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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탕자의 비유로 본 사랑의 정의 (눅 15: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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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눅15:20-24
제목 / 탕자의 비유로 본 사랑의 정의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눅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 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요3:16절에서도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다고 하였습니다. 요한 사도는 요일 4:16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증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제목이 붙는 이 이야기는 사실 탕자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탕자를 용서하고 그를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가 그 주인공입니다.
주님은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사랑의 하나님을 보여주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를 이 이야기를 통해 잘 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비유를 말씀하신 주님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비유를 통해 발견하는 하나님이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즉 무엇이 사랑인가 하는 것입니다.

1. 기다림이 사랑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 모습에서 사랑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20절을 읽어보면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라고 했습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라는 말은 아직 거리가 멀리 떨어져있다는 것입니다. 먼 거리에서 아버지가 먼저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아버지가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돌아오는 아들은 미리 연락을 취하고 온 것이 아닙니다. 아들은 집으로 다시 돌아오지 직전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눅 15:18-19) 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죄송하고 부끄러워서 아버지 뵐 면목도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 아들이 무슨 염치로 미리 연락을 했겠습니까?

그렇다면 아버지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아들을 맞기 위해 날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은 자신에게 주어질 유산을 미리 받아 아주 먼 나라로 기약도 없이 떠나 버렸지만 아버지는 그가 다시 돌아올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간절한 희망 사항이었고 믿음이었습니다. 그 희망과 그 믿음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이 떠나간 이 후로 “기약 없는 기다림” 의 시간들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기다림도 마찬가지입니다.

탕자와 같은 인생들이 주께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길이 참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2:4절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지 말라고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그리고 롬3:2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의 피를 믿는 사람들의 죄를 “길이 참으시고 간과”하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우리들은 하나님이 기다려 주지 않으셨다면 벌써 심판대 아래에 섰어야 마땅한 인생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다려 주셨습니다. 회개할 때까지, 돌아올 때까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영생 얻을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2. 불쌍히 여김이 사랑입니다.

측은지심(惻隱至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가엾고 애처로이 여기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20절에 보면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라고 했습니다. 아들을 보자 아버지의 마음에 측은지심이 발동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서로 불쌍히 여김에서 시작합니다. 상대방의 형편을 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안 생기면 그것은 애절하고 깊이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시 103:13절의 말씀에 보면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기에 우리가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측은지심이 한량없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측은지심을 가지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잠 14:21절에 보면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잠 14:31절에 보면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사람은 주를 멸시하는 자이지만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잠 19:17) 라고 했습니다. 여오와께 꾸이는 것이니라는 말은 여호와께 꾼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빚을 얻어가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돌보면 하나님이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잠 28:13절에 보면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측은지심 즉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복 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측은히 여기셨기에 그 사랑을 우리가 받게 된 것입니다.


3. 먼저 손 내미는 것이 사랑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오는 아들을 먼저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은 먼저 손을 내밀어 잡아주신 것입니다.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에게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할 죄를 지었음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니 돌아오면서도 아버지 볼 면목이 없어서 “품꾼”으로 여겨달라고 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의 생각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들이 미안해 할까봐, 아니 염치없어서 돌아오다가 다시 달아나 버리지 않을까?... 그것이 아버지의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달려가 먼저 손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슴에 끌어안았습니다. 사랑은 먼저 다가가 손 내밀고 먼저 끌어안아 버립니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 성가 중에 내가 먼저 손내밀지 못하고 라는 가사의 노래가 있습니다. 저는 그 노래를 들을 때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렇다 내가 먼저 손 내밀고 내가 먼저 용서하자. 실천하기는 어려웠지만 언제나 저의 마음을 휘감고 있는 생각이 되었습니다.


4. 과거를 묻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 탕자의 비유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재산을 다 탕진하고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 아들의 과거의 잘못에 대하여 아무 책망이나 나무람이 없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정말 사랑하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돌아온 것 하나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다. 아버지를 떠났던 과거, 실패하고 패배하였던 과거, 온갖 더러움과 죄로 가득했던 과거, 그것은 이제 지나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은 과거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왜 과거를 묻지 않으실까요?

그것은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이미 아들의 모든 잘못을 이미 용서해 놓고 기다렸습니다. 아버지의 용서가 근거가 되어 아들은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용서는 과거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용서는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용서했다고 하면서 꼴보기 싫은 건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본문을 보면 돌아온 아들을 어쩔 수 없이 맞는 아버지의 태도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그를 받아드리고 그의 모든 것을 용납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그의 더러운 옷을 세탁하고 사랑의 강물에 그의 몸을 목욕시켜서 받아 주셨습니다.

세계적 설교가였던 캠벨(Campbell)은 2차 대전에 참전하여 전투를 하던 중 17세 정도밖에 안되어 보이는 소년병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비록 적이긴 하지만 자기가 죽인 그 어린 소년 병의 얼굴이 계속 머리에 떠오르며 양심에 가책이 들어 마음이 편하질 않았습니다.
켐벨은 고민하다가 자기 부대의 군목실을 찾아가서 상담을 했습니다.
그 부대에 군목이 3명이 있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군목은 “군인이 뭘 그런 것을 가지고 고민하느냐고 하면서 전쟁터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용기를 내라” 고 말했습니다.
캠벨은 그런 답변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어서 세 번째 군목을 찾아갔습니다.
세 번째 군목은 켐벨의 고민을 다 듣더니 두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를 껴안고 울면서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켐벨의 마음은 더 이상 대답을 들을 필요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군목실을 나오려는데 문을 나서는 순간 군목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캠벨은 그 순간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 것을 실감했고 비로소 안심을 얻었다고 합니다.

용서의 복음만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혈의 공로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어떤 과거도 하나님께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사 43:25절에 보면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도말(塗抹)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도말’이라는 ‘말은 겉에서 무엇을 발라서 본래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허물을 도말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무엇으로 우리의 죄를 도말(塗抹)하실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양이나 염소, 황소나 암송아지의 피로 사람의 죄를 도말하는 속죄제사를 드렸습니다. 짐승의 피로 드리는 제사도 한시적으로 사람의 죄를 도말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이 사람의 죄악이 도말 됩니다.

그리고 예수의 피는 그 피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양심과 영혼을 깨끗하게 씻고 도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히 9:13절에 보면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일 1:7절에 보면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본래 죄악 된 허물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발라서 죄악된 모습이 영원히 드러나지 않게 하시는 일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 분이 당신이 도말하신 우리의 허물을 또 기억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도말 된 우리의 죄를 영원히 기억지 않으시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허물을 용서하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취급하실 때 적용하시는 세 가지 사랑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와 도우심 신뢰입니다. 즉 과거는 용서해 주시고 현재는 도와주시고 미래는 믿어 주시는 분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과거를 문제 삼지 않는 것은 우리의 미래성과 상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주님을 잘 섬길 줄, 더 사랑할 줄, 더 충성할 줄 믿어주시는 분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딤전 1:1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주님은 바울의 미래를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에게 고기 잡으러 갈릴리로 내려온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 고 부탁하신 것을 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게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범죄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의 미래를 믿어주신 것입니다. 믿기 때문에 과거를 문제 삼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과거를 용서해 주시고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으실 뿐 아니라 미래를 믿어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길이 참고 기다려주시는 분입니다.
측은지심이 많으셔서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먼저 알아 주시고 손 내밀어 붙잡아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과거를 추궁하시 않고 미래를 믿어주시는 은혜로운 아버지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과 삶속에 넘쳐서 우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살게되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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