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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예배가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히 10: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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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예배가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히 10:19~25)

우리는 지난주일 예배하는 공동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역시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나도 좋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나쁜 사람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어두운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종종 성실한 분들이 직장에 들어가 탈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직장생활이 힘들고 어려워서 자기를 챙겨주는 동료가 고마웠다고 합니다. 동료가 술을 좋아해서 같이 술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술만 먹으면 동료가 도박을 좋아해서 처음에는 같이 도박을 구경하다가 옆에서 거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친구의 영향으로 도박에 빠졌습니다. 그는 가산을 다 탕진하고 직장에서도 쫓겨났다고 합니다. 사람의 인생에 만남이라는 것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사람을 잘못만나면 인생이 삐뚤어진 길로 갑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잘못된 길로 가다가 바른 길로 인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소개됩니다. 수가성에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팔자를 고친 사람입니다. 그 여인은 원래 불평과 원망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가정생활이 온전하지 못하고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는데 예수님을 만나면서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순간에 그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늘 새롭게 샘솟는 생명의 생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웅덩이를 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소리치는 그런 사람이 됩니다. 인생이 변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세리장인 삭개오라는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그는 돈은 많이 벌었지만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비판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기를 소망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데 키가 작아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알아보고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너희 집에 유하여야겠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드렸습니다. 자기 집에만 모셔드린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 중심 속에 모셔드렸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돈만 알던 그가 이제는 베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저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제가 혹시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이 있으면 4배로 갚아주겠습니다. 그 당시 율법에는 2배로만 갚아주면 되지만 그러나 그는 4배로 갚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배를 잘 드릴 때 우리 인생에 놀라운 변화가 올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배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변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모세는 수건을 쓰지 않으면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서 다른 사람들이 얼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얼굴에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른 예배를 드린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배는 이처럼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처럼 가치있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배라는 말은 영어로 ‘Service’ 라고 하고 ‘worship’ 이라고도 합니다. ‘worship’의 원어를 잘보면 ‘worth’ ‘가치있는’ 이라는 의미에서 출발했습니다. 예배란 가치 있는 일입니다. 예배란 소중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배드리는 사람은 위대한일에, 소중한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지금 세상에 할 일이 많이 있지만 이 귀한 시간을 선별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소중한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배드리는 일은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이 예배드리는 일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능력이 많지만 사실 육신적인 기능을 보면 동물보다 못합니다. 아이들은 태어 난지 3개월이 되어도 제구실을 못합니다. 돌을 지나면 겨우 기어 다니고 걸어 다닐 것입니다. 겨우 7,8살 되어야 배고프면 먹을 것을 알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집에서 강아지를 키워보면 강아지는 엄마가 배에서 나와서 3개월만 되면 온 동네를 다 돌아다닙니다. 이것저것 떨어진 것 다 주워 먹습니다. 부모가 필요 없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동물이 얼마나 발달이 빠릅니까? 인간은 그것에 비하면 많이 늦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잘 뛰어도 치타만큼 뛰지 못합니다. 키가 커도 기린만큼 크지 못합니다. 힘이 세도 코끼리만큼 힘이 세지 못합니다. 눈이 좋아도 매나 독수리를 못 따라 갑니다. 매나 독수리는 저 하늘 높은 곳에서 지나가는 개구리를 보고 쏜살같이 내려와서 먹이를 채어갑니다. 인간이 아무리 후각이 발전되어도 개를 따라 갈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청각이 발전해도 토끼의 청각만큼도 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수영을 잘해도 물개를 따라 갈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예배드릴 때 가장 가치가 있고 존귀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배드리지 않으면 짐승보다 못합니다. 그래서 개들을 보면, 음식을 먹으면 아무리 맛있는 것이 많아도 자기 먹을 것만 먹고 나머지는 먹지 않습니다. 사람은 오래간만에 갈비를 먹으면 배가 터지도록 먹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인간의 욕망에는 한 개가 없습니다. 결국은 욕심을 쫒아 가다가 망합니다. 부도가 나게 되고, 거짓말 하게 되고 사기를 치게 됩니다. 만족을 모르고 절재를 모릅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은 인간의 종말이 여기입니다. 여러분은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정말 신사들이고 정말 멋있는 분들입니다. 우리는 이 예배에 소중함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마음에 새기고 예배를 드릴뿐만 아니라 변화의 열매를 맺어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배란 우리가 예배당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2,3부 예배는 세상에 나가서 계속적으로 드려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요한복음 4장 24절을 보면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여기서 신령과 진리라는 말은 영과 진심으로라는 뜻입니다. 영과 진리로 자기 마음 중심을 드려서 예배하는 자들을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예배를 통해서 축복을 받고 변화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소중한 예배이기 때문에 예배를 사모 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배를 기대하시기를 바랍니다. “야! 아직 주일이 되지 않았냐?” “금요일 밖에 되지 않았는데요.” “왜 이렇게 주일이 빨리 안와?”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벌써 주일이냐? 왜 이렇게 빠르냐? 또 교회가야 되잖아. 안 오면 전화 오는데 안 갈수도 없고” 갈까 말까 하다가 오다보니 늦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가 좀 기다려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예배에 대해서 사모하고 갈급하고 늘 뜨거운 소원을 가지고 기다리는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종종 우리가 준비되지 못한 예배를 드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저는 예배드릴 때도 가능한 여러분들이 앞자리에 앉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뒷자리보다는 앞자리가 좋습니다. 그리고 중이층보다는 일층이 좋습니다. 교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앞자리에 앉으면 다른 행동을 못하고 예배에 집중하게 됩니다. 중이층은 왠지 예배를 구경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편합니다. 팔도 편하게 할 수 있고 다리도 좀 뻗을 수 있고, 핸드폰이 와도 1층에서는 받을 생각이 못하지만 중이층에 있으면 “나가서 좀 받을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가능하면 중이층보다는 아래층을 사모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예배 나올 때 가능하면 재 시간에 올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능하면 15분 일찍 올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예배를 지각하는 분들은 다릅니다. 더워서 부채질을 하고, 헐래 벌떡 달려왔으니 예배에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숨도 좀 돌리고 준비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종종 백화점 세일보다 못한 예배를 드린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한번은 강남을 지나가다 보니 현대백화점 앞에 차가 쭉 서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명절 때가 되어서 백화점에 세일을 한다고 합니다. 그 세일기간에 먼저 가서 물건을 사려고 줄을 서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먼저 오는 사람은 머그컵을 선물로 준다고 합니다. 그것을 받으려고 아침부터 줄을 서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그랜저를 타고 와서 컵을 받으려고 그곳에 서 있는 것입니다. 공짜가 좋기는 좋은 가봅니다. 여러분 예배 참석하려고 줄 서 보셨습니까? 20분씩 줄 서서 기다리다가 예배실 입장해 보셨습니까? 우리가 때로는 예배드리는 열정이 백화점 가는 사람보다도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준비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 교통 상황이 좋지 않아 늦으신 분들도 있겠지만 가능하면 10-15분 일찍 오셔서 오늘 설교 제목도 보시고, 설교자를 위해서 기도도 하시고, 오늘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달라고 성령의 도움을 구하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런 준비가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는 비결이라고 합니다.

어떤 분은 그런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목사님이 성경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합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을 보면 성경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지각에 뛰어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그 지각과 그 지각은 다른 것입니다. 예배는 가능하면 일찍 오셔서 예배드릴 때 그것이 중심의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히브리서 10장 25절에 보니 “모이기를 패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배에 열심히 식어가는 것은 위기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마귀를 대적하여야 하기 때문에 예배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늘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주일을 소홀이 여기면 안 됩니다. 특히 공적 예배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주일이 여러분의 삶에 중심이 되게 해야 합니다. 주일이 우리의 삶에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가능 하면 주일을 피하고, 주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이기 때문에 그날을 선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일을 내 삶의 중심에 둘 때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중심에 서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주일예배만 예배이고, 수요예배는 예배가 아니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구역예배와 새벽예배 모든 예배는 다 귀한 예배입니다. 더더욱 하나님이 예배일로 정하신 주일만은 더욱 잘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란 자신의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너희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어떤 부부가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겨울에 너무 춥든지 너무 더우면 부부가 의논을 합니다. “여보 오늘은 내가 너무 추운데 당신이 우리 집 대표로 가지.” 그래서 늘 대표로 한 사람만 예배에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꿈을 꾸는데 자기가 죽어서 천국에 갔는데 천국 문을 지키던 문지기가 “당신 부부는 주일날 늘 대표로 한 분만 나오셨죠? 오늘은 천국에 당신 부인만 대표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내가 몸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누가 대신 드려줄 수 없는 것입니다. 헌금은 대신 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배는 대신 드려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 하는 일에 열심을 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성공적인 예배,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예배, 인생을 변화시키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요?

먼저는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를 감사하며 예배에 나오셔야 합니다. 예배의 중심은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입니다. 오늘 본문 19-20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라.”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보혈 때문에 누구든지 나와서 예배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특권을 얻게 된 것입니다. 구약시대를 돌아보십시오. 구약시대에서는 성전에 가면 지성소가 있고, 성소가 있습니다. 지성소는 1년에 한번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고, 성소는 제사장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레위인이 오고갈 수 있는 뜰이 있고, 그 다음에는 유대인 남자들, 그 다음에는 유대인 여자들, 그 다음 맨 끝에는 이방인들이 갈수 있는 이방인들의 뜰이 있습니다. 그렇게 예배 제도가 엄격합니다. 게다가 부정한 사람은 성전에 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할레를 하는 사람들 시체를 만진 사람들,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 장애인 이런 사람들은 예배자리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예배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이 찢어짐으로 이제는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곳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없고, 부귀의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나아갈 때 마다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생각해야 합니다. 어린양 예수의 피로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그 마음의 중심에 감사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내가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예배에 나오는 사람은 예수의 보혈을 의식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란 예수님의 보혈에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예배입니다.

또한 예배는 깨끗한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오늘 본문 2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우리가 예수의 보혈로 깨끗함을 입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셔야 합니다. 참 마음은 정결한 마음입니다. 더러워진 마음을 주님 앞에서 다 회개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시편 15편 1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치 아니하며, 그 이웃을 해방하지 아니하는자”가 성산에 오를 자격이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한주간의 삶을 준비하면서 이 한 시간의 예배를 우리가 준비하는 것입니다. 한주간의 삶을 잘 사는 사람은 훌륭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또, 훌륭한 예배를 드린 사람은 한주간의 삶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미쳐 회개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것은 우리가 먼저 예배에 나올 때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시간에 참회의 기도가 있습니다. 나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용서하는 이후에 우리가 진정한 예배의 기쁨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52편 10절에 보니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심령이라고 했습니다. 상한 심령은 깨어진 심령, 통회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내 죄를 깨닫고 주님 앞에 내 죄를 내려놓고 그곳에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참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예배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향한 기대와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으로 예배에 나와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진정으로 예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코르텐 붐 여사는 2차 대전 때 아주 믿음 좋은 할머니였습니다. 그가 나치에 의해서 많은 핍박도 받고 어려움도 당했지만 믿음으로 승리했습니다. 그가 한번은 소련에 한 지하교회에 가서 성도들과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숨어서 드리는 은밀한 예배입니다. 그런데 그 지하창고를 열고 소련군 두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총을 들고 여기 있는 사람은 다 죽이겠다고 합니다. 밖으로 나가면 살려주겠다고 합니다. 5분 동안 시간의 여유를 주었습니다. 머뭇머뭇하더니 한두 사람이 밖으로 나갔습니다. 마지막으로 5초의 여유를 주었습니다. 그러니 한두 사람이 또 나갔습니다. 몇 사람이 남았습니다. 그때 소련군이 총을 내려놓고 인사를 하면서 “사실은 저도 그리스도인입니다. 혹시 이곳에 스파이가 있을까봐 다 쫒아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예배드립시다.” 이렇게 권하면서 정말 감격적인 예배를 함께 드렸다고 합니다. 믿음 있는 사람들의 예배는 어떤 것일까요? 예배하다 죽어도 좋다는 순교자의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우리의 예배의 자세는 어떠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핸드폰으로 문자메시지를 열심히 보냅니다. 이제 예배 끝나고 나가서 무엇을 할까 생각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종종 집에서 그런 일이 있습니다. 저녁에 9시 뉴스를 보고 있으면 아내가 빨래를 하다가 저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눈은 텔레비전에 가있으니 아내의 이야기는 건성으로 듣습니다. 물어보면 무슨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대답을 하니 건성으로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 그것은 진정한 대화라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눈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귀는 아내를 듣는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의 눈과 귀가 오직 하나님에게 향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의 자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 후에 변화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성경 23-2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믿는 도리의 소망을 붙잡아야 합니다. 예배드리고 나면 소망이 넘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넘칩니다. 천국에 대한 기대감도 넘칩니다. 우리는 그 소망을 가지고 한 주간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가끔 외국에 남편들이 나가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일 년에 한두 번씩 고국을 방문해서 서로 대화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남편이 직장 때문에 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내는 남편을 만나는 순간에 어떻겠습니까? 내년에 또 만날 수 있을 소망과 기대가 있기 때문에 그 남은 기간을 열심히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내가 아이들을 잘 돌보고 남편이 주는 돈으로 저축을 하고 잘 지내고 있으면 일 년 후에 남편을 또 만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남편이 어제 왔다가 오늘 비행기로 떠났는데 오늘 저녁에 외로워서 남자친구를 찾는 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 천국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한 주간을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예배 후에 놀라운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새 힘을 얻었고 소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를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만의 교재만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격려하고 구제하고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진정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요즘 아프간 사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는데 들려오는 소식이 우리의 마음으로 훈훈하게 합니다. 아프간에 억류되어 있던 사람 중에 여자 두 분이 석방되어 나왔습니다. 이제 그들이 돌아와서 하는 이야기가 원래 탈레반 측에서 이지영이라는 몸이 아픈 현지 가이드를 내 보내려고 했는데 이지영 자매가 “아닙니다. 저는 많이 좋아졌습니다. 여기 다른 분들을 내 보내주세요.”그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본인은 그곳에 남았다고 합니다. 저는 그분들이 진정한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죽음의 자리에서 자기의 생명을 양보할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드린 대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삶이 얼마나 훌륭하겠습니까? 오늘날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왜 비판을 받고 왜 손가락질을 받게 됩니까? 예배드린 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기적이고, 더 욕심 많고, 더 욕 잘하고, 더 절재하지 못한다면 어찌 하나님이 영광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배는 한 시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으로 그 예배를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예배드리고 나갈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어떤 분들은 “이제 해방이다. 신난다. 예배 때웠으니까 우리 마음대로 살자.”라고 이야기 합니다. 어떤 분들은 “예배가 이렇게 짧어? 아쉬워 죽겠네.”라고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우리 말씀 들었으니까 말씀들은 대로 실천하며 살자.”라고 말합니다. 예배자는 뭔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사명자의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예배자는 말씀으로 무장하고 세상을 향해 파송 받는 선교사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여러분의 가정에 선교사로, 직장의 선교사로, 사업장에 선교사로 파송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는 새로운 각오와 깨달음을 가지고 내 삶의 자리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진정한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신령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사람, 이러한 사람이 예배의 성공자입니다. 사람의 수준은 예배의 수준이 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예배의 수준을 드리느냐가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합니다. 여러분이 예배에 성공한다면 여러분의 인생에 성공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예배에 승리자가 될 때 인생에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좋은 예배자가 되십시오. 마음중심을 다해 하나님을 높이는 그런 예배자가 되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축복이 임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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