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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갚을 것이 없는 자를 청하라! (눅 14: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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갚을 것이 없는 자를 청하라! (눅 14:12~14)

  미국 하버드 대학 교수였던 헨리 나우엔 박사가 갑자기 교수직을 사임했습니다. 그는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던 카톨릭 신학자였고 많은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던 교수였습니다. 그가 지은 책 20여 권은 모두 다 베스트셀러였습니다. 그런 그가 느닷없이 높은 보수와 명예를 보장하는 하버드 대학 교수직을 버리고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데이브레이크 복지원이라는 정신 박약아 시설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정신 박약아들의 식사를 돕고 용변을 치우고 목욕을 시키고 행동을 교정하는 아주 고생스럽고 또 구질구질한 일들을 도맡아 했습니다. 물론 생계 유지도 곤란할 정도의 낮은 보수에도 그는 만족했습니다.

  모두들 무엇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렸는가 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몇 개월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예수 이름으로」라는 책을 써서 그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헨리 나우엔 박사는 그 책에서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 동안 나는 올라가는 길만 추구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서 신동이라고 불렸고 마침내 하버드 대학 교수에까지 올라왔다. 나의 저서 20여 권은 뭇 사람들의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어느 날 정신 박약아 아담 군을 만났을 때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는 내리막길을 통해서 예수를 바로 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르막길에서는 예수가 보이지 않았지만 내리막길에서는 복음서에 나타난 진정한 예수를 만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욕심에 끌려 살아갈 때에는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오직 찬란한 자신의 꿈만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이 사셨던 방법을 생각할 것 같으면 의외로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겸손은 우리를 깎아내리기 위해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은 우리를 복종시키기 위해서 주문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겸손은 우리를 바른 삶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그 지혜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또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음식을 잡수시기 위해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자리에 수종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도 와 있었습니다. 수종병은 복수가 차는 것 같은 병으로 그 당시에는 아주 고치기 어려운 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에 일하는 것은 엄하게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서 그 병자를 고쳐 주실 것 같으면 그것은 율법을 파괴하는 행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과연 어떻게 하실 것인가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악한 생각을 아시고 거기 있는 율법 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병든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그들은 결국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슬그머니 식사 자리로 가서 앉았습니다. 그런데 저마다 상석에 앉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매우 직설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았을 경우 어떻게 되겠느냐고 반문하시면서 그 자리를 빼앗기는 망신을 당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문에 차라리 끝에 가서 앉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청한 자가 와서 올라 앉으라고 할 것이고 그 때 비로소 많은 손님들 앞에서 영광이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바로 겸손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은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노력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앉게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애쓰고 수고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 자세가 꼭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자리, 높은 자리에서도 겸손할 것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을지라도 사람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모든 피조물 위에는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겸손할 것을 지시하신 예수님께서 이어서 약간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누군가를 잔치에 청할 때 주의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초청의 원칙은 받은 빚을 갚을 수 없는 사람을 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눅 14:12 상반절)

  왜 예수님께서는 굳이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그들은 갚을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갚을 능력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훨씬 더 많은 것으로 갚을 수 있기 때문에 청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누군가를 대접할 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대접하고 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대접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으로 갚을 것을 기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 기준은 우리의 기준과는 사뭇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눅 14:13~14) 당장 눈앞의 작은 이익에 매달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갚는 것에 연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갚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장차 하나님께서 대신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금방 갚을 수 있는 사람들을 대접하기를 좋아합니다. 또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뭔가 갖다 바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행위는 진심으로 상대방을 사랑하거나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극히 이기적인 생각으로 상대방을 이용하려는 아주 얄팍한 시도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주님은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산상보훈이라고 부르는 그 가르치심을 통해서... 마태복음 6장 1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악을 행하는 것을 문제로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의를 행하되 사람들 앞에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고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상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짜 중요한 상급은 하늘 아버지께서 갚으시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놓쳐도 하늘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상급은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서도 주님은 똑같은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장차 주님이 모든 천사와 함께 다시 오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처럼 모든 민족을 심판하실 때에 무엇을 기준으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을 가지고 심판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습니까? 그가 목마를 때에 마시게 했습니까? 그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했습니까?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혀 주었습니까?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알고 보면 우리가 바로 그렇게 작은 자가 아니었습니까? 우리가 헐벗고 굶주렸을 때에 누가 우리를 돌보아 주었습니까? 병들었을 때에 누가 고쳐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누가 맞아 주었습니까? 바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려고 십자가를 지신 그 주님을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닮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그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에 온전히 순종해야 마땅합니다. “...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그 말씀에 순종하여 갚을 것이 없는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베푸는 삶을 통해서 하늘에 보화를 쌓아가는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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