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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나의 선교 사역 (욘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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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선교 사역 (욘 3:1~10)

성경에 성격이 매우 특이한 선교사역자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바로 요나라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특이한가? 하기 싫은 일을 하나님이 시켰기 때문에 문제가 된 선교사역자입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이 얼마나 하기 싫었는가? 하나님의 명령인 것을 알면서도 불순종하여 도망 간 선지자가 요나입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니느웨로 가라고 했는데 정반대쪽인 다시스로 갔다고 했습니다. 유대 나라에서 니느웨를 가려면 동쪽으로 가야 합니다. 앗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는 현재 이라크 나라의 제일 북쪽 지방을 말합니다. 그때는 앗시리아 땅이었고, 니느웨는 수도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동쪽으로 가야 하는 사람이 정 반대인 서쪽 다시스로 갔는데 이곳은 어디인가? 오늘의 스페인의 제일 남단 지방입니다. 얼마나 이 일이 하기 싫었으면 정반대 방향으로 도망갔겠습니까? 또 그가 도망간 거리도 그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거리입니다. 이스라엘 연안에서 스페인 나라를 가려면 배를 타고 얼마나 많이 가야 합니까? 아마 그 당시의 배로 일주일이나 한 달을 가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이 해역은 지금도 고래가 출몰하는 위험 지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왜 도망을 갔는가? 다른 선지자들이나 예언자들을 보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성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종인데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피하여 끝없이 반대 방향의 먼 길로 도망간 불순종의 선지자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 가운데 고민스러운 때가 있습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모를 때 그렇습니다. 어떤 중요한 인생의 문제를 놓고 기도를 드리는데 “하나님이시여! 지금 내가 이렇게 하려고 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나한테 가르쳐 주십시오.” 우리가 이럴 때가 많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이면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대답을 안 하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갈등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 이거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가? 원하시면 나는 뭐든지 하겠는데 내가 결정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이거 헛수고 아닌가?’라는 생각을 우리가 많이 하게 됩니다.

저는 신학교 다닐 때 같이 앉아서 공부하는 동기생 하나가 어찌나 신앙이 철저하고 무서운지 교수님보다 더 무서웠습니다. 그때 제가 신학교에서 학생회장을 하던 때인데 “이 회장!”이라고 엄격하게, 검찰이 죄수 잡아서 말하는 것처럼 부릅니다. “아니, 무슨 일이야?” “이 신학교 다니는 동안 이 회장도 나처럼 여학생들과 연애하지 마!”라고 말하는 겁니다. “왜 하지 말라고 하는 거야?” 그랬더니 “나는 결정한 게 있어서 절대로 안 할 거야. 나는 5년 동안 기도하기로 했어.” “뭘 기도하기로 했는데?” “나의 배우자 될 사람을 하나님 앞에 작정하고 지금 배우자 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중이야.” “아니, 결혼 상대자를 위해서 무슨 5년 동안 기도를 해? 나는 생각도 안하고 있는데….” “나는 연애도 안할 것이며 철저하게 잘 살다가 5년 동안 배우자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이 짝지어주시는 사람과 결혼할 거야.” 그런단 말입니다. “그래라! 그런데 어떻게 결정했냐?” 그랬더니 기도를 마치는 날에 정해놨다는 겁니다. “기도를 마친 다음에 누구든지 목회하시는 목사님이 중매하는 첫 번째 여자가 내 배우자다.” 이렇게 정해놓고 5년 동안 기도를 하는 겁니다. 정말 연애 안합니다. 그렇게 실천을 하고 그 기도가 딱 끝났습니다. 이상하게도 기도를 많이 해서 그런지 끝나자마자 일주일 만에 자기 교회 담임 목사님이 “이 선생! 앞으로 목사가 될 텐데 내가 좋은 사모가 될 사람을 중매 할 테니 한번 보지 그래.” “아, 과연 하나님이 기도 응답해 주셨구나!” 그래서 중매해주시는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5년 동안 기도한 응답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 아닙니까? 그러니 여자를 보나마나 다른 것 생각할 필요도 없이 어떻게 생겼건 성격이 어떻건 학교 어디를 나왔건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 여자를 보자마자 “나는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나는 안하겠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아니, 웬 남자가 신붓감을 앉혀놓고 얼굴도 제대로 안쳐다보고 나는 결정했다니 이게 정신병자이지 사람입니까?” 그래서 틀어졌습니다. 그 친구는 그 문제가 심각해져서 목사도 안 되었습니다. “아니, 그럼 내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신 것을 앞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해 주시는 거야?” 어떤 때는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 생각을 결정해 놓고 하나님을 그곳에 잡아들이려고 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했으면 그 여자 아니면 또 다른 여자를 보면서 여유를 두어야 하는데 율법적으로 정해놓고서 “이거 아니면 안 돼!”라는 생각을 가진 친구가 제 주변에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이 확실하게 시키는 일이 있을 때 넉넉히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너는 순교 당해라!” ‘아, 뭐 순교당하지 사람이 두 번 죽나? 한번 죽는데 주님을 위해서 내가 죽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믿음 있는 사람은 다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게 하나님의 뜻인지 내 생각인지 분별이 어려워서 갈등하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줍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이 확실하다면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요나는 이것이 아주 확실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다.’ 그런데 왜 불순종했는가?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에 차이가 났기 때문에 일부러 불순종하는 겁니다. ‘왜 하나님이 나만도 못하게 생각하시는가? 나는 그것을 순종할 수 없다.’ 이런 일이 우리 주변에도 간혹 일어납니다.

그러면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인 줄 분명히 자기 마음속에 확신하면서도 불순종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가서 구원을 선포하라고 하신 니느웨는 유대인들이 절대 접근할 수 없는 커다란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니느웨는 앗시리아의 수도로 이스라엘의 주권 침해 국가입니다. 역사에 앗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수없이 많이 침략을 해서 BC 722년에는 완전 함락되었습니다. 그래서 주권을 다 빼앗기고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앗시리아 제국은 군사, 경제, 문화적으로 강력한 국가를 이루고 주변 국가를 통일하고 이스라엘까지 완전 점령했습니다. 여러분, 이라크에서 그 주변 나라를 다 점령하고 이스라엘까지 왔으니 얼마나 넓은 땅을 점령했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자존심이 있습니다. 블레셋 골리앗이 쳐들어왔을 때 다윗이 한 말이 있죠? 다윗은 그때 목동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골리앗 대장이 군사를 이끌고 들어왔을 때 사울 왕을 비롯한 이스라엘 군대가 꼼짝 못하고 벌벌 떨었습니다. 다윗이 나가서 “저 할례 받지 못한 자가 누구관대 할례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모독하느냐? 내가 나가겠다.” 이 말이 곧 유대 민족의 자존심입니다. “할례도 받지 못한 저 하나님의 택함 받지 못한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모독하냐?” 이것이 유대인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앗시리아한테 침략을 당해 다 식민지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앗시리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주 철천지원수 지간이 되었습니다.

신약복음서 가운데 수로보니게 여인이 나오는데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무엇을 달라고 했습니까?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사나이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유대인들은 수로보니게 사람을 개같이 취급을 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자존심입니다. 이방 사람은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은 인종 편견의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침략을 당해 군대가 들어와서는 아브라함 후손의 자녀, 여자들이 앗시리아 군대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온통 수라장이니 살 수 있느냐 말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앗시리아는 영원한 원수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침략을 당하여 그 반대의 인격 대우를 당하게 되니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제목은 “하나님 아버지! 니느웨를 심판하십시오. 하나님의 선민을 괴롭힌 이 마귀들은 빨리 멸하십시오.” 이것이 유대 사람들의 니느웨에 대한 공통된 생각이었습니다. 요나도 생각이 똑같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들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일제 식민지 하에서 교회가 얼마나 탄압 받았습니까? 신사 참배 문제는 지금도 문제가 되어 고이즈미의 신사참배를 중국과 한국에서 계속 정치, 외교 문제로 삼고 있습니다. 또, 6·25 전쟁으로 인해 공산당에게 우리가 얼마나 핍박을 받았습니까? 우리 대한민국 교인들의 그동안의 기도제목은 “하나님, 공산당 망하게 해주십시오. 일본 망하고 북한 공산당, 소련 공산당 같은 마귀 새끼들 모두 없어지게 해주세요.”실제로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유대 사람들이 보는 니느웨가 바로 똑같은 겁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백성이 그 놈들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 중에 누구든지 니느웨에 대한 동정적인 발언을 했다가는 매국노가 되어 그 사회에서 살지 못합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나라에 어느 대학 교수의 북한에 대한 발언이 문제가 되어 재판 중에 있는 것을 신문에서 보셨죠? 요나는 그것보다 훨씬 더 큰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일을 나한테 하라고 시키시는가? 차라리 불순종해서 도망가는 게 낫겠다. 도망가는 것이 오히려 양심의 괴로움이 없겠다.’라고 생각해버린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사명인줄을 알면서도 끝없이 반대 방향으로 불순종의 길을 떠났습니다.

요나가 불순종한 두 번째 이유는 성경에 나오는 바알 종교는 앗시리아가 본고장입니다. 구약 성경의 문맥 흐름을 보면 마치 하나님과 바알의 전쟁터같이 나오는 것을 봅니다. 실제 전쟁과 같이 이 종교의 대결에 사람이 죽었습니다. 여러분,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 450명이 갈멜산에서 하나님이냐 바알이냐 영적 투쟁하지 않습니까? 열왕기상 18장 23절을 보면 “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이런 영적 전쟁을 그대로 했습니다. 바알의 제단은 아무 불도 내리지 아니하고 엘리야의 제단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 모든 물질을 다 태워버렸습니다. 18장 38절에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450명을 모두 죽여 버렸습니다. 영적 투쟁의 전쟁입니다. 실제로 사람을 죽이고 살립니다. “이러한 상황이 유대의 종교문화로 정착되어 있는데 나더러 바알의 본고장인 앗시리아 니느웨로 가서 그들을 구원하라 말입니까?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불순종했습니다. “국가적 역사를 생각해 보아도 그들은 용서할 수 없는 침략자요, 종교적으로 보아도 그들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바알 숭배자들, 이스라엘 정신문화를 바로 흩어놓은 사람들인데 어떻게 내가 그곳에 가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라 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의 일로 판단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아서 선민 구원을 위해서 몸을 바치는 성실한 선지자에게 민족 전체가 받아드릴 수 없는 매국노적인 일을 나더러 하라니 나는 죽으면 죽었지 그 일만은 절대 못하겠습니다.” 요나신변의 안전에도 계산이 있었습니다. 만약 요나가 니느웨에 나타나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전도를 했을 때 어떤 반응이 나겠는가? 니느웨 사람들도 유대인들과의 과거 역사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알 선지자인 민족 지도자 450명이 엘리야에 의해 살해당한 것을 다 압니다. 유대 출신이 나타나면 “잘 됐다! 너도 한번 맛 좀 봐라!” 당장 잡아서 처참한 죽음을 당할 것이 확실합니다. 이래저래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의 선교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불순종의 요나를 끝까지 설득하여 니느웨 선교를 하게 하셨는가? 이 요나서는 구약 가운데서 찬란하게 빛이 나는 복음서가 됩니다. 요나서의 목적은 니느웨 사람들의 구원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구약 가운데서 유일하게 비춰주는 책입니다. 지금 요나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곧 유대 백성 전체의 생각입니다. 이것을 ‘유대니즘’이라고 부릅니다. 요나나 유대 백성이 얼마나 유대니즘에 빠져있는가? 하나님의 명령도 불순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역사를 새롭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 안에도 신학적 도그마(dogma)가 하나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앉았던 역사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유대 백성의 교리를 하나님이 지금 깨뜨리고 계신데 요나는 절대 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수없이 나타나는 유대 백성의 특성이 하나 있는데 유대 백성의 강한 복수심이 나타납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나타납니다. 창세기 14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어떤 부족들에게 사로잡혀 갔을 때 아브라함이 그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합니까? 자기가 기른 318명의 가신 군대를 이끌고 모두 다 공격하여 모두 진멸해 죽여 버리고 롯을 구하여 냅니다. 이것이 유대 백성의 특성으로 지금까지 내려옵니다. 창세기 34장에 야곱의 외동딸 디나가 세겜족에게 강간당했습니다. 이런 사건이 벌어지니까 세겜족의 추장이 야곱에게 와서 신사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까 그 딸을 우리 부족에게로 시집을 보내라. 그러면 우리가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대신 우리 딸들도 너희들이 데려다 살아라.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행복하게 잘 살자! 사람이 남자, 여자가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으니 우리 딸도 데려다가 살아라!” 야곱의 아들들이 어떻게 합니까? 속임수를 씁니다. “그래,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조건이 하나 있다. 그렇게 하려면 너희들도 할례를 받아야 해!” “그게 뭐냐?” “그런 게 있다.” “그래! 그러면 우리가 다 받겠다.” 무자비하게 할례를 해서 고통스럽게 만들어 놓고 활동할 수 없는 틈을 타서 다 죽여 버렸습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 백성은 어쩔 수 없이 성경에 지금까지 나타나는 겁니다. 우리가 삼손의 역사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보게 됩니다. 삼손도 복수심만은 유대니즘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손해를 입었다고 판단이 되면 수백 명을 모조리 죽여 버립니다. 야만인의 무자비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본래는 땅이 그 사람들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들어가 사는 것뿐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떤 조그만 손해를 입혔다 하면 그 이튿날, 이스라엘 군대 장갑차 행렬이 무자비하게 들이닥쳐 쑥대밭으로 만듭니다. 가끔 이스라엘 문제가 뉴스가 될 때 보면 이스라엘 군인들은 장갑차를 몰고 대포를 끌고 가는데, 팔레스타인 청년들은 새총 고무줄로 대항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나나 유대민족이 바라는 진정한 소원이 있다면 니느웨 도시 한복판에 소돔과 고모라 앞에 떨어진 유황불이 떨어져서 모든 사람이 새까맣게 다 타죽어 없어져 버리는 것이 유대인의 소원, 요나의 소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선교가 어떻게 성립될 것인가? 요나는 과연 하나님의 선교사인가? 요나서는 하나님의 우주적 구원의 계획을 유대인들에게, 또 온 세계인에게 선포하는 구약의 복음서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유대인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선민사상을 하나님이 수정하는 것입니다. “너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여 그곳에 살고 있는 12만의 생명을 빨리 구원하라. 나는 너를 니느웨의 선교사로 파송하겠다.” 하나님의 생각과 유대인의 생각이 정반대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선민이 된 것은 온 세상에 다니면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나누어 주라는 뜻이다. 왜 너희들만 가지고 사느냐? 빨리 가거라. 네가 아무리 도망가도 내 계획을 거역하지 못할 것이다.” 도망가는 요나를 끝까지 찾아가는 하나님의 추격전이 요나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선교사 활동을 보면 과거 원수가 되어 싸우던 모든 나라에 들어가 선교활동을 열심히 합니다. 러시아의 소련 공산당 정책 때문에 한반도의 비극이 왔습니다. 원수의 나라이지만 지금 러시아 모스크바에 대한민국 선교사가 우글우글하고 세계에서 선교사가 제일 많습니다. 중국은 어떻습니까? 사실 모택동의 중국군이 6 ․ 25 전쟁에 개입만 안 했다면 대한민국은 그때 통일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고생을 안 해도 되었을 것입니다. 모택동의 지원 때문에, 공산당의 지원 때문에 아직도 분단국가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중국에 대한민국 선교사로 우글우글 합니다. 중국은 한국 선교사들이 갖다 준 돈만 해도 중국 경제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제가 20년 이상 갖다 준 것만 해도 무시하지 못합니다. 한때는 우리가 베트남과도 전쟁을 했지 않습니까? 베트남 선교를 한국이 제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어떻습니까? 한국 선교사 618명이 지금 도 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일본 선교사들의 말을 들어보면 자기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일본인을 사랑하고 일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며 사역하다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친일파 소리를 듣는 거라고 합니다. 우리의 민족 감정이 정말 묘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어느 큰 교회 목사님 한분이 일본에 오셔서 선교사들 모두 모아놓고 집회를 하시는데 선교 중에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면 “일본 땅은 몇 센티미터씩 바다로 들어가고 있죠? 이게 얼마 안 있으면 다 들어가 버릴 겁니다. 그것은 다 벌 받아서 그런 겁니다.” 이런 설교를 하니까 일본을 구원하겠다고 간 선교사는 깜짝 놀라서는 “그럼, 우리가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하나?” 이 선교 사역은 정치적 관계를 초월해야 합니다. 요나서에서 지금 그것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주 통치적 계획이 나타납니다. 저는 우리나라 5천년 역사에 참으로 선교에 감사한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가 남의 나라를 불법 침략한 역사가 없다는 겁니다. 무수한 침략은 당했지만 침략자는 아니었던 것이 지금 세계 선교사역에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침략 국가를 위해서 선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천 명의 요나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나서 3장에 보면 본래 하나님의 작정하신 계획이 나타납니다. 40일만 있으면 니느웨 성을 하나님이 심판하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40일을 회개의 시간으로 정하시고 요나를 보내신 것입니다. 이때 요나는 어떤 생각을 가졌는가? ‘그러면 40일만 내가 도망 다니면 니느웨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이니까 도망갈 수 있는데 까지 도망가자! 그래서 가능한 반대쪽으로 가서 거리를 넓혀버리면 돌아올 수 있는 시간조차 없을 테니까 다시스로 가자!’하고 스페인으로 도망간 것입니다.

LA에서 어느 큰 교회의 청년 한명이 사회적, 교회적으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청년이 얼마나 과격한지 반일 감정이 아주 강합니다. 한국 사람은 누구나 반일 감정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표면화 되니까 아주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 가운데 집사, 장로, 목사님까지 “장로님! 왜 일본차를 타십니까? 우리 한국 사람이 일본에 당한 것이 얼마인데 우리 국산차도 많고 미국차도 많은데 왜 일본차를 타고 다니십니까? 그것은 매국노 행위입니다. 하지 마십시오.” 그러기도 하고 일식당에 가서 ‘스시’를 먹고 있는데 “왜 일본 음식 먹고 가십니까?” 하루는 도끼를 가지고 와서 교회 주차장에서 일본차를 다 때려 부쉈습니다. 행동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서는 이것 때문에 보통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36년 식민지 생활을 기억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청년이 나중에 가서 일본 처녀와 연애를 하는 겁니다. 일본과의 교과서 문제, 독도 문제, 신사참배 문제, 중국과의 고구려 영토 문제 등 정치적 이슈가 항상 있어 왔습니다. 이것은 다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되는 문제이고, 다만 영혼을 구하는 이 선교 문제는 어떤 관계의 백성들에게도 해당 된다는 사명이 이 요나서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사인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고 세계 선교에 몸을 바쳐야 합니다. 결과는 어떻게 나느냐? 요나는 결국 하나님의 계획을 이기지 못하고 니느웨 선교사로 파송되어 오늘 말씀 10절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모든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신지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요나서를 끝내는 마지막 말씀을 “이 큰 성읍 니느웨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으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요나에게 충고하고 계십니다. 요나의 니느웨 선교는 세계 평화의 빛을 한 가닥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효과가 좋은 민간 외교는 없을 것입니다. 세계 선교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갈보리교회 선교 정책이 세계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과 세계 평화에 도움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요나서가 우리에게 비춰주는 세계 평화의 빛을 영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시고 우리가 지금 열심히 수고하는 세계 선교가 그런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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