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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얻는 믿음 (롬 1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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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얻는 믿음 (롬 10:9-13)

예수 믿는 이유

오늘 저는 구원에 관해서 말씀하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되지 아니한 성도님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따금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족이나 친구나 동료로부터 “당신이 예수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이 질문은 건성으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이 질문은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든지 동일한 대답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이유는 구원을 받기 위함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9절에 보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이유는 현실의 번영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받기 위해서 입니다. 구원이란 한 두 마디로 간략하게 정의할 수 없으리만치 풍부한 내용을 가진 말입니다.


구원이 필요한 이유

그렇더라도 구원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은 죄에서 해방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마 1:21).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라면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 속에는 전 인류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이 모든 사람의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이 죄인인지 아닌지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넓게는 인간 사회의 불의를 보면 알 수 있고, 좁게는 우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죄는 너무나 실제적이고 경험적이어서 우리는 얼마든지 죄를 집어낼 수 있습니다.

여기, 독감에 걸린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은 자신이 독감에 걸린 것을 고열과 두통과 온몸이 쑤시는 증상을 통해서 곧 체험적으로 압니다. 물론, 의학적으로도 독감에 걸린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학적인 증명이 없더라도 우리는 몸으로 느끼는 증상을 통해서 독감에 걸린 사실을 압니다. 우리 자신이 죄인인 사실을 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적으로나 철학적인 이론을 가지고 증명하지 않더라도 우리 자신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죄는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죄로 가득한 이 세상을 죄를 지으면서 살아갑니다.

인간이 죄인인 이유

그러나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아야 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것이 최초의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 된 것은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으로부터 타락한 본성을 물러 받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매우 억울해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아담이 범죄 했는데 왜 나까지 죄인이 되어야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그런 기독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선악과를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 죄를 짓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라면 죄를 절대로 짓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하나같이 선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가장 선량한 사람이라도 일생동안 전혀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실정법을 범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연, 교도소에 들어간 적이 없으면 의로운 사람일까요? 우리는 실정법 보다 더 상위의 법이 있음을 압니다. 그것은 도덕률입니다. 그러면 도덕적인 사람은 의로운 것일까요? 도덕률 보다 더 상위의 법이 있는데, 그것은 양심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가 평생 양심적으로 살아왔으므로 의롭다고 말합니다. 윤동주 시인은 서시(序詩)라는 시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시구는 그가 얼마나 양심적으로 살려고 했던 사람인가를 말해줍니다.

그러면 양심에 거리낌이 없으면 의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양심 보다 위에 있는 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인 율법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최고의 법인 하나님의 율법과 비교해 보면 더러워진 옷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로마서 3장 20절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인간들의 실상에 대하여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라고 말씀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율법에 비추어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정법을 지키면서 살아갑니다. 도덕적으로 살고, 양심적으로 살려고 힘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올바르게 산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율법 앞에 서면 허물과 죄가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빛이 밝을수록 옷에 묻은 더러움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여 죄인인 것이 드러났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죄를 지은 사람은 영원한 멸망을 받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진노가 죄인 위에 항상 머물러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죄의 삯으로 우리 인생에게 내려진 죽음은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 죽음은 영의 죽음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하신 말씀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의 영을 살리셨다는 뜻입니다.

둘째 죽음은 육체의 죽음입니다. 만일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아니하고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었더라면 육신의 죽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와 더불어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죽을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체의 죽음이 끝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하신 대로, 죄인은 육체의 죽음 이후에 영원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계시록 20장에 보면, 최후의 심판과 죄인들의 영원한 운명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11)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영원한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불못의 고통 뿐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구원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구원의 주체는

그러나 구원은 우리가 받고 싶다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실 뜻을 갖고 계신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멸망할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9)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죄인들이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인생들을 찾아오셨으며,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떠난 인생들을 위해서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시다니, 얼마나 위대한 사랑인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 죽음을 당하셨기에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 사함을 받으며, 그로 인해 죄 없는 의인으로 인정받으며, 그리하여 영생에 들어가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

이 말씀은, 복음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원의 길임을 보여줍니다. 구원은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고, 종교적인 수행이나 선을 많이 쌓음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유일하신 구세주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유일하신 주님이시며, 유일하신 구세주로 믿을 것을 요구합니다. 구원 받는 믿음이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구세주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왜 예수 그리스도만 믿어야 구원을 받느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이런 반대 논리를 폅니다.

“산 정상에 올라가는 길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동서남북 어디로 올라가든지 정상에 다다르면 될 것이 아니냐?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도 구원의 길은 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인간적인 생각이요 논리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 것은 구원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구원의 방법도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종교다원주의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7)…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리스도인이 미움 받는 이유

세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인해 사람들의 미움을 받을 때 “18)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도 이슬람교도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고 죽이려 합니다. 이번에 탈레반은 샘물교회 소속 봉사단원들을 억류하고 그 중 두 사람을 죽였습니다. 먼 곳에서 자비량하고 아프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그곳에 간 사람들을 환대하지는 못할망정 납치하고 총으로 쏘아 죽이다니, 인간 이하의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탈레반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입니다.

탈레반은 한국인 봉사대원을 죽인 이유로 그들이 선교를 하러 왔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슬람교도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포교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은 한국에 와서 자유롭게 선교할 권리가 있고,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에서 선교할 권리가 없다는 논리는 모순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현실을 무시하고 이슬람권에 가서 공격적인 선교를 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선교는 현지 사정을 감안해서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를 위해 파송하시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하려는 말씀의 요지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고 손해를 보더라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이슬람교도가 아닌데도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가 악을 행하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괜히 기독교를 미워합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미워합니다. 그러나 그 미움의 근본을 찾아 들어가면 그들이 그리스도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차별 없는 구원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은 온갖 차별로 가득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복음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자유자나 종이나 남자나 여자나 어른이나 아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에 관한 성경 말씀을 몇 곳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5절로 16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15)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선민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죄인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10장 9절로 13절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님과 나란히 십자가에 달렸던 두 강도 중 한 사람이 곁에서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다가 은혜를 받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 강도는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이 강도는 감히 자기를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말할 염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만 그를 생각해 달라고 부탁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완전한 구원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처럼 구원은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받습니다.

진실한 믿음을 가져야

그런데 한 가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진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믿는 동기가 올발라야 합니다. 가룟 유다를 보세요.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열심히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돈궤를 맡아서 관리할 정도로 똑똑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주님을 따라다니는 동기가 진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유대의 왕이 되실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면 나중에 한 자리 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임금이 되실 생각은 추호도 없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라고 하시자,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오늘날도 자기의 의도에 맞으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맞지 않으면 배반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믿음은 처음부터 진실하지 못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간혹 보면, 과거에 잘 믿은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거에 잘 믿은 것도 중요하지만, 과거의 믿음을 인정받으려면 그 믿음이 현재까지 지속되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잘 믿었는데 지금은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과거에 가졌던 그들의 믿음이 거짓된 것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 과거의 믿음으로 구원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현재의 믿음은 미래에도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진실한 믿음을 가져야 하고, 그 믿음이 오늘 뿐 아니라 내일도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중도에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보면, 이 농부는 씨를 차별 없이 뿌렸습니다. 길 가에도, 돌밭에도, 가시떨기가 자리는 곳에도, 좋은 땅에도 뿌렸습니다. 길 가에 뿌려진 씨앗은 싹이 나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곧 싹이 나왔으나 흙이 깊지 않아서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여 해 빛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싹이 나서 자라긴 했는데 가시떨기가 자라서 기운을 막아서 결실을 하지 못했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만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네 종류의 밭은 복음을 듣는 네 종류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첫째로,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그 사람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이 그 마음에 심기기도 전에 마귀의 방해를 받아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을 말합니다.

둘째로,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를 말합니다. 이 사람은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갖기 시작했으나 그만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자 겁을 먹고 믿기를 포기했습니다. 이런 사람 역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셋째로,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를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한 동안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기도 하고, 열심을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여러 가지 유혹 특히 돈에 대한 유혹에 넘어가서 신앙을 포기하고 맙니다. 이런 사람 역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넷째로,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결실을 하는 자를 말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핍박이나 환난이 없거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따위가 없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 같은 시험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 모든 시험을 이겨내고 주님을 끝까지 믿고 따랐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기로 작정한 사람은 많은데 끝까지 믿음을 지켜나가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3장에서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12)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13)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14)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 3장)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믿는 이후에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하신 말씀과 같이 주님을 믿는데 힘쓰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냐 나는 구원 받은 것으로 만족한다. 더 이상 주님을 섬기느라 열심내고 힘쓸 생각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은 기차표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중세에 천주교는 면죄부라는 천국행 티켓을 팔았습니다. 면죄부를 산 사람들은 이제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는 해결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문에서 면죄부는 휴지조각에 불과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천국행 기차표를 손에 넣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천국행 기차표란 없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손을 잡고 천국까지 동행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려면 핍박과 손해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때에 성도님들께서는 이 같은 말씀을 기억하시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나가시기 바랍니다. “11)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우리는 미쁨이 없을찌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

우리가 주님을 잘 섬기려고 힘쓰고 애쓸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 큰 믿음을 주십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 13:12)

너무 냉정한 말씀처럼 들리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농부가 봄에 씨를 많이 뿌려야 가을에 많은 곡식을 거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섬기기 위해 수고하고 힘쓰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은혜를 더 받습니다. 반면에, 신앙생활에 나태하면 기왕에 받은 은혜조차 간직하지 못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우리의 분발을 격려하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24)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

“1)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

우리가 힘쓰고 애쓸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히 보시고 우리가 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갈 수 있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고전 1:8)

처음부터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부터 믿음의 담대함을 발휘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갓난아기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 쉼 없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가 고의적으로 주님을 배반하고 떠나지 않는 한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 주십니다.

우리의 구원이 확실한 것은 우리 자신에게 그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신실하신 하나님께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하신 빌립보서 1장 6절 말씀이 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같이 보장하셨습니다.

“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28)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


맺는 말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이 같은 주님의 약속과 더불어 우리가 할 몫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불순종하고 나태하고 게으른데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한 성경 말씀이 어디 있는지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약속은 우리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양처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주님을 섬길 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부족하고 결함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지켜주시며 우리의 구원을 책임져 주신다는 뜻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이 설교를 경청하신 성도님 마다 진실한 믿음, 구원 얻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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