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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Before & After (엡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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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fore & After (엡 2:1~10)

1. Before & After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비포 엔 애프터”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이것은 어떤 시점을 기준으로 전과 후를 비교하는 말인데요. 아마 인터넷이나 언론 매체 등에서 주로 연예인들을 대상으로, 성형수술을 하기 전과 후를 말할 때, 혹은 다이어트를 하기 전과 후를 비교할 때 주로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요즘 연예인들의 성형수술이 하도 많아서 인지 인터넷에 보면 어릴 적 사진이나 살이 쪘을 때의 사진을 현재의 사진과 나란히 붙여두고는 “before & after”라고 해 놓은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두 장의 사진을 나란히 놓고 “비포 엔 애프터”라고 비교하는 말을 기록해두어서 그렇지, 사진을 따로 떼어놓거나 비교 문구가 없으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일 정도로 차이가 많이 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묵상하다보면, 떠오르는 단어가 바로 이 “before & after”입니다. 물론 우리가 무슨 다이어트를 하고 성형수술을 받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과 믿은 후가 얼마나 다른지를 소개하는 오늘의 본문을 읽다보면 이 말의 의미가 실감이 되기 때문입니다.

2. Before

먼저 오늘 본문은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즉 주님을 믿기 전의 상태, 또 지금도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었던” 상태이며,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며, “본질 상 진노의 자녀”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1) 죽은 자들

여기서 우선적으로 중요한 말은 “죽었던” 이라는 것인데요. 이 말은 성경원어대로 한다면, “죽은 자, 혹은 시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시신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익사사고로 죽은 후배를 강물에서 건져올린 적도 있고, 끔찍한 사고 현장도 보았으며, 앞에 있던 교회에서는 소천하신 분들의 시신을 거의 다 보았습니다.

평안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고운 모습도 보았고, 사고로 돌아가신 분들도 일그러진 모습도 보았으며, 병이나 알코올 중독 등으로 돌아가신 분들도 보았고, 또 사고의 현장에 죽어있는 분들도 보았는데요, 자세히 보니까 시신들도 저마다 표정을 가지고 있더라구요! 살아있는 우리처럼 돌아가신 분들의 표정도 제각각 다 달랐습니다. 아무튼 어떤 사람에게는 별 차이가 없지만, 어떤 분들은, 설사 자신의 가족이라고 해도 시신을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슬프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끔찍한 표현을 사용하면서 우리가 주님을 믿기 전, 그리고 지금 예수 안에 있지 않는 사람들을 그와 같이 죽어있는 상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주일 오전부터 “시신 어쩌고…”하는 것이 불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제게는 여러분들이 더 불쾌하게 여기실 정도로 이 말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픈 마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의도가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기 전, 그리고 현재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와 같다는 것, 그 비참한 실상을 분명히 알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육체적인 죽음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영적인 죽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상실입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 각양 은사와 선물을 무한히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죽어있는 시신이 그 어떤 물리적인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께 예배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들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의 상태인 것입니다.

여기서 성도 여러분이 분명히 아셔야할 것은 성경은 육신이 죽어있는 것보다 영적으로 죽어있는 것을 더 비참하고 불쌍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살다가 결국은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는 것이 더 비참한 것이지, 육신적으로 죽는 것은 그 다음의 약속과 축복이 있기 때문에 신앙 안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가 아무리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인간적으로 멋있고 아름다우며, 그리고 세상적으로 높고 좋아보여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한 살아있는 주검이요 시신과 별 다를 바 없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정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하나님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들과 무관하니 불쌍하고, 장차 영원한 형벌에 떨어질 것이니 정말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2) 이 세상 풍속을 좇고

또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육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며, ‘이 세상의 풍속을 좇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 사회와 타락한 인간의 가치체계를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모습을 그대로 따라 사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육신의 욕구에 충실한 사람들, 무절제한 현대인들, 거리낌 없이 욕망을 분출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최근에 미국의 한 중진 상원의원이 화장실에서 성추행을 하다가 의원직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인터넷에 “얼짱”이라고 알려진 한 십대 여학생이 자신이 좋다며 찾아온 몇 살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성매매를 강요했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얼짱이라는 그 예쁜 얼굴을 무기로 다른 아이들을 불행으로 밀어넣은 것입니다. 욕망과 세상의 풍속이 이렇게 사람들을 더욱 더 비참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죠. 청소년들이 더욱 과감하고 심각하게 이 욕망을 따르고 있다는 것, 성인들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르는 것을 볼 때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몇 몇 특정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을 믿기 전 우리의 모습이며, 지금도 주님을 거부하는 이 시대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막가는 인생처럼 궤도가 끊어진 철로 위를 질주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겉으로나 지금의 모습으로 보지 말고, 그 끝을 보고 다음을 보라고 주님은 권합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불쌍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3)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그런데 보다 심각한 문제는 그리스도밖에 있는 사람들이 허물과 죄를 반복하고, 타락한 육신의 본성을 따르며,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는 삶을 사는 것에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2절에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의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라고 합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지금 불순종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살았다’는 말씀인데요, 이것이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난 날 우리의 행동이, 알고 보니 악한 영이 주관하여 결국은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만들려는 거대한 음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사단의 조종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 사단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주관을 가지고 살고 있으며, 설사 죄를 지어도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말하지만,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공중권세 잡은 자와 그가 부리는 악한 영을 따라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사단의 꼭두각시인 셈입니다.

저는 최근 우리 교회 새가족 두 분으로부터 거의 똑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 기도원에 가려고 하는데, 뭔가 강한 힘이 느껴지면서 굉장히 힘들고 고통스러웠는데, 어느 순간 뒤돌아보니 자기 뒤, 자기 곁에 거대한 어둠의 존재가 자신을 꽉 붙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알고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후로는 그들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그대로이지요.

성도 여러분, 믿기 전 여러분의 삶에 대해서, 여러분의 삶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던 사단에 대해서 화가 나지 않습니까? 지금도 우리의 가족 이웃 친지들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면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만드는 그가 밉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뒤에서 자신들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는 사단의 꼭두각시 노름을 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상이 주님을 믿기 전 우리의 모습이요, 하나님을 모르고 주님으로부터 떠나있는 이 세상 사람들의 현실입니다.

황새 한 마리가 늪에 빠졌습니다. 두 다리가 푹 빠졌는데 ‘어떻게 다리를 뽑나’ 하고 생각을 하다가 부리를 늪에 박고는 부리에 힘을 주어 두 다리를 쑤욱 뽑았습니다. 그랬더니 다리는 빠졌지만 이번에는 부리가 늪에 깊이 빠졌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부리를 어떻게 뽑나’ 고민하다가 두 다리에 힘을 주고는 부리를 쑤욱 뽑았더니 다시 두 다리가 늪에 깊이 빠졌습니다. 다리를 뽑으면 부리가 빠지고, 부리를 뽑으면 다시 다리가 푹 빠지고 … 이것을 백 년 동안 계속 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도 어느 늪에 가면 두 다리를 뽑으면 부리가 빠지고, 부리를 빼내면 두 다리가 빠지고 하는 것을 반복하는 그 황새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늪에 빠진 이 황새처럼 “허물과 죄로 죽어있는” 상태, “이 세상 풍속을 좇는” 상태,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상태에 있는 인생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늪에 빠진 황새처럼 스스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전에 우리가 그러했고, 지금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러했던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지금 이 절망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구원받을 길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3. After, or now

이제 크게 두 번째로 “After”, 즉 우리가 주님을 믿은 이후에 관한 말씀을 볼 차례입니다.

1) 살아있는 자

전에 우리는 죽은 자이었으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살았다”는 것, 즉 성경이 말하는 생명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생명’이나 혹은 ‘살아있다’는 말을 할 때는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쓰였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고 할 때 사용된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생명이란 우선적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으로 ‘변함이 없는 살아있음’입니다. 우리처럼 변하고, 약해지기도 하고, 감소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늘 변함없이 그대로 있는 생명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살게 되었다는 것은 유한하고 약하고 점점 줄어들고 사라져가는 인간의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생명을 가졌다는 뜻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타락하기 전 인간이 가졌던 것으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닐면서 하나님과 교제했던 원래의 그 생명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아담이 ‘산 영’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하는데요, 바로 그때의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만나고 대화하고 의논하고 동행하는 관계적인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이것을 상실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았던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참 생명에 대한 지식을 잃었고, 육신의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참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육신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과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놀라운 복들을 누리는 것이 생명이요, 이것을 모르는 것이 불행이고 죽음이라는 것이죠. 여러분은 바로 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람

4절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큰 사랑으로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자비를 베풀어주셨는데, 그 자비란 지갑에서 동전 몇 닢을 꺼내 던져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의 것들의 부스러기, 남은 조각, 작은 몇 가지를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을 뿐 아니라, 아들과 함께 그 아들의 모든 것을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은 3개의 단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함께 살리셨다’, ‘함께 일으키셨다’, 그리고 ‘함께 앉히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로 육신의 죽음을 뛰어넘게 하셨다는 말이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높이셨다는 말이고, 장차 주님의 심판대에 함께 있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들이 더 놀라운 것은 죽었던 우리, 세상과 사람의 것을 전부로 알고 거기에 매여살던 우리, 사단의 종이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얻게 된 것은 장차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될 그런 복을 받을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의 신분의 급상승입니다. 전에는 죽은 자였습니다. 육신이 원하는 대로, 육체가 이끄는 대로,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조종을 받던 자들이었고, 그에 의해서 이용만 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볼 때도 論理的인 飛躍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예수님과 함께 행동하는 자로, 아니 예수님과 같은 신분으로 급상승을 한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제 이야기 하나 해야겠습니다.

제가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제1가나안농군학교 내에 있는 교회를 섬길 때에, 저는 그 전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매월 한 차례, 서울 강남의 특급 호텔인 인터콘티넨탈호텔에서 故 김용기 장로를 기념하고 그 정신과 신앙을 계승하자는 모임인 “一家會”라는 모임이 열립니다. 이 모임에는 아주 유명한 인사들이 매 번 40, 50명 가량 참석합니다. 前 現職 長官, 전 현직 大法官, 전 현직 國會議員과 대학교수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서영훈 전 국무총리, 강영훈 전 국무총리, 박세직 전 의원, 고건 전 총리, 이진 예비역 장군이자 前 한국전력 사장, 정희경 전 의원, 손봉호 총장, 김성훈 전 농수산부장관, 옥수수 박사인 김순관 박사, 전 파키스탄 주재 유엔군 사령관, 대통령 직속 교육개발연구원의 원장인 서울대 문용린 박사, 서울대 교수이자 정신문화연구원 교수인 김기석 박사, 그 외에도 강원도와 경기도 산골에서 유기농과 농촌운동을 하시는 분들 등……. 이런 대단한 분들이 모인 자리에서 제가 사회를 보기도 하고, 대표기도를 하기도 하는 등 맹활약을 했습니다.
그리고 매년 한차례 세계적인 일가상 시상식이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김용기 장로의 신앙과 사상을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상입니다. 방콕의 잠롱, 인도네시아의 농촌운동가, 일본의 신용협동조합 생활협동조합운동을 벌인 게이코 여사, 돌아가신 한국유리 사장님, 한국의 농촌 운동가들과 학자들…….등이 수상자들입니다. 이 일가상의 시상은 그 해 현직 국무총리가 와서 했습니다. 이런 모임에 중요인사로 참석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도산 안창호 선생을 기념하는 道山協會와 도산상 수상식에도 가 보았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런 경험을 통해서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처음에는 저 같은 촌놈이 그런 대단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영광스러웠습니다. 그러다가 깨달은 것이 제가 예수 안에서 얻은 것은 그보다 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변화된 신분과 주 안에서 얻은 것은 이전과, 그리고 세상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 그 전과 지금의 비교할 수 없는 차이

말씀을 맺겠습니다.

애벌레 한 마리가 알을 깨고 태어났습니다. 꼬물꼬물 기어 다니다가 배가 고프면 나뭇잎을 갉아먹고, 졸음이 오면 잠을 자다가, 깨어서는 또 다른 나뭇잎을 갉아먹고, 그리고 또 자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다른 애벌레들도 다들 그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애벌레가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전부일까? 혹시 이 이상의 무엇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애벌레는 자기에게 시원한 그늘과 양식을 제공해 주던 나무에서 기어 내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어디론가를 향해 가다가 무수히 많은 다른 애벌레들이 어떤 기둥의 정상에 오르려 발버둥치고 있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정상에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애벌레는 사방으로부터 밀리고, 채이고, 밟히곤 했지만, 힘들게 오르고 또 오르던 중,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훨훨 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애벌레는 애벌레로 끝날 존재가 아니라 아름다운 한 마리의 나비가 될 존재였다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는 ‘트리나 포울러스’의 소설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의 내용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그리고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사는 그것마저 사단의 지배를 받아 사는 꼭두각시의 삶인데도 전혀 모른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비참하게,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향해 가는 것이 우리의 과거이고, 지금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살리셨도다”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살리셨고, 그 결과 우리는 변화되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엄청난 신분의 상승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이 변화는 너무나 놀라운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안에서 그 어떤 말로도 설명이 어려운 신분의 변화와 삶의 급상승을 얻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 여러분의 모든 삶에 성자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 이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설명이 안 되는 특별한 축복입니다. 그리고 이전 우리의 모습과 비교하면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Before”와 “After!” 예수님을 믿기 이전과 우리의 지금은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차이와 간격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알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그 신분의 차이에 걸맞게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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