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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의 근원으로서의 삶 (창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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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제목 : 복의 근원으로서의 삶
+ 설교본문 : 창세기 12장 1 - 9절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은혜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잘 섬겼던 것은 아닙니다. 그가 갈대아 우르 지방에 살 때 그의 집은 우상을 숭배하는 집이었습니다(24:3).

2절에 보면 하나님은 그렇게 우상숭배에 깊이 젖어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말씀하셨는데, 개역 성경에서는 그냥 ‘복’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복의 근원’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상 단지 속에서 살던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들에게도 임했습니다. 우상 숭배에 깊이 젖어 있던 아브람을 부르셔서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신 하나님은 죄와 사망 가운데 있던 우리들을 부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에 이르게 하셔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주셨습니다.

갈 3:13, 14에 보면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으신 이유 세 가지가 나옵니다. 그 중에 두 번째가 이방인인 우리들이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들에게도 주어진 약속입니다.

그럼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면서 우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큰 민족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갈데아 우르에서 뽑아낸 아브라함을 통해서 경건한 민족 하나님만을 섬기는 민족을 만드시겠다는 꿈을 가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신 때는 홍수 심판이 있은 지 365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이 때는 노아의 후손들이 열국 백성으로 나뉘어졌으며, 왕들의 권력은 절대화되었습니다(창 10:32; 12:15). 약소국들은 강대국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잔인하게 보복을 당했습니다(창 14:1-12).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창 19:14). 이처럼 그 시대는 도덕적 타락, 전쟁의 공포, 물질과 우상숭배, 영적 무지로 가득 찬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한 사람을 부르시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 을 섬기는 큰 민족을 만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꿈을 가지고 계십니다. 죄와 사망 가운데 있던 우리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시고 우리를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게 하셔서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큰 민족이 될 만한 능력이 없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는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신체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사라의 몸에서 이삭이 나오게 하시고 이삭을 통해서 야곱이 태어나게 하셨으며 야곱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세워지게 하셨고 결국은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영적인 무능력 때문에 영적인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삭이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은 우리들을 통해서도 많은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와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시는 분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고상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데라는 아브람이 고상한 아버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가지고 그런 이름을 지어 준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자식을 낳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브람의 이름을 창대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창 17:5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개명해 주셨습니다. 이는 ‘열국의 아비’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대로 아브람의 이름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동일한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브라함이 가진 능력이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하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역사하셔서 그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역사하셔서 우리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실 것입니다. 사 60:22에 보면 “그 작은 자가 천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하는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역사하셔서 우리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실 것입니다.

셋째, “너는 복이 될지라”라는 말씀을 통해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대통령 아들이 존귀한 것은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대통령의 아들이기 때문에 존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의 근원이 되고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었기 때문에 그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는 것이고 그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복의 근원이 되었기 때문에 나를 축복하는 자들은 복을 받을 것이고 나를 저주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확증하는 증거를 역사에서 몇 가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독일을 하나님의 복음이 강대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히틀러가 교회를 핍박하고 유대인을 핍박했기 때문에 독일이 히틀러와 함께 망했습니다.

냉전 시대에 소련의 3대 기적이 있습니다. 나무는 많은데 종이가 없었고, 원유는 많은데 휘발유가 없었고, 땅은 넓은데 식량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습니까? 공산혁명을 일으킨 후 아브라함 후손들인 유대인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이스라엘인 교회를 파괴하고 주의 종들을 시베리아로 유배시켰습니다. 그래서 그 땅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고 그 땅에는 하나님의 축복의 문이 닫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똑같은 한반도 땅이지만 남한 땅과 북한 땅은 완전히 다릅니다. 남쪽은 자유가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북쪽은 공산당 때문에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그 결과 남쪽은 땅이 기름지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북쪽은 땅이 황무하게 되었고 해마다 흉년들어 온 세계에 손을 내밀고 구걸해야 하는 굶주린 땅이 되었습니다. 분단 60년 동안 북한은 못 먹고 굶주려서 남쪽 사람들과 키가 무려 20cm나 차이가 난답니다. 주의 백성들을 저주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복이라는 말이 310회 나오는데 창세기에서 88회가 나옵니다. 그만 큼 창세기에 계시된 하나님은 사람들이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이 복을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함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는 열심을 통해서 창세기 보다 더 강력하게 표현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대로 복의 근원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오늘 말씀은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해서 표현된 복의 근원으로서 삶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의 근원으로 승리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1. 분리 된 삶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제일 먼저 분리를 요구하셨습니다. 1절에 보면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대가족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대가족하면 7~8명 많으면 10명 정도를 생각하는데 그 정도가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보통 몇 대가 함께 모여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결혼을 하면 다른 지역으로 살림을 내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집 옆에 붙여서 집을 지어줍니다. 다른 아들이 장가를 가도 역시 아버지 집 옆에다가 집을 붙여서 지어줍니다. 몇 대가 함께 살면서 이런 식으로 분가를 시키다보니 아무리 숫자가 적은 집도 100~200명은 되었고, 많으면 500명~600명씩 아니 그 이상도 외었습니다. 그리고 집마다 섬기는 신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집안에 머물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아랍사람들은 이런 가족제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사는 아랍 사람들은 건드리기가 무섭다고 합니다. 결혼을 한 사람들은 부부별로 방을 따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결혼하지 않은 자녀들은 넓은 홀 같은 방에서 남자는 남자끼리 생활하고 여자는 여자끼리 생활을 합니다. 몇 십 명이 한 방에서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서 동생이 밖에서 매를 맞고 집에 들어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방에 있는 형제들이 코피 흘리고 들어오는 동생을 보고는 누가 그랬는지 묻고 뛰어나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날 동생을 때린 아이는 끝장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집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집은 우상을 섬기는 집인데 어느 날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한다면 큰 할아버지, 작은 할아버지, 큰 아버지, 아버지, 작은 아버지, 삼촌, 숙모, 첫째형, 둘째형, 셋째형...등등 모든 사람들이 가만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그 당시 사람들은 공동체를 허는 사람을 원수로 생각했으니 자기들이 믿는 신을 배신하고 여호와를 섬긴다는 아브라함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에 머물러서는 도저히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며칠 전 국민일보(2007년 9월 4일)에 실린 기사 가운데 아프카니스탄 타지크족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들은 99%가 무슬림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기독교로 개종을 하면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실렸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의 분위기가 그랬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분리의 삶을 현대적으로 적용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의미는 그리스도인은 생활 속에서 세상을 선택하지 말고 하나님을 선택하라는 뜻입니다.

대하 7:14절에 보면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 중에 첫 번째는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셨던 분리의 삶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엡 4:22∼24절에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믿기 전에 살았던 삶의 방식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리스도인으로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으로 사는 것은 떠날 곳은 떠나고 버릴 것은 버리는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봅시다. 나는 떠날 곳은 떠났는가? 나는 버릴 것은 버렸는가? 아직도 머물러 있고 아직도 붙잡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떠나야 한다면 떠나십시오. 버려야 한다면 버리십시오. 그것이 분리의 삶입니다.


2. 목적 있는 삶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을 때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을 받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우르에서 가나안까지는 정서쪽으로 1,200km 정도를 가야 합니다. 그런데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사이에 아라비아 사막이 있습니다. 그래서 북서쪽으로 약 1,200km 올라가서 도착한 곳이 하란입니다. 하란은 우르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르와 같은 문화권에 있는 지역이었고, 우르와 똑같이 달 신(神)인 신(Sin)이라는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11:31에 보면 가나안을 향해서 가던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거류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거류했다는 말의 원어를 살펴보면 잠시 머무른 것이 아니고 아예 거기서 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목적하신 곳인 가나안까지 가야 하는데 목적한 곳이 아닌 하란에서 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다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가나안 땅으로 가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으로 사는데 두 번째 요구 조건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땅, 하나님의 목적지인 가나안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복의 근원이 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목적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완전한 축복은 하나님의 비전에 있다.”고 했습니다. 완전한 축복은 내가 목적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고, 내가 만들어낸 비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사는 것이 완전한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나를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충남 부여에서 한 교회 장로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을 간증했습니다. 장로님은 포도 농사를 지었는데 그 포도나무들 중에서 한 나무를 정해 놓고 “이 포도나무는 하나님 것입니다. 여기서 열리는 포도는 교회에 바쳐서 성찬식을 하겠습니다. 이 포도나무는 성찬식 하는 포도나무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드릴 포도나무를 정해놓고 포도농사를 시작했는데 얼마나 포도농사가 잘 되는지 풍작일 뿐 아니라, 질도 좋아서 포도농사로 아주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TV에 출연하게 되고, 일본 연수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린다고 정해놓았던 그 포도나무 한 그루 때문에 온 포도원이 다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장로님은 수박농사도 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교회 가기 전에 수박밭을 돌아보니 수박 꽃이 만발하였습니다. 이럴 때 인공수정을 시켜야 하는데 교회는 가야 되겠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장로님은 집사 시절에 “나는 꼭 주일을 잘 지키겠다.”고 선포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장로가 되었으니 ‘성도들에게, 제직들에게 더욱 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게다가 주일 학교에 가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장로님은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수박농사를 망친다 하더라도 먼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내 사명을 감당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수박은 하나님께 맡기고 교회로 갔습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부랴부랴 수박밭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수박밭에 웬 개미떼가 그렇게 많은지 사방이 다 개미떼였습니다. 동태를 가만히 살펴보니 개미가 수박 꽃에 붙어서 수정을 시켜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먼저 예배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개미를 통해서 수정시켜주시고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수박농사, 포도농사가 모두 다 잘 되니 여기저기서 강의 요청이 오고, TV, 라디오에도 출연하고, 300개 이상의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간증하게 되었습니다. 이 장로님은 자신의 목적이 아닌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살다가 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3. 나눔의 삶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복의 통로로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3절에 “땅의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도 아브라함처럼 복의 통로로 하나님의 복을 나누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미국에 존즈 홉킨스 대학이 있습니다. 이 유명한 대학의 한 젊은 사회학 교수가 대학원 학생을 동원하여 지역 사회를 조사 연구하였습니다. 미국에서도 가장 열악한 환경을 가지고 있는 뉴욕의 빈민굴에서 12세에서 16세까지의 청소년 200명을 조사했습니다. 그의 부모님들이 거의 마약을 하고 있고, 폭력배나 다름없었습니다. 그 동네는 윤락가였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었습니다. 사회학과 학생들과 교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들 청소년들은 90% 정도는 훗날 범죄자가 되어 형무소를 제 집 같이 드나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노교수는 은퇴를 앞두고 서재를 정리하다가 옛날 대학원생들과 환경 조사하여 발표했던 글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때 만났던 아이들의 이름과 주소며 설문 내용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학문적인 호기심이 발동하였습니다. 대학원생을 동원하여 당시에 설문에 응했던 그 아이들을 다시 찾아보기로 하였습니다. 미국 전역을 뒤져 200명 중에 180명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 일입니까? 단 4명만이 단 한번 감옥에 간 적이 있었고 모든 사람이 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예상을 뒤엎는 일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교수님은 그들을 만나 어떻게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성공할 수 있었는지 심도 있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같은 공통적인 말을 하는데, 자기 동네에 한 여전도사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여전도사님이 자기들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20년 전 한 여자 전도인이 자기들이 사는 동네에 들어와 주일학교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 여전도사님이 전한 복음의 능력으로 빈민가의 젊은이들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한 여인이 복음을 나눔으로 한 지역의 젊은이들의 미래가 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삶이 이런 것입니다. 내 속에 주어진 복음, 나를 변화시킨 복음, 내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그 복음을 전하는 것이 복의 근원이 되는 사람들의 삶이어야 합니다.


4. 예배의 삶

7절에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고 8절에서도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은 것은 현대적인 의미로 살펴보면 예배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드린 제사는 환경이 좋기 때문에 드린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그곳 사람들에게 환영 받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했습니다. 계속해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내 집 장만을 못하고 이사 다니는 것을 힘들게 생각하는데 아브라함은 그보다 더 힘든 생활을 했습니다. 그 당시는 힘이 지배했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가족을 이루고 모여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전혀 생소한 땅에 가서 나그네처럼 지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에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뉴욕에 가면 허드슨 강이 있는데 그 강의 하류에 가면 쏠트라인이 있습니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소금물과 상류에서 내려오는 민물이 만나는 선을 말합니다. 날이 가물어서 강물이 약해지면 바닷물이 역류해서 허드슨 강으로 올라옵니다. 그러면 식수를 공급하는 수원지에 위협을 받게 됩니다. 비가 적당히 내려서 어느 정도 물이 계속 흐르게 되면 결국 민물이 바닷물의 세력을 계속 밀어내어 수원지가 안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허드슨강의 쏠트라인은 끊임없이 당기고 미는 일이 반복됩니다. 이와 같은 일은 우리 인생살이, 신앙생활에도 있습니다. 영력이 강하면 유혹을 물리칠 수 있지만, 영력이 약해지면 자신도 모르게 밀려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쏠트라인을 지키는 힘은 예배였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예배를 드렸고 그 힘으로 세상을 이겼으며 복의 근원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예배는 영적인 충전을 받는 시간입니다. 자동차는 기름이 떨어지면 움직일 수 없습니다. 기름이 떨어져서 움직이지 못하는 자동차에 기름을 넣으면 다시 움직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배는 영적인 충전의 시간입니다. 예배가 약해지면 영적으로 무기력해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식어지고, 교회사랑도 식어집니다. 사랑하고 싶어도 안 됩니다. 예배가 회복되면 달라집니다. 예배가 회복되면 새 힘이 넘칩니다. 예배가 회복되면 하님을 사랑하게 되고, 교회생활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많은 일들을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 예배입니다. 예배가 죽은 신자는 신앙생활의 모든 부분이 살아있는 듯하지만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지금은 다른 부분이 살아있는 듯 보여도 곧 모든 것이 죽게 될 것입니다. 예배가 살아 있는 사람은 다른 부분도 다 살아납니다. 지금은 죽은 듯이 보여도 곧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산세베리아를 키우다 보면 물을 주지 않아서 혹은 너무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해서 축 늘어져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물을 주거나 햇빛을 쪼여주면 곧 축 늘어진 줄기가 일어서게 되고 생생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잘 드리게 되면 우리의 영혼과 육체와 생활에 생기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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