘 감사하고 기뻐하고 감격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애쓰고 수고할 수 있는 기회와 은혜를 얻은 것조차를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삶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다는 것은 삶의 진실과 성실, 그리고 우리 삶의 현상과 사람을 존중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감사와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은 삶의 진실과 성실을 이룹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요?
오늘도 한 번 죄송합니다. 이렇게 부탁을 드려서 따라해 주시기 바랍니다.
"능력은 최고가 아니라도 노력은 최고로 합시다."
우리는 능력은 최고가 아니라도 노력은 최고로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루어짐은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는 간절히 해야 합니다.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도 후회는 없게 애쓰고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100점 맡고 1등하는 사람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기에 모두가 서로 어울려 같이 서로를 돕고 살아가는 겁니다.
최고로 잘하는 사람만 살고 나머진 세상에 다 없어져야 한다면 최고로 잘하는 사람 한 사람만 살아서 무슨 이 세상에 낙이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내가 그 사람 곁에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빛나고 내 곁에 그 사람이 있어서 내가 빛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삶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고 존중하고 있어짐으로 서로를 빛내는 이와 같은 은혜임을 감사해야 합니다. 또 그러하게 서로 성실하게 노력하는 게 중요합니다.
능력이 있는데 노력하지 않는 사람과 능력이 부족해도 노력하는 사람의 차이를 간단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집을 방문했습니다.
아주 화려하게 멋있게 꾸며 놓은 집이 있는데 그런데 안타깝게 3개월 동안 한 번도 청소를 안 하고 문도 안 열어놨어요. 들어서면 그 공기가 얼마나 탁할까요.
먼지가 쌓여져 있는 모습, 아마 탁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집은 갔는데 값진 가구도 없고 그냥 깨끗하게 잘 정돈해 놨어요. 청소도 잘 해 놨고 그리고 문도 열어서 환기도 시켜놓았습니다.
마음이 가뿐하리라 느껴집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내 능력이 워낙 뛰어나서가 아니라 내게 주어진 어떤 여건에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그것을 갈고 닦아 아름답게 만들어 놓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그것을 누릴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삶에 성실한 노력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어떤 능력을 가졌건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에 모두를 운행하실 텐데 큰 나무, 작은 나무 땅에 깔리는 풀, 돌멩이, 모든 것 있어야 합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가끔 역할을 맡았을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 우리가 삶에 성실을 이룬다는 것, 진실을 이룬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면 항상 내 삶과 사람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지만 우리 기독교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존중하기 때문에 인간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인간들을 존중해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러니까 인간존중사상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있어서 당연히 있는 겁니다.

가끔 아이들에게 제 생각을 말할 때 혹시 주장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여 뉘우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말할 때 내 생각을 너무 주사시키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말 안 해서 후회하는 것보다 말해서 후회하는 것이 더 많아요.
내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줘서 '나 정말 손해 본 것 같다.'해서 안타까운 적보다는 내가 다른 사람을 왜 그렇게 기쁘게 해 주지 못했을까하는 마음의 안타까움이 더 클 때가 있습니다.
우리 삶에 다른 이들을 존중한다는 것은 내 삶에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되면 우리 인격이 아름다워지고 그것은 곧 삶의 어떤 지경에도 감사와 기쁨으로 우리 삶을 구성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함이란 내 삶의 진지함과 진실함이며 향기로운 꽃과 같아서 내가 아름다움으로 스스로 기쁨으로 존재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기쁨을 끼칠 수 있습니다.
꽃이 있고 나무가 있고 숲이 있다고 합시다. 꽃은 스스로 아름다워 스스로 기분 좋을 수 있겠지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숲이 있으면 그 자체도 기쁠 수 있지만 그 숲에 거니는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여러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바로 서면 우리 자체가 기쁠 뿐 아니라 우리를 보는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보면 마음에 위로가 돼야 됩니다. 서로를 보면 힘이 나야 됩니다.
가족 구성원들도 서로를 보면 힘이 나야 되고 용기가 나야 되고 서로를 보면 마음에 위로가 돼야 되고 격려가 돼야 합니다.
앞을 예측할 수 없기에 우리는 수고할 필요 기능과 능력을 소유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더 철저히 준비해야 합니다.
내 기능과 능력가지고 모든 것을 다 예측한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기능과 능력이 소용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기능과 능력 외에도 또 필요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서 내가 수고하고 준비한 위에 또 다른 것을 준비한 이와 같은 마음의 여유와 수고의 애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비시킨 것은 다 유용합니다. 어떤 고난을 우리에게 습득시키시고 훈련케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하셔서 습득시키는 것입니다.

모세는 왕궁에서 40년 동안 교육 받았는데 그가 왜 광야에 있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서 바로에게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광야생활에서 모세만큼 능통한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따질 때 당연히 모세가 지도자가 돼야 합니다. 모세는 광야의 길에 40년 동안 익숙해 있고 다른 사람은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야 그 일을 깨닫게 됩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아프게 하셨을까? 왜 나를 고통스럽게 하셨을까? 왜 내 마음을 상심하게 하셨을까?

시간이 가면 우리는 그 일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의 삶에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보다 멀리 보고 보다 깊이 생각하고 보다 마음을 넓게 가지면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이해 못해.' 라는 말이 맞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이해할 만큼 마음이 넓지 못하고, 깊이 생각 못했고, 멀리 보지 못했어.' 이것이 우리에게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해야 할 모든 준비를 다하고 하나님의 모든 것들 중에 하나님의 필요한 것을 뽑아 사용할 수 있도록 우리가 하나님 앞에 준비하는 것이 겸손함 입니다.
손님을 준비할 때 음식 한 가지만 딱 준비하고 "내가 정성껏 준비했으니까 이것 반드시 맛있게 드세요."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한 가지 준비하고 '혹시 그 식성에 안 맞으면 다른 것 드실 수도 있겠지.' 하고 생각해서 한가지쯤 더 반대되는 것을 준비해 놓을 수 있는 여유가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허접한 얘기를 해서 죄송한데요 제가 토요일 저녁이 되면 저도 또 설교를 해야 되니까 양복도 좀 다려놓고, 또 셔츠도 하나 새롭게 다려놓고 그리고 이제 넥타이를 골라 놓는데 토요일 저녁에 한 개를 골라 놓는 것이 아니라 서너 개쯤 골라놓습니다. 그리고 제가 주일 아침에 그날 감동이 오는 것을 매고 옵니다. 저도 꽤 노력합니다. 왜 그러냐면 저녁에 '이게 좋겠다.'하고 생각하는 것과 아침에 '이게 좋겠다.'하고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같을 때도 있지만 참 이상해요. 저녁에 이게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침에는 이게 좋아요.
저는 그때마다 느낍니다. '내 마음이 바뀌는구나! 내 마음이 달라지는구나!'
저는 마음이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싫어요. "나 당신 싫어." 라고 말하면 큰일 납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람 좋아질 수 있습니다. 그 사람과 뭔가 일을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 그 사람 싫어." 라고 관계를 끊어놨는데 그 관계를 어떻게 회복하시겠습니까?
'내가 당신 싫지만 조금 더 뒤에 보면 당신을 필요로 하고 좋아할 수도 있어.' 라고 생각하고 내가 싫다는 것을 표현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을 위로해 놓았다면 내 마음이 바뀌어졌을 때 얼마든지 우리는 그 사람과 더불어 좋은 일을 도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조금 더 멀리 못 보십니까?
왜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내 마음이 바뀔 것이라는 것을 왜 모릅니까?
저녁하고 아침생각이 달라지는데 지금 생각하고 한 달 뒤, 일 년 뒤의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고 왜 우리는 생각을 못할까요?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언제나 내 마음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기호도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 대로 말해 버리면 언제나 후회합니다.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면 언제나 후회합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바라보며 내 마음에 준비를 하고 내가 보다 더 뒤의 일을 멀리 바라보는 삶의 통찰과 더 깊고 넓게 생각하면 우리 삶은 훨씬 더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고 삶의 지혜를 발휘하면 언제든지 더 큰 기쁨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그 누구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협하고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과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확신시켜주는 것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니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
여러분 아무리 자신 있어도 어느 날 새에게 재앙의 그물이 덮치듯이, 아니면 물고기에게 재앙의 그물이 덮치듯이 어느 날 홀연히 우리에게 재앙이 닥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젠가 재앙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한계를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축복은 내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가슴 답답해하는 것에서 기쁘고 감사하고 축복이라고 느끼는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진정한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있다는 것이 답답한 순간 우리 영적인 상태가 저 바닥에 있는 것이며, 우리는 영성을 갈고 닦아 빛내게 될 때 하나님의 품안에 있다는 것이 답답한 것이 아니라 어느 날 자유롭고 우리를 보호하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다는 것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 승화될 때입니다. 벗어날 수 없는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그 가운데 기쁘고 감사함과 은혜를 느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품안이 자유롭고 그 안에 온 세상과 우주를 유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재연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셔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늘 말씀드리지요.
죄송합니다. 오늘도 한 번 따라서 합시다.
“믿음은 짐이 아니고 힘이다”
믿음은 짐이 아니고 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담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인생에 재앙의 날이 홀연히 온다면 인생의 축복도 그렇게 온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인생에 재앙의 그물이 홀연히 닥칠 수 있다는 것은 인생의 축복의 때도 홀연히 온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재앙이 홀연히 온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을 합니까?
'너희 인생의 재앙이 홀연히 온다.' 그 말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 말입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준비하라, 겸손하라, 어떤 경우에도 의연하라, 누구나 그럴 수 있으니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준비하라"
"겸손하라"
:어떤 경우도 의연하라"
"누구나 그러할 수 있으니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재앙이 홀연히 오는 것처럼 축복도 홀연히 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대해야 합니다.
소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 최고의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감사해 기대할 줄 아는 균형 있는 삶이 우리의 축복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도 알고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할 수 있는 삶이 균형을 이룰 때 우리는 치우치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니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하나님을 기대할 줄 아니 우리는 어려움가운데도 소망하여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기를 알지 못하므로 못함을 답답함으로 여기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순간순간들에 최선을 다하고 기뻐하며 누리는 것이 돼야 합니다.

기다림의 순간을 지루하게 사는 사람은 누추한 사람입니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겨우면 어떻게 우리 삶을 살겠습니까?
기다리는 시간이 내가 오히려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시간이고 내가 그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고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기다림이 기쁘고 즐거운 시간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를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주실까? 어떤 은혜를 주실까?
나는 그럼 그 은혜를 받기 위해서 어떤 무엇을 하고 있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 인생은 단순한 내 생각과 계획대로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심술궂은 것이 아니라 내 생각과 계획과 예상의 폭이 좁기 때문입니다.
내가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좀 더 깊은 생각으로, 좀 더 멀리 바라볼 수 있고, 예측한다면 그 예측은 거의 맞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내 예측의 범위가 너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예측이 틀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사고의 폭을 넓히고 마음을 넓히면 하나님의 뜻을 훨씬 깊고 넓게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뜻을 비교적 좀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치에 맞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이치를 잘 깨닫지 못하다는 어리석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순간 우리에게 진정한 지혜가 생겨납니다.

인생을 더 멀리 바라보고, 더 깊게 생각하고, 더 넓게 마음을 쓰게 되면,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다 더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해야 합니다.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삶에 대한 깊은 사고가, 묵상이 우리 성도 모두를 기쁨과 기대로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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