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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 (히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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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 (히 11:23)

마테오 팔코네

프랑스의 소설가 프로스페르 메리메가 1829년 발표한 <마테오 팔코네>(Mateo Falcone)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이 단편소설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 소설은 나폴레옹의 고향으로 유명한 코르시카 섬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코르시카는 지중해에 있는 섬으로 거리상으로 볼 때 프랑스보다 오히려 이탈리아에 더 가깝지만, 1769년 강제로 프랑스의 영토로 합병되었고, 바로 그 해 나폴레옹이 태어났습니다. 코르시카 사람들은 할아버지에서 손자까지 모두 한데 모여 사는 대가족제를 이루고 있어서 가족끼리 결속이 잘 되고 무엇보다도 명예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문의 명예가 손상을 입게 되면 남자든 여자든 단검을 몸에 지니고 다니며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복수는 코르시카의 말로 '벤데타'라고 하며, 신성한 것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사소한 일로 인해 두 가문이 몇 십 년이나 서로 피 흘리는 싸움을 벌이는, 끊임없는 '벤데타'가 펼쳐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 코르시카의 정신이 바로 소설 <마테오 팔코네>의 배경이 됩니다.

코르시카의 산기슭에 마테오 팔코네라는 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테오는 120보나 떨어진 바위산에 사는 야생 양을 한 발에 명중시킬 정도로 명사수였습니다. 마테오에게는 포르투나트라는 열 살 먹은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이 소년이 혼자 집을 보고 있을 때 한 남자가 허벅다리에 피를 흘리며 도망쳐 왔습니다. 정부군과 싸우다가 이곳까지 쫓겨 오게 된 것입니다. "너, 마테오 팔코네의 아들이지? 나를 숨겨 줘. 쫓기고 있단다." 그래서 소년은 짚 더미 속에 그를 숨겨 주었습니다. 곧이어 헌병 하사 감바가 인솔하는 정부군이 들이닥쳐 지명 수배자를 찾았지만 결국 발견하지 못했고, 포르투나트도 그가 숨어있는 곳을 끝내 말하지 않았습니다. 찾기를 단념하고 다른 곳으로 가려는 순간, 감바 하사의 머리에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소년의 눈앞에 은시계를 달랑달랑 흔들면서 말합니다. "그 자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면 이것을 주겠다." 고민하던 소년은 그 은시계가 갖고 싶은 나머지 그만 손가락으로 짚 더미 쪽을 가리키고 말았습니다. 남자가 체포되어 병사들에게 끌려갈 때 마테오 팔코네가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명예를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코르시카의 남자들에게 있어서 배신이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테오는 아들을 뒷산 골짜기까지 데리고 가서 최후의 기도를 올리게 한 뒤 총으로 쏘았습니다. 명예를 더럽힌 사람은 죽음으로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10살짜리 철부지요 사랑하는 자식일지라도, 그리고 대를 이을 오직 하나뿐인 아들일지라도 말입니다.

바로의 명령

상황은 전혀 다르지만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성경에 나옵니다. 출애굽기 2장에 말입니다. 한 레위인 총각이 레위인 처녀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아들 낳았다고 온 동네가 잔치를 벌이고 온 집안이 떠들썩하게 소문내고 함께 기뻐할 일인데 웬일인지 이 집은 쥐죽은 듯 고요하기만 합니다. 오히려 아들 낳은 것을 쉬쉬하며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는 이상한 분위기입니다. 그 까닭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땅 애굽의 바로 왕이 무서운 명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들을 낳기만 하면 다 나일 강에 던져 죽이라는 명령입니다. 성경은 바로 왕이 이런 무서운 명령을 내린 까닭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출애굽기 1장 8절부터 보실까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출 1:8~10)

지난주 설교 때 요셉의 믿음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만 이제 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요셉이 총리대신이었던 사실을 모르는 바로 왕이 등극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바로 왕은 한 가지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번성하고 점점 더 자식을 많이 낳아 애굽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많아지고 강해져서 필시 전쟁이 일어나면 적군에 내통하여 애굽 백성들을 죽이고 이 땅에서 나가 버릴까봐 두려운 마음이 든 것입니다. 한 나라를 책임 진 왕으로서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당시에는 이런 일이 흔했다고 합니다. 남의 지배를 받고 설움을 받는 민족이 언젠가 반란을 일으켜 독립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가 지배민족과 다른 민족 간에 전쟁이 일어나면 이 기회를 타서 그 적군과 힘을 합해 이쪽을 공격하거나 독립을 꾀한 것입니다. 그러니 바로가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게다가 7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번성해서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히브리인들은 아이를 많이 낳았나 봅니다. 대개 이민 온 사람들이 아이들을 많이 낳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 미국도 히스패닉(스페인 말을 쓰는 라틴 아메리카 계 미국인) 인구가 급증하여 아주 골칫덩어리라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아이를 한 둘 아니면 아예 안 낳는데 이들은 일곱 여덟, 열 명까지 낳습니다. 히스패닉들이 대개 천주교 신자라서 피임이나 낙태를 절대로 안 하는데다가 미국의 사회보장제도가 아이를 많이 낳으면 온 집안 식구들이 먹고 살만할 정도이기 때문이라는군요. 그래서 이미 미국 내에서 히스패닉 인구가 흑인 인구를 넘어섰고 이대로 가다가는 곧 스페인 말을 쓰는 히스패닉 대통령도 나오고 2050년에는 히스패닉 인구가 백인보다 많아져서 아예 이들이 미국을 통째로 정복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우려까지 나오는 형편이라고 합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야기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어찌 바로 왕이 걱정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이제 바로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게 됩니다. 히브리 산파인 십브라와 부아에게 명령을 내려서 히브리 여인이 해산할 때 지켜 섰다가 아들을 낳으면 무조건 나일 강에 갖다 던져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누구의 명령입니까? 마치 신처럼 애굽 땅을 다스리는 절대군주의 추상같은 명령입니다. 이 명령을 어겼다가는 당장 죽은 목숨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똑똑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무서운 명령을 어긴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왕의 명령을 받은 산파 십브라와 부아, 그리고 모세의 부모입니다. 바로의 명령을 어기고 아들을 살려주거나 숨기다가 발각되면 죽는다는 것을 이들도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명령을 어기고 아이를 숨긴 까닭은 무엇일까요?

산파들의 믿음

먼저 히브리 산파인 십브라와 브아가 아이들을 숨긴 이유가 출애굽기 1장 17절에 나옵니다. 볼까요?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이 두 사람은 여자 산파였습니다. 두 여인은 물론 애굽 왕의 명령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17절에 똑똑히 나온 것처럼 두 사람은 애굽 왕보다 누구를 더 두려워했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이들을 살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 산파의 믿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세상의 규칙을 어기고 세상과 싸우기까지 하는 이유는 세상이 안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때로 돈을 손해보고 남에게 따돌림까지 당하면서 예수 믿는 것은 손해 보는 것이 안 무섭고 따돌림과 비난당하는 것이 안 싫어서가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손해 보기 싫고 남한테 비난과 따돌림 당하는 것 싫습니다. 때로는 "이렇게 살다가 도태되는 것 아닌가, 이러다가 크게 어려움 당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고 믿기 때문에 세상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버려지는 것도 두렵지만 하나님께 버림 받는 것이 더 두려워서 하나님을 좇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도 합니다. "나는 하나님 믿다가 손해 보는 것 하나도 안 무서워, 신앙생활 때문에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버림 받아도 괜찮아." 정말 그럴까요? 아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사람인데요? 어떻게 그런 것이 하나도 안 무서울 수 있습니까? 아무리 크리스천이라고 해도, 아무리 열성신자라 해도 어떻게 그런 것이 하나도 안 무서워요? 말도 안 됩니다. 산파들도 사람인데 왜 바로의 명령이 두렵지 않고, 왜 죽는 것이 안 무서웠겠습니까? 무서워요. 당연한 것입니다. 손해 보는 것도 싫어요.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합니다. 다 두렵지만 하나님이 가장 두렵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따르는 것입니다. 다 싫지만 하나님께 버림 받는 것이 제일 싫기 때문에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세상 즐거움도 좋고 세상 부귀영화도 좋지만,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찬송가 94장)

이것이 바로 산파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비록 천한 산파요 힘없는 여인들이었지만 세상 그 무엇보다, 심지어 자기 생명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더 두려워하고 소중히 여긴 십브라와 부아를 믿음의 사람으로 기억하고 출애굽기에 기록한 것입니다. 또한 조금 있다가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모세의 부모의 신앙 또한 이들 산파와 같습니다. 모세의 부모도 바로의 명령과 생명의 위협을 두려워하기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더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모세를 보호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전당>은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왕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 할 줄 하는 믿음으로 두 산파와 모세의 부모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모세의 부모의 믿음

이제 산파들의 믿음에 이어 오늘의 주제인 모세의 부모의 믿음을 본격적으로 살펴봅니다. 바로의 추상같은 명령을 어긴 또 다른 사람들, 바로 모세의 부모였는데 출애굽기 1장과 2장이나 히브리서에는 이들의 이름이 안 나오지만 저 뒤에 출애굽기 6장 20절에 보면 이들의 이름이 '아므람과 요게벳'이라고 나옵니다. 하지만 사실 이들의 이름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름 좀 안 나오면 어떻습니까? 남들이 내 이름 모르면 어떻습니까? 내가 어떤 일을 했느냐가 중요하지요.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일을 했느냐가 중요하지요. 성경은 그 사람의 이름을 내세우기보다 그가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이며 어떤 일을 했느냐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면 모세의 부모 아므람과 요게벳은 어떤 일을 했습니까? 바로의 명령을 어기고 자신들이 낳은 사내아이를 숨깁니다. 출애굽기 2장에 보면 석 달 동안 숨겨두었다가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어 갈대 상자에 아이를 넣어 나일 강에 띄웠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비록 짧은 석 달의 기간이었지만 갓 태어난 건강한 아이를 초라한 움막집에서 숨긴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저도 아이들을 키워본 사람으로서 제 경험에 의하면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제 큰 아이는 실제로 첫돌이 되기 전 하룻밤에 일곱 번 이상 깨서 큰소리로 운적도 있습니다. 정말 그 때 저에게 갈대상자라도 있었다면 띄워 보내고 싶은 생각까지 다 들었습니다. 모세의 부모가 아이를 숨기기 어려웠던 이유가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아마도 숨겨 놓은 아이들을 찾기 위해 애굽 병사들은 집집마다 수색을 하며 다녔을지도 모릅니다. 몇몇 히브리인은 제 목숨을 부지하려고 이들에게 협조해서 누구네 집에 아들을 숨겨놓았다고 고발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도저히 아이를 숨길 수 없는 상황들만 가득했습니다. 안 되는 이유만 있었습니다. 들키면 아이뿐 아니라 부모도 다 죽습니다. 온 집안이 멸족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세의 부모는 이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아이를 살리기로 작정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

그런데 도대체 모세의 부모가 이런 어려움과 목숨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숨긴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방금 전 '믿음' 때문이라고 했습니다만 무조건 믿음이 아니라 뭔가 이유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이유를 찾아보면 모세의 부모의 믿음의 특징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출애굽기 2장 2절입니다.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왜 숨겼다고요? 아들이 잘 생긴 것을 보고 그렇게 했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히브리서 11장 23절도 모세가 났을 때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을 숨겼다고 말씀합니다. 잘 생긴 것이나 아름다운 것이나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냥 아이가 하도 잘 생겨서 숨겼다는 뜻일까요? 물론 아이를 낳고 보니 너무 예쁘고 잘 생겼어요. 그러면 죽이기가 더 싫고 불쌍하겠지요. 하지만 단순히 이것 때문에 목숨을 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뭔가 또 다른 뜻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히브리말로 이 '잘 생겼다'는 낱말은 '토브'입니다. 따라하십시다. '토브'라는 말은 영어로 Good입니다. 이 말은 물론 'Good, 좋다'는 뜻이지만 이뿐 아니라 아주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하다, 즐겁다'는 뜻도 있고 '선, 이익, 번영, 복지'라는 뜻까지 아주 널리 쓰이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태어났을 때 그를 보고 부모가 '토브'하다고 느낀 것은 물론 외모로 잘 생겼다는 뜻도 있지만 '참 귀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4절에 하나님이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날뿐 아니라 마지막 여섯 째 날까지 매일 그 모든 지으신 것들을 보시니 모두 '좋았더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바로 히브리말로 '토브'입니다. 하나님이 당신께서 창조한 것들을 보니 '토브' 즉 "참 좋다!"고 하신 것인데 이 말은 그 만드신 모든 피조물이 너무 귀하고 아름답고 좋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토브'하다는 것은 단순히 얼굴이 잘 생긴 것만 아니고 그 아이가 너무도 귀하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 귀한 존재라는 뜻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7장 20절에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즉 부모가 보기에 귀하고 예쁜 자식인 것도 중요하지만 이 아이가 하나님 보시기에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자기 아들의 모습에서 바로 이런 가치를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단순히 우리 아이라서 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사람이구나. 그러니 우리가 목숨을 걸고라도 이 귀한 아이를 살려야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모세의 부모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하는 구원자가 될 것이라는 내용을 꿈으로 계시 받았다는 전설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모세의 부모는 단순히 아들을 죽이기 싫어 모험을 했다기보다 모세가 분명 이스라엘의 해방자가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목숨을 건 위험을 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아이를 갈대상자에 넣어 띄운 것이 참 무책임하다고, 그러다가 강에 떠내려가 죽으면 어떻게 하냐는 말도 하지만 이것은 결코 무책임하거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아이를 방치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아주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작정 나일 강에 띄운 것이 아니라 가볍고 통풍이 잘 되는 갈대상자에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해 방수를 했습니다. 게다가 절대 강물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나일 강의 갈대 사이에 둡니다. 그곳은 물이 머물러 있어 잘 흐르지 않는 안전한 곳입니다. 또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을 보내 망을 보게까지 합니다. 아주 치밀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치밀하게 철저하게 계획하고 실행하더라도 최종적인 결과는 결국 하나님 손에 달린 것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최종적으로 그 아이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정말 이 아이를 하나님이 택하신 아이인지, 하나님이 장차 귀히 쓰실 아이인지가 판가름 나지 않겠습니까? 결국 모세는 '때마침' 이곳에 목욕하러 나온 애굽의 공주에게 발견되어 애굽 궁전에서 왕자로 자라게 됩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만 '때마침'이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요 계획 속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보면 바로 하나님이 이 아이를 택하시고 귀히 쓰시겠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부모입니까? 모세의 부모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이 아이가 장차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을 사람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지킨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의 모습에서 어떤 미래와 소망을 발견합니까? 내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정말 중요합니다. 또 모세의 부모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 인간적인 모든 노력을 다 합니다.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합니다. 하지만 최종적인 결과는 결국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오늘 우리도 자녀들을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잘 키워보려고 엄청난 노력과 투자를 기울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공부계획이겠지요? 그밖에도 취업과 시집장가 보내는 일도 중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 부모가 최선을 다하고 아무리 치밀한 계획대로 자녀를 키우다 해도 결국 이 아이들의 미래는 전적으로 하나님 손에 달려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 믿는 부모들은 내 자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어떤 믿음의 투자와 모험을 합니까? 사람보다, 세상의 가치관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자녀를 믿음으로 키우고 있습니까? 얼마나 정확하고 세밀한 신앙적 계획으로 자녀를 양육하고 있습니까?

처음 소개한 마테오 팔코네 같은 코르시카 사람들은 은시계보다, 심지어 목숨보다 '명예'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요즘 부모들은 무엇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나요? 내 아이 '성적'만 올려준다면, 좋은 회사 '취직'시켜주고, 좋은 데 '시집장가'만 보내준다면 내 목숨도 기꺼이 내놓겠다고 한답니다. 하지만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의 계획'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습니다. '내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자기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하나님이 그 믿음대로 그 자녀를 소중히 여기셔서 귀하게 들어 쓰십니다. 민족을 구한 영웅으로, 민족을 이끌어간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그리고 하나님의 가장 귀한 사람으로 말입니다. 우리 부모들은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어떤 믿음을 가져야 우리 자녀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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