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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으라 (시 37:1~3, 고전 10: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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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거리가 심각한 생존의 문제인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세계에 식량 위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 농촌경제연구원의 보고에 의하면 세계의 곡물생산은 18억2690톤에 불과한 반면 소비는 19억 3210만 톤입니다. 생산이 소비에 비해 1억 톤이 부족한 셈입니다. 이런 통계는 세계적인 식량위기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잘 먹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전 세계에는 약 8억5000만 명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전 세계 인구 가운데 자기 손으로는 먹을 수 없는 절대빈곤자가 약 20%가 됩니다. 우리는 풍성한 것 같지만 굶주림이 일상인 세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먹을거리는 절대로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학자들은 우리가 사는 이 지구는 120억의 인구가 살기에 넉넉한 공간과 먹거리를 생산해 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절대로 이런 인류의 공존을 이뤄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절대로 육적 먹을거리나 영적 먹을거리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먹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가 하면 반면에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인 사람들도 많습니다. 과식과 탐식 때문에 고통당하고 거식증이라는 이상한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있는 대로 먹고 마시고 써서 감당할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국에는 하루 저녁에 우리 돈으로 100만 원짜리 식사를 하는 사람이 4천만이나 된다고 합니다. 중국 사람들이 먹고 남은 음식만 하더라도 기근은 구한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연간 200억 달러라는 엄청난 돈을 다이어트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돈도 기근을 구할 수 있는 액수입니다.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몇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첫째는 인구론의 이론입니다. 인구 증가에 대비하여 식량을 증산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상으로도 불가능합니다. 둘째는 마르크시즘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균등하게 먹으면 된다는 공산주의 이론입니다. 그러나 이 이론도 인간의 욕심이 있는 한 절대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셋째는 미션 즉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등입니다. 서로 나누고 공급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이는 절대로 식량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지금 지구적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모든 사람이 먹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바른 먹을거리를 먹게 하는 것입니다.

  육적인 양식만 그렇습니까? 영적인 양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적인 양식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이 사실은 더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아무 데나 가서 아무 것이나 마구 자신의 것으로 취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영적으로 풍성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많은 영적 양식을 두루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너무 많은 영적 양식이 있기에 오히려 영적 갈등을 느낍니다.

  힌두교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오는 오랜 전통이 하나 있습니다. 인품이 가장 뛰어난 최고의 승려들이 요리를 담당하게 되는 전통입니다. 좋은 요리사는 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뛰어난 음식을 만듭니다. 같은 성경을 가지고 좋은 영적 요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들이 좋은 꼴을 먹을 수 있고 건강합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칩니다. “우리들 마음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살고 있다. 착한 늑대와 나쁜 늑대가 함께 살고 있지.” 그 때 손자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누가 이겨요?” 할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먹이를 주는 쪽이 이기지”. 우리의 영에 불의의 먹이를 먹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실의 먹이를 먹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은 먹이를 주는 쪽이 이깁니다.

  아모스 8:11에는 말씀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여러분의 영혼이 무엇 때문에 기근이 듭니까? 무엇 때문에 기갈이 있습니까? 우리 사회가 무엇 때문에 기근과 기갈이 있습니까? 우리나라가 이제는 잘 먹고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육적으로는 풍성한데 말씀의 기근, 말씀의 기갈로 영적 빈곤이 심합니다. 우리가 다시 말씀의 양식, 영적 양식을 구하기를 바랍니다.

첫째, 불의를 먹을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오늘의 본문 1절에는 말씀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불의를 행하는 자’라는 말의 히브리어 원어는 ‘아사’입니다. ‘불쾌하게 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여호와를 신뢰하고 선을 행하는 자를 대적하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을 대적하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이런 불의의 악을 먹을거리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 119:3에는 “참으로 그들은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불의를 행하지 않습니까?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자입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선을 행하는 자를 대적하지 아니합니다. 말씀은 의로운 것이기에 불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세상에는 있는 대로 삼키는 정신적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있습니다. 얼마 전 인터넷 신문에 보니 프랑스 남부 체롯 병원에 62세 된 남자가 위의 통증을 호소하며 찾아 왔습니다. 그는 위 통증 때문에 먹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정신 병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위에는 12파운드의 가량의 볼링공 무게의 물체가 있었습니다. X 레이로 촬영을 해보니 이 사람의 위에는 바늘이 여럿이 있고, 목걸이도 있고, 약 350개의 동전도 있었습니다. 아무 것이나 마구 먹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불량 식품을 보세요. 우리가 섭취하는 식품 가운데 55-60%가량이 수입식품입니다. 수입식품 가운데 수산물의 37.2%, 농산물의 11-30%가 중국산입니다. 그런데 이 속에는 다량의 농약과 중금속이 발견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한 때는 불량식품이 많았습니다. 먹거리로는 절대로 장난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아무 것이나 먹고, 불량 식품을 먹은 사람이 건강하겠습니까? 불의를 먹을거리로 삼고 건강하겠습니까? 건강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누가복음 6:45에는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고 합니다. 먹은 게 악이고, 들어있는 게 악인데 어찌 선이 나오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불의를 먹을거리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깨끗하지 않은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로젠탈의 리포트에 이런 실험결과를 적고 있습니다. 들쥐를 7마리씩 두 집단으로 나누었습니다. 두 집단은 똑같은 환경에서 사육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쪽 집단은 매일 먹이를 줄 때에 쓰다듬어 주면서 좋은 말을 하면서 주었습니다. 다른 쪽 집단은 먹이를 줄 때에 매일 욕을 하면서 주었습니다. 약 3개월이 지났을 때에 두 집단은 현저한 차이를 드러냈습니다. 좋은 말을 한 쪽은 토실토실하고 건강했습니다. 그 반대쪽은 까칠하고 발육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같은 음식이지만 어떤 마음으로 주는가에 따라 받는 편은 완전히 다른 결과를 보여줍니다.

  사회의 범죄와 불의를 보세요. 그 단면만을 봐서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범죄와 불의의 배경에는 항상 문제가 있습니다. 부모와 가정의 문제, 같은 밥을 먹지만 야단맞으면서 맛없게 먹는 밥이 결국 불의하게 하고, 범죄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밥을 먹이세요. 절대로 원망이나 욕으로 먹이지 마세요. 결국 불의하게 되고, 범죄자로 만듭니다.

  이 세상의 상상하지 못할 불의를 보세요. 밤새 잠도 자지 않고 인터넷의 악플을 올립니다. 많은 사람을 상처받게 합니다. 사람들의 아픈 데를 골라서 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약자인 여성이나 어린이나 장애인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보면 가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받지 못한 과거가 있습니다.

  성경에 묘사된 악을 즐기는 악인의 모습을 보셨습니까? 잠언 4:16-17을 보세요. “그들은 악을 행하지 못하면 자지 못하며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아니하며 불의의 떡을 먹으며 강포의 술을 마심이라”. 대단한 사람이지요? 불의를 먹을거리로 삼으면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됩니다. 사람이 누구나 처음부터 그렇게 생긴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이렇게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장인 고린도전서 13:6에 보세요.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라고 합니다. 불의를 밥 먹듯 행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합니다. 사랑은 의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불의를 먹을거리로 삼지 않는 것은 악한 생각이나 분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부커 워싱턴은 분을 품으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분을 품은 자신이 상처를 받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누구도 내 영혼을 형편없게 만들지 못하도록 아무도 미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불의를 먹을거리로 삼지 않은 사람입니다.

  불의를 밥 먹듯 하는 사람을 보세요. 스바냐 3:5에는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영적 유치함의 모습입니다. 유치하면 유치원에 가야지요.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자는 유치한 어린이입니다. 어린이들은 옷을 벗고 다녀도 수치감이 없습니다. 영적 어린이는 불의를 행하여도 부끄러움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 영적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마세요. 불의를 먹지 말고 잘 가려 먹어 영적으로 성숙하고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여호와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으십시오.

  3절에는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우리는 아직도 이 땅에 삽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무엇을 먹을거리로 삼고 살까요? 무엇을 의지하고 살까요? 무엇을 붙잡고 살까요?

  제가 아는 어느 장로님은 은퇴 후에 제법 건강하셨습니다. 건강을 위하여 자주 등산을 하셨는데 하루는 산에 오르시다가 나무뿌리 쪽을 잡았는데 그 나무가 썩은 나무라 부러져 낙상하였습니다. 지금은 휠체어에 의지하여 움직이십니다. 겉은 든든해 보이는 나무이지만 의지할 만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평생을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을 먹고 평생을 붙잡아도 견고한 것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게 뭘까요? 성경은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 삼아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실을 먹고, 하나님의 성실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의 성실로 먹을거리를 삼을지어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르에 에므나’라는 말인데 이 말은 ‘진리와 신실함을 소중히 여기다’는 뜻입니다. ‘안전 보장을 즐거워하다 혹은 기뻐하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사람은 불의한 행악자와는 달리 땅 위에서 하나님이 보장해 주시는 안전 속에서 기쁨을 누리고 살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성실을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시편 100:5에는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먹을거리가 되는 자는 복된 자입니다. 그의 성실을 먹고 사는 자는 대대로 이어지면 자손만대가 잘 됩니다. 이런 자손만대의 복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발효식품인 김치는 소화기능을 향상시키는 유산균과 섬유소, 비타민 등이 풍부하여 암세포의 성장을 막아주고 체중증가를 방지하는 저지방 다이어트의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치는 스페인산 올리브오일, 그리스 요구르트, 일본 두부 등 콩식품, 인도 렌틸콩 등과 더불어 세계 5대 건강음식에 꼽혔다고 합니다. 이 중 3개인 김치, 일본 콩식품, 인도 렌틸콩은 아시아의 식품입니다. 김치와 요구르트는 발효식품이란 점에서 우리 전통식단의 우수성을 입증하고 있는 셈입니다. 김치는 정말 좋은 식품입니다. 최근에는 노화방지에도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정말 세계화 시대에 내놓을 수 있는 식품이 김치입니다.

  김치의 특징을 잘 보세요. 겉절이부터 묵은지까지 못 먹는 게 없습니다. 요즘은 묵은지가 좋다고 합니다. 오무가리 찌개가 맛있다고 야단입니다. 김치는 122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식품인지 아시지요? 김치 냉장고까지 있는 걸로 봐서 우리에게 김치의 가치를 알 수 있습니다.

  성실은 아무데나 통합니다. 성실이 통하지 않는 데는 없습니다. 성실은 마치 김치와 같은 먹을거리입니다. 특별한 반찬이 없어도 김치가 맛있으면 밥 한 그릇은 다 비웁니다. 별 재주가 없고, 기능이 떨어져도 성실한 사람은 인정받습니다. 그래서 성실은 리더십의 기본이라고도 합니다.

  짐 쿠제스와 배리 포스너가 함께 쓴 ‘리더십 챌린지’에는 경쟁력 있는 리더의 네 가지 특징을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는 그들은 성실합니다. 둘째는 그들은 결단력이 있습니다. 셋째는 그들은 경쟁력이 있습니다. 넷째는 그들은 비전이 있습니다. 성실이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첫째 특징입니다.

  설득력을 갖추기 위한 7가지 단계에도 성실이 포함됩니다. 1단계는 상대방의 주의를 끕니다. 2단계는 자신이 바라는 내용을 상대방이 생각하도록 합니다. 3단계는 성실하게 행동합니다. 4단계는 상대방의 이익을 고려합니다. 5단계는 상대방을 평가합니다. 6단계는 장애물을 극복합니다. 7단계는 상대방에게 감사를 표시합니다. 성실한 것은 세상에서 성공하는데도 둘도 없는 요인입니다. 노력과 성실한 노동이 없이 땀 흘리지 않고 이룬 성과는 가치가 없습니다. 성실이 최고의 먹을거리입니다.

  잠언 28:6에는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성실의 지혜를 말합니다. 시편 119:30에는 “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들을 내 앞에 두었나이다”고 합니다. 탁월하고 바른 것을 택한 시편 기자의 결단을 표현한 말입니다. 이런 지혜와 결단이 있는 그리스도인이기를 바랍니다.

결론

  어느 목사님이 가정에 심방을 갔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음료로 콜라를 내왔습니다. 그런데 그 집의 어린 아이가 “엄마 나도 콜라”하며 졸라댑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콜라 한잔을 주었습니다. 그 어린 아이는 콜라를 들이키드니 “캬” 하면서 소리를 냈습니다. 엄마가 얼굴이 빨개지더랍니다. 누구를 닮았겠습니까? 그 집에서는 무얼 먹고 마시고 사는지 알만 하지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고 마시는지 잘 살펴보세요. 영적 음료, 양식이 무엇입니까? 정말 수치스럽지 않고 내놓을 만 한 것입니까?

  이슬만 먹고 산다는 말이 있지요? 순수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슬만 먹고 산다고 해서 알고 보니 ‘참이슬’을 말합디다. 실제로 이슬만 먹고 사는 생물체가 있답니다. 반디, 매미 등이 이슬만 먹고 삽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깨끗한 양식을 먹고 사는 깨끗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무얼 먹고 사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의미합니다. 불의를 먹고 사는 사람은 불의한 사람입니다. 성실을 먹고 사는 사람은 성실한 사람입니다.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0:3에는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이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며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신령한 음식을 먹고, 신령한 음료를 마시고 삽시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신령과 성실을 마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람의 먹을거리입니다.

  몸에 좋지 않은 것은 싫어져야 합니다. 영에 좋지 않은 것은 보기조차 싫고 버려야 합니다.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 삼고 세상에서도 성실한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이런 성실은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통합니다.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고 영육의 삶을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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