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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시 6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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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시 62 : 1 - 12
제 목 :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믿음인 줄 믿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믿음이 빠져있다면, 그것은 앙꼬 없는 찐빵이요, 물 없는 오아시스에 불과할 뿐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고, 또 멀쩡해 보이는데, 실상은 아무것도  아닌 신앙이라는 것이지요.  성경에 나오는 대로 표현하자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신앙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참 이해가 되질 않는 이야기 같습니다. 
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성도들이,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는 것일까?  교회에서 보면 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 같은데, 교회 밖에서 보면 예수 안 믿고, 하나님 안 믿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한마디로,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자신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에, 교회 밖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이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기대가 없는 사람들이, 주일이면 왜 교회에 와서 이렇게 예배드립니까?  생활 속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지만, 그래도 구원 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기대나 신뢰와는 상관없이 그래도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린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스스로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이 한 주간을 살아가다가, 주일이면 교회에 와서 드리는 그 예배를, 하나님이 과연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히 11 : 6절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아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습니다.  한 주간동안 믿음 없이 살아간 성도들이, 주일이라고 교회에 와서 드리는 그 예배를, 하나님은 별로  기뻐 받으시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상태의 성도들이,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대한 기대가 새롭게 나타나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안다고, 평소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대한 기대가 없이 살아간 사람들이, 주일날 예배드리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겠다는 기대가 생겨나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했는데, 주일날 하나님 앞에 나왔으면서도, 아무런 기대도 없이, 그저 목사가 전하는 설교 말씀만 듣다가, 그냥 돌아가  버린다면, 그 신앙에 무슨 은혜가 있겠으며, 그 인생에 무슨 축복이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탄식한 대로, 그저 성전 마당만 밟고 돌아갈 뿐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성천 교회 성도들 가운데서는, 이런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다 믿음이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자신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할렐루야!!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지만,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미처 알지를 못해서, 또 신뢰하지를 못해서,  여전히 세속적인 방법으로 살아가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해, 바울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는 내용의 말씀인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들은, 한 주간의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새로운  은혜와 축복을 날마다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무한하시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無에서 有를 창조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믿습니까?  “나는 만군의 여호와라, 내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기사와 이적을 베푸시기 전에, 꼭 하시는 말씀이 있잖아요?  “네가 이것을 믿느냐?”  (2번)
그 사람의 믿음을 꼭 확인해 보신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게 전에, “네가 정말 그것을 믿느냐?” 라고 그 믿음을 먼저 확인하십니다.  어떤 사람의 장래를 인도하기 전에, 꼭 한 가지를 먼저  확인하십니다. “네가 정말 그것을 믿느냐?  네가 정말 나의 존재를 믿고,  나의 인도함이 선한 줄 믿느냐?” 
이 믿음에 대한 확인 작업에 통과한 사람들만이, 인생에 하나님이 능력으로  행하신,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며, 날마다 새로운 은혜와 축복을 덧입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러면 이 시간,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야겠는데, 과연 어떠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  그저 막연하게, “하나님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살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믿음이 무엇인지, 믿음의 실체를 우리가 정확히 알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으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구체적인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세 가지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만  구원의 소망을 갖고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편의 말씀은, 좀 사연이 있는 말씀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아들인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 쫓겨 가는 상황에서 쓰여진 말씀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참 기가 막힌 상황 아닙니까? 
다윗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왕이었지만, 또한 군인이었습니다.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었던 용맹스러운 장수였습니다.  수많은 적군들의 공격에도 끄떡없이 쓰러지지 않고, 이스라엘을 지키며, 자신의 왕위도 지켰던 다윗인데,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친 아들의 반란에 의해서 왕위를 빼앗기고, 쫓겨 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낳은 아들조차 나에게 등을 돌린 세상,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했던, 아들 압살롬이었습니다.  그런 아들마저 나에게 등을 돌린 세상, 이런 세상에서 다윗은 누구를 믿을 수가 있겠으며,  또 누구에게 자기의 구원을 호소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 도다.” 또 2절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니…”  “오직 저만” 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를 가리킵니까?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서도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 도다.”  6절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오직 저만”  “오직 저만”  하나님 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만!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만!”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예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기대하지 않고, 다른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며, 그 분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많은 경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또 다른 믿음의 대상을 찾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버리는 것도 아니예요. 
하나님도 믿고, 세상도 믿습니다.  하나님도 믿고, 돈도 믿습니다.  하나님도 믿고, 사람들도 믿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양다리 걸치기 작전을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식의 믿음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간다면,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가 없습니다.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인생에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직 당신만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에게만, 은혜를 주시고, 구원을 베풀어 주시고, 새로운 축복을 허락해 주시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성도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사람이 절벽에서 떨어지다가, 다행히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자꾸 힘이 빠지니까, 나뭇가지를 잡고 소리를 쳤습니다. “위에 누구 없어요?  살려주세요.  위에 누구 없어요?”
그런데 위에서 작은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나 여기 있다.”  “누구세요?”  “나는 네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다.”

“하나님, 그럼 어서 저를 살려주세요!” “그래?  그럼 염려하지 말고, 가지를 잡은 네 손을 놓아라!  내가 너의 손을 붙잡아 구원해 주마.” 
그러니까 이 사람이 한참 있다가 이렇게 외치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 말고, 위에 또 다른 사람 누구 없습니까?”  이렇게 말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런 자기의 모습이 너무 웃겨 가지고 한참을 웃다가, 꿈에서 깨어났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솔직히 우리가 인생을 이런 식으로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가, 바로 이런 것 아니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알도 믿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과 바알을 겸하여 섬길 것이 아니라, 이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라.”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을, 그들에게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한 쪽을 놓아야, 다른 한 쪽을 붙잡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부여잡고 있는 이 손을 놓아야,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내가 붙잡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다 잡을 수는 없는 것이예요.  두 가지를 다 잡을 수 있다? 
그것은 내 생각이요, 욕심일 뿐입니다.  절대 그렇게 되지를 않습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택할 것은, 단 하나입니다.  그 선택이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믿습니까?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믿는 것,
이것이 참다운 신앙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 이런 믿음 가지기가 참 어렵지요.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  가면서, 어느 한 쪽만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모하고 어리석은  것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쉽게 세상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진정 하나님 앞에 온전한 믿음을 가지기를 원하신다면, 세상에 대한 믿음은 지금이라도 포기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나의 믿음의 대상이 될 수가 없어.  오직 하나님 만!  하나님만이, 내가 믿고 따를 대상이야.”  이런 믿음의 신앙고백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입술에도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옛날 중세기의 수도사들이 늘 강조했던 말이 있습니다.
“세상은 사랑할 대상이지만, 신뢰할 대상은 아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세상을 끊임없이 사랑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렇지만 세상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예요.  믿었던 사람이 나를 배신합니다. 믿었던 은행이 나를 배신합니다.  믿었던 증권이, 믿었던 주식이 나를 배신합니다.  믿었던 회사가 나를 배신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세상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속고, 또 배신을 당하며 살아왔습니까? 
오늘 우리 인생에 나타난 고난의 모습들이, 다 무엇으로 인한 것입니까? 
세상의 배신으로 인한 것 아닙니까?  현대인들은 세상의 배신으로 인해 무수한 고통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 부부가 이혼을 합니까?  왜 부모가 자녀에게 업신여김을 당합니까?
왜 자녀가 또 부모에게 버림을 받습니까?  왜 친구가 나를 이용하려 합니까?  사람의 배신으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이 깨어지고, 인간관계가 흔들리면서, 사람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이지요. 
인관관계만 그런 것이 아니지요?  사업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잘 나가던 사업이 갑자기 실패합니다.  갑자기 부도가 나고, 망하게 됩니다.  왜입니까?  세상의 정세가, 세상의 환경이 나를 버리고,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3절과 4절 말씀을 보세요.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박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저희가 그를 그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이것이 오늘 우리 주변의 세상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환경이 나를 도와주지를 않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를 더 어려운 궁지로 몰아넣습니다.  그토록 세상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왔지만, 이런 배신으로 인해 삶에 여러 가지 고통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인생의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이러한 인생의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될 일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다시금 하나님을 찾는 일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찾되, 이제는 세상을 향한 믿음은 꺾어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따르는, 신앙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세요. 다윗은 자기 아들의 배신으로 인해, 지금 자기의 주변의 삶이 요동치고 있었지만, 그는 인생이 요동치는 그 때, 다시금 하나님을 바라  보면서, 정말로 하나님만을 신뢰했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 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다윗은 하나님만을 바라게 될 때, 비로소 마음에 평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조롱에도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했습니다.  비록 자신의 아들이  자기를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켜 쫓겨 가는 불쌍한 신세가 되었지만, 그 마음이 상하지 않고, 오히려 위로를 받으며, 힘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5절에서, 이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 도다.”  담이 흔들리고, 울타리가 흔들리고, 우리가 믿었던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상황이지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의 소망을 하나님에게만 두는 성도들의 인생에는, 결코 흔들림이 없는 마음의 평안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새롭게 일어서게 되는, 은혜와 축복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곧, 서로 간에 대한 신뢰를 뜻하는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어떠해야겠습니까?  서로가 믿을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 하지만, 하나님이 또한 나를 믿을 수  있어야 온전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또한 그 관계가 오래 지속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가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정말 하나님만이 나의 믿음의 대상이고, 하나님만이 내 유일한 신뢰의 대상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그분에게만은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분에게만은 내가 모든 것을 고백할 수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또 그분과는, 나의 모든 것을 의논할 수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모든 것을 말씀하시고, 나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말씀드리는 관계,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다윗이 뭐라고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까?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시시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의 마음을 토하는 것,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기도인 줄 믿습니다. 

“마음을 토하라”  다 끄집어내라는 말이에요.  속에 있는 것을 감추지 말고,  있는 그대로 다 끄집어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앞에 솔직 하라는 거예요.  괜히 의로운 척 하지 말고, 괜히 문제없는 척 하지 말고, 괜히 강한 척 하지 말고, 그냥 솔직하게,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하나님께 그대로 아뢰며,  그 분의 도우심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내 속에 숨어있는 열등감과 연약함, 내 인생의 실패로 인한 좌절과 눈물과 갈등, 숨기지 말고, 하나님 앞에 다 내어놓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모두 아버지 집에 오셨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아바 아버지 되시는 줄 믿습니다.  아버지 앞에 무엇을 꺼릴게 있습니까?  무엇을 감출 게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미 아십니다.  이미 나의 모든 것을, 나의 전부를 알고 계십니다. 내 인생의 과거, 내 인생의 현재, 심지어는 내 인생의 미래까지 다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믿습니까? 
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데, 그분 앞에 숨겨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 내어 놓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 위로 받으시고, 또 치료 받으시고,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 다시 일어서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으로, 하나님과 이러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가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금세기에, 평신도로서 가장 신앙의 영향력을 많이 끼친 사람은, “C.S 루이스” 라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를 아시는 분들이라면, 이에 대해 별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인데, 원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였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불가지론자였습니다.
“하나님이 있는 것을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문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문학적인 측면에서 그래도 성경을 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생각에, 신앙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문학적 관심 때문에 성경을 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중에 문학적으로 관심을 끌만한 성경이, 어느 성경이겠습니까? 
시편의 말씀들입니다.  그래서 성경 중에서, 시편을 좀 읽어보자.
그래서 시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시편 1편을 읽으면서 그의 소감은, “나쁘지 않다!” 좋은 감정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2편, 3편, 4편, 5편, 이렇게 읽어 가는데, 10편을 넘어서면서 그는 고개를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좀 이상하다. 시는 아름다워야 되는데, 이 시편 안에는 정제되지 못한 거친 언어들이 왜 이렇게 많이 나올까?  왜 이 시편 기자는 원수가 이렇게 많았을까?”

‘하나님이 원수들을 언제까지 두시겠습니까? 그 원수들을 죽일 기계를 준비했다가 작살을 내시옵소서.’ 이런 험한 말이 나온단 말입니다.

“에이, 이건 아름다운 시가 아니야!” 그래서 성경을 던져버렸습니다.
그런데 던지고 나서 그 다음 생각을 하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사람이 살다 보면 원수도 생기고, 그래서 막 죽이고 싶은 감정도 생기기도 하는데, 그런 자신의 감정을 적어도 솔직하게 기록했구나. 성경은 솔직하구나!  그 솔직함에 또 다른 매력을 느껴서 계속 성경을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고백하고, 하나님만이 인생에 유일한 믿음의 대상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비교적 일찍 쓴 책 가운데 하나가 “시편에 대한 묵상”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시편의 하나님을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의 하나님은 우리가 뭘 쏟아놓든지,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내가 어떤 절망과 어떤 불평과 원망을 말하든지,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 당신 믿을 수 없어요. 왜 그랬습니까?  너무 잔인하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런 소리를 해도, 그 모든 푸념과 독백과 절망과 원망의 언어들까지 다 받을 수 있는, 큰 가슴을 지니신 하나님, 그것이 시편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 모든 것 내어 놓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절망이 무엇입니까?  오늘 여러분의 눈물이  무엇입니까?  오늘 여러분의 좌절이 무엇입니까?  오늘 여러분의 아픔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감정, 여러분의 형편, 하나님 앞에 다 내어놓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믿습니까?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은 바로 하나님 안에서 이러한 관계의 자유를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나누는 이런 관계의 자유가, 오늘 저와 여러분의 신앙 가운데도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세 번째로,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의 삶 속에서 인생의 가치의 변화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믿음을 이해할 때,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물론 그것은 본질적인  것입니다.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이 정도에서 이해가 끝난다면, 우리의 믿음은 보험 수준밖에 안 되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생명 보험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신앙 안에서는 천국  보험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 믿어두면, 이 다음에 죽어서 천국에 가겠지.” 이것이 천국 보험입니다.  그런데 보험을 들어 놓으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냥 묻어둔 채로 살아갑니다.  보통 보면, 보험 증서가 장롱 안 같은 깊숙한 곳에 들어가 있지 않습니까?  인생에 질병이나 사고를 당하지 않는 이상 절대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보험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이, 그저 예수를 믿음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보험용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의 신앙생활을 보면, 늘 깊숙한 곳에 들어가 나오질 않습니다.  평소에는 교회에 잘 나오지 않다가, 평소에는 기도하러 잘 나오지 않다가, 꼭 언제 나옵니까?  인생에 문제가  생기면 나온다는 것이예요.  병에 걸렸거나, 사업이 잘 안되거나, 또는 자식이 속을 썩이거나, 이런 문제들이 있을 때만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믿음, 진정한 믿음이란 이런 보험용 믿음이 아닙니다.  굳이 빗대어 표현을 하자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믿음은 대출용 믿음입니다.  왜 대출용이냐?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받아 나오기 때문이예요.  인생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만 꺼내는 믿음이 아니라, 삶 속에서 수시로 믿음을 하나님께 내어 보이며, 오늘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  받는 믿음,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믿음을 가진 성도들의 삶이 어떻겠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일반 보통의 믿음을 가진, 보험용 믿음을 가진 성도들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분명 다를 줄 믿습니다.  달라도 크게  다를 줄 믿습니다.  다른 세상 사람들이나, 보통의 믿음의 사람들과 같이,  인생에 어려운 일들을 경험하며 살아가지만, 나중에 보면 그들과 같이 쪼들리는 가운데 피곤한 인생을 살아가지 않고, 오히려 풍요로운 가운데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아무에게나 이런 풍성한 축복의 대출을 허락해 주시는 것 아니지요?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조건입니까?  헌신의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앞으로 하나님 앞에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헌신하겠다.” 이런 인생에 대한 청사진을 첨부해서 하나님 앞에 올리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마음껏 필요한 대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우리의 삶에 받아 누릴 수 있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출용 믿음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남들보다 가치 있는 인생으로의 변화가 나타나게 만드는 믿음,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11절, 12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무슨 말입니까?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는데, 주님은 인자하심으로, 누구든지 믿음으로 청구하면, 필요한 대로 다 허락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렘 29 : 11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 모두가, 이 땅에서 다 부요하고, 행복하게 살아  가기를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결코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 성도들이 질병으로 인해 고생하며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 성도들이 날마다 문제에 치여 허덕이며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만약 여러분의 자녀들이 이렇게 살아간다면,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아무도 자기 자식들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 줄 압니다. 
하물며, 육신의 부모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바 아버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속한 자녀들이 이 땅에서 이런 빌빌한 모습으로, 초라한 모습으로, 나약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원하시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는 줄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 모두가, 이 땅에서 부요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시는데,  세상 사람들보다 분명 멋있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데,  오늘 우리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이런 멋있고, 가치 있는 인생을 기대하는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저 보험용 믿음으로 만족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저 내 인생에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보험용 믿음입니까?  대출용 믿음입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는, 대출용 믿음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믿음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멋있고, 가치 있는 인생으로 변화시켜 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인생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는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교훈과 같이, 하나님만이 나의 유일한 소망이 됨을 믿는 믿음으로, 또 솔직함으로 하나님과 자유로운 관계를 나누는 믿음으로, 또한 인생을 가치 있게  변화 시켜 주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저와 여러분의 남은 생애에 마음껏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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