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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포도원 주인과 품꾼의 비유 (마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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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 주인과 품꾼의 비유
마태복음 20:1-16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 보내고 (3) 또 제 삼 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5) 제 육 시와 제 구 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7)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천국 비유입니다. 그 제목을 ‘포도원 주인의 비유’라 할 수 도 있고, ‘포도원 품꾼의 비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두 제목 중 어느 하나를 택해도 무방하리만치 주인 입장과 품꾼 입장이 뚜렷하게 대비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주인의 태도가 파격적이라는 것입니다.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포도 수확철이 되었습니다. 주인은 이른 아침 장터에 나가 품꾼들을 모았습니다. 그들과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 하고 포도 수확하는 일을 시켰습니다. 주인은 일꾼이 모자랐던지 제 삼시에 또 장터로 나갑니다. 유대인들은 해 뜰 때부터 시간을 계산하기 시작하니까 아마 오전 9시쯤 되었을 것입니다. 주인은 이때뿐만 아니라 6시 곧 12시, 9시 곧 오후 3시에도 나가서 품꾼들을 데려옵니다. 여기까지는 그런 대로 이해할 수 있는데 주인은 제11시 곧 오후 5시가 되어서도 품꾼을 찾아 장터로 나갑니다. 이들을 데려온다 할지라도 왕복시간 빼고 잘해야 1시간 밖에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마저 데려다 일을 시킵니다. 주인이 보인 이런 행동에 대해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 포도 수확이 급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다 수확해야 하는 농사상의 절박한 이유입니다. 이것도 그런 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해가 저물 무렵 품삯을 지불할 때 벌어졌습니다. 주인은 가장 늦게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품꾼부터 품삯을 주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웬 일입니까? 그들에게 하루 일당인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그러자 가장 먼저부터 와서 종일 일했던 품꾼들은 기대감을 갖기 시작합니다.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품꾼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었으니 자기들에게는 보너스로 더 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들에게도 원래 계약대로 한 데나리온만 줍니다. 이에 분노한 처음 품꾼들이 주인에게 불평을 털어놓습니다. 그렇지만 주인은 자기는 잘못한 일 없다. 오히려 선한 나를 악한 사람으로 내몬다고 그들을 책망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이 주인이 보인 태도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 시간 밖에 일할 수 없는 자들을 고용하지를 않나, 12시간 일한 자나 1시간 일한 자나 동일한 임금을 주질 않나....... 아마 우리 사회 같으면 먼저 언론이 이 기업주의 태도를 비판했을 것입니다. “무노동 무임금의 원칙 위배, 경제 정의를 무너뜨리다”와 같은 제목 기사가 1면을 장식 했을 것입니다. 노동자들은 “부당노동 행위”라며 띠를 매고 파업하거나 데모할 수도 있습니다. 지식인들은 “국가경쟁력과 노동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행위, 그러면 누가 열심히 일하겠는가!”하며 비판의 칼을 사정없이 휘두를 것입니다.

그렇지만 포도원 주인은 이런 비판에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15절 말씀에서 주인은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고 책망을 합니다. 사실 냉정히 따지면 그렇습니다. 이른 시각에 고용한 사람과 주인은 분명히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을 했기에 불의하게 행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인은 오후 다섯 시가 되도록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실업자를 구제해 주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에게 덤으로 자기 노동량을 훨씬 뛰어넘는 임금을 지불하는 선을 행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더하여 1절에서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라고 함으로써 이 비유가 천국의 실상을 드러내는 비유라고 규정합니다. 우리 상식으로 말씀을 바꾸거나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말씀 앞에 우리 잘못된 생각들을 바꾸어야 합니다. 시대는 변하지만 말씀은 영원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천국의 실상은 어떠한지 주인과 품꾼의 태도를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포도원 주인의 마음 1 : 찾음

먼저 포도원 주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포도원 주인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왜 주인은 이른 아침부터, 삼시, 육시, 구시 심지어 해가 질 무렵인 십일 시까지 일꾼을 찾아 나섰겠습니까? 포도원 일이 급했을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더 이 축제의 자리에 초대하기를 원해서였다고 생각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제11시에 나갔을 때 거기 서 있던 사람들과 주인이 대화를 나눕니다. 주인이 묻습니다.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서 있느냐?” 품꾼들이 대답합니다.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해질 무렵에 품꾼들을 찾아 나선 주인도 대단하지만 그때까지 인력시장을 해매고 있는 품꾼들도 대단합니다. 당시의 실업상태가 얼마나 심각했었나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이들은 아마 너무도 가난하여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 했던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해질 때까지 어떻게든 일자리를 구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인은 이들의 곤고함과 어려움을 알고 이들에게 하루 벌이를 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그렇듯 우리 하나님은 은혜의 축제에 사람들을 초청하기 위하여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부지런히 사람을 찾으러 다니시는 분입니다. 하나님 앞에 늦은 인생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제 다 끝났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해질 무렵에도 사람을 찾아 나섭니다. 여러분은 몇 시 인생들입니까? 이른 아침 인생, 세시 인생, 여섯 시 인생, 아홉 시 인생, 열한 시 인생, 아니면 열두 시 오 분전 인생? 하나님 앞에 늦은 때는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그의 나이 75세에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모세의 하나님은 그의 나이 80세에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함께 달렸던 강도는 죽음 일보 직전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요 근래 한국의 대표적인 수필가이자 문화부장관을 지냈던 이어령 씨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것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딸과 손자의 질병과 치유과정을 보며 인간의 무력함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이어령 씨의 나이 75세입니다. 뒤늦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어령 씨는 그 심정을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제 딸 민아는 암과 시력 장애 그리고 아이의 문제를 모두 신앙심으로 극복했지요. 간단하게 말하면 혈육의 아버지의 힘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이 고쳐주신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내 딸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나의 지식과 돈이 너를 구하지 못했다. 정말 네가 주 안에서 편안함을 얻었다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면 나도 나의 무력이 증명된 것이 아니냐. 내가 이 무력함에 매달려 지금까지 살았구나. 같이 동행하자. 지금 자신은 없지만 네가 시력을 잃어가면서 본 빛을 나에도 보이게 해달라’라고 말이지요.”

나이 들어가면서도 인간의 무력함을 느끼지 못하거나,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에 자기 인생을 맡겨 드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직 인생을 모르는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이어령 씨는 이성과 지성 너머에 있는 신의 존재를 깨닫고 그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늦은 나이에 부르심을 받았기에 그 사랑의 깊이는 이른 시간에 부름 받은 사람들보다 더할 것입니다. 해질 무렵에 부름 받은 11시 인생이 주인에게 느꼈던 감사와 고마움은 말하지 않더라도 능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하네스 쉐플러라는 사람은 늦은 나이에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에 대해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 슬프도다. 최상의 것으로 드려 마땅한 당신!
당신을 나는 그렇게 늦게서야 알게 되었네.
당신을 보기 위해 몸을 돌리자마자
가장 진실한 선과 오로지 안식만이 (거기 있었네)!
내가 당신을 사랑할수록
내가 이전에도 사랑하지 못했음을 더욱 슬퍼하네.

인생의 성공과 실패, 고난과 불가해함을 다 겪은 이후의 만남이기에 뒤늦은 만남이지만 그 만남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고, 그 시간은 결코 짧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단지 구원의 때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때는 또한 사명의 때이기도 합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이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자기 인생에서 자기 달란트와 사명을 성취하는 때입니다. 세상에서 자기 이름을 내며 영향력을 미치며 사는 보람을 느끼는 때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런 날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인생에 대해 실망하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다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만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부름의 때가 있고 그 때가 되면 우리 인생에 꽃이 피게 될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마음 2 : 사람 사랑

주인은 일이 끝나고 품삯을 계산하는 데 가장 늦게 들어온 일꾼들부터 주기 시작합니다. 이것도 주인의 배려입니다. 늦게 들어와서 일한 사람은 일찍부터 일한 사람들을 보며 얼마나 미안했을 것 같습니까? 주인에게도 죄송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주인은 이들의 속마음을 잘 알기에 먼저 품삯을 줍니다.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가 가장 많은 사랑을 받습니다. 품삯도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비록 그들이 일은 적게 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한 가정의 가장들입니다. 한 데나리온을 주어야 그들 가정이 먹고 삽니다. 경제적인 이치로는 맞지 않지만 천국의 이치로는 맞습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는 것이 초대 교회의 모습이고 천국의 모습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나 우리 삶이 바로 이처럼 사람의 마음과 그 사정을 살피는 사랑의 눈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경제적인 눈으로 평가하지 마십시오. 무엇보다 사람이 소중합니다. 천국은 가장 작고 무가치한 사람이 가장 높임을 받는 곳입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 때문에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는 산에 그대로 놔두고 찾아 나서는 불합리함이 바로 천국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계산하는 순간 사람을 잃고 사랑은 사라져 버립니다. 그 사람 자체보다는 그가 가진 효용성을 보기 시작합니다. 현대 사회는 너무 똑똑해서 각박해져 버렸습니다.

유대 탈무드에서는 이 비유를 약간 변형시켜 이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열한 시에 온 품꾼은 주인의 은혜가 고마워서 다른 사람이 하루 종일 일한 양보다 더 많은 양을 짧은 시간에 해치웠다고요. 물론 오늘날 그냥 막노동하는 사람과 고부가가치의 일을 하는 사람의 노동생산성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하루 5만원 어치의 일을 하는 사람도 있고 하루 수백 만, 수천 만 원 어치의 일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를 이렇게 해석하면 천국을 또 하나의 경제논리로 희생시키고 맙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들이 가진 비정한 마음을 책망하기 위해 일부러 이런 어리석어 보일 정도의 비유를 들어보이셨는지도 모릅니다.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은 사람을 경제성으로 따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 그대로 불쌍히 여길 뿐입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건 무능한 사람이건 모두가 잘 먹고 행복해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저는 이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런 은혜로 11시 막차를 탄 인생들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예수 믿는 우리도 세상에 나아가 이 포도원 주인처럼 살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정을 살피는 선한 마음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길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포도원 주인이 되셔서 세상에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십시오. 저는 신앙적인 기업이 바로 이런 기업이라 생각합니다. 목사가 교회의 목자이듯 기업주는 자기가 거느린 종업원들의 목자입니다. 신앙적 기업의 목표는 단순히 이윤 추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업주는 목자가 되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들을 어떻게 하면 안정되고 풍성히 먹일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합니다.

요즘 여전히 이랜드의 비정규직 노사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이랜드는 대표적인 기독교 기업입니다. 그들은 신앙적 양심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그 성과물을 사회에 구제와 복지기금으로 환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비정규직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 그동안 쌓아왔던 기업이미지를 크게 손상시키고 말았습니다. 이랜드가 너무 경제적 논리가 앞서 비정규직 문제를 가볍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포도원 주인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일자리와 관련된 문제는 결코 가볍게 취급할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에 대한 관심, 한 사람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관심은 하나님의 가장 핵심적인 사안입니다. 사람들에게 안정된 직장을 제공해주는 것만큼 큰 이웃사랑도 없습니다. 신앙인은 기업을 운영하든 아니면 조그만 구멍가게를 운영하든, 아니면 공무원이나 직원으로서 일하든 가장 중요시 여겨야 할 것은 사람입니다.

모 정수기 회사의 연간 매출액이 1조원을 넘는다고 합니다. 그곳은 ‘코디’라는 이름으로 종사하는 사람들이 1만 5천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코디 중 한 사람이 인터뷰 한 것을 보니 그들의 근로조건은 그리 좋지 못합니다. 대부분이 4대 보험 혜택, 퇴직금도 없는 특수고용 노동직입니다. 과중한 업무와 실적 부담 때문에 5년 이상을 버티는 사람이 채 10%도 되지 않습니다. 이 회사뿐만 아니라 현대 신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제는 당연해져 버린 풍속도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인들도 이런 추세를 따라가야 하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을 본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늘 나라이며, 하나님 말씀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고민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포도원 주인의 모습을 닮은 경영을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비극은 전혀 이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만약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려는 단 하나의 기업이라도 있다면 세상은 이미 많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방식대로 사람중심으로 기업을 경영하면 그 기업이 망할까요? 아닙니다. 종업원 중심의 경영을 하면 그들의 생산의욕이 더 높아질 수도 있습니다. 어렵다고 자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함께 나누자는 태도로 가면 그것이 기업에 대한 사랑과 긍지를 더 높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러다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는 의미 있는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가지고 적용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려는 마음입니다. 이런 시도들이 없기 때문에 교회는 많아지는데 사회는 전혀 바뀌지 않습니다.

먼저 된 자의 착각

이제는 관점을 바꾸어 포도원 품꾼의 입장을 생각해 봅시다. 일찍부터 일했던 품꾼은 예수님 비유의 주요한 주인공중 하나입니다. 그는 주인과 한 데나리온의 계약을 맺고 이른 아침부터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낮의 뜨거운 열기와 동풍을 무릎 쓰고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품삯을 계산하면서 발생했습니다. 주인이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자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자 일찍부터 일했던 이 사람들은 은근한 기대가 생겼습니다. 좀 더 주겠지 하는 기대였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종일 수고한 자기에게도 동일한 한 데나리온만 줍니다. 이에 분노한 이 품꾼들은 주인에게 항의하러 갑니다. 12절입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이들은 ‘주인님’이나 또는 ‘주여’라는 호칭도 부르지 않고 다짜고짜 불만을 토로합니다.

이 사람들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첫째 주인을 부당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주인은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 이상으로 더 주면 감사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인은 선합니다. 우리가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도 선하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합당한 달란트와 합당한 때와 합당한 운명을 주셨다고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불공평하게 취급하며 불의하게 이끌어 간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합당한 분량을 주셨습니다.

아마 문제는 갑자기 우리 인생에 끼어든 존재가 우리보다 더 큰 사랑을 받고 있다는 비교의식, 질투심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에 마음에 평화가 없고, 불평이 가득합니다. 나는 열심히 노력했는데 빈둥빈둥 놀던 친구는 부자 신랑 만나서 갑자기 신세가 바뀌는 것을 보면 도무지 견딜 수 없습니다. 내가 실력이 뛰어난 것 같은데 형편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갈 때 우리는 견딜 수 없습니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이 비교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비교의식을 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마저도 불의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스스로 비참하게 만들고 말 것입니다.

이런 비교의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처방은 한 번 그 사람과 자신의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질투하는 그 사람의 인생과 당신의 인생을 바꾸겠습니까?” 하면 선뜻 그렇게 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사람은 부를 움켜쥐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대신 우리가 알 수 없는 다른 고민과 불안감을 가지고 있을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좋은 모습만 부러워하지 그가 가진 고민은 보려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한 가지를 취하면 다른 한 가지를 잃어버립니다. 예컨대 부자는 물건을 사는 기쁨이 없습니다. 돈이 많으니까 집도, 고급 물건도 별 고민 없이 덜석 삽니다. 그러나 돈이 부족한 사람은 새로운 것을 장만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전세방에서 출발하여 작지만 자기 집을 사고, 또 그 작은 집에서 더 넓은 평수로 늘려가는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좀 더 싼 물건을 구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시간을 보내고, 이곳저곳 발품을 파는 수고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물건을 구입했기 그 기쁨은 오래 갑니다.

사실 우리가 부러워하는 것들은 허상입니다. 그 사람이 가진 좋은 것만 보고 그 뒤에 있는 눈물은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가진 부와 명예를 보실 뿐만 아니라 그가 가진 밤의 외로움과 고민을 보십니다. 그가 세상에 취해 더 영원한 것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가지고 지켜보고 계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공평하고 선하십니다. 그것을 믿으십시오.

또 세 번째로 이 사람이 불행한 것은 그가 진정한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기쁨은 노동 자체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일하는 이유가 돈 버는 데 있기에 품삯은 분명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품삯이 다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우리 인생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결과만 얻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과정 자체가 의미 있습니다. ‘내가 오래 참고, 내가 매 맞고, 내가 헌신하고, 내가 봉사했으니까 하늘나라 가서 그에 대한 대가를 주시오’ 하는 태도로 사는 인생은 불행합니다. 이미 은혜는 이 땅에서 맛보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입니다. 정상에 오르지 못하거나 결과를 얻지 못하면 그 동안의 모든 수고를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자기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녀를 기르는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잘 길러 노년에 무슨 덕을 보기 위해서 그런 것 아닙니다. 자녀를 기르는 것 자체가 목적이고 행복입니다. 우리는 지금 개척교회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수고하여 큰 교회를 이루어야 그 수고한 대가가 주어지는 것인가? 아닙니다. 지금이 행복입니다. 지금 만족해야 합니다.

어떤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 가지 질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가장 소중한가?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그리고 가장 소중한 때는 언제인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속시원 하게 대답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이 왕이 변장을 하고 민정시찰을 나갔다가 어느 민가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피투성이가 된 어떤 사람이 이 집에 뛰어들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주인은 그 사람을 숨겨주고는 연이어 쫓아온 병사들에 그 사람의 행방을 모르겠다고 하며 돌려보냈습니다.

이튿날 왕은 의아해서 그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어째서 그 사람을 숨겨주었소. 당신은 자칫 화를 당할 수도 있는데. 더구나 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지 않소!” 그러자 주인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내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당장 그 일을 실행에 옮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지금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은 바로 내 앞에 있는 사람입니다. 가장 소중한 일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고,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주님은 비유의 결론으로 16절에서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이 비유는 먼저 되었던 유대인들보다 나중에 온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비유는 교회 공동체를 향하여서는 내가 신앙을 먼저 시작하고, 내가 헌신을 많이 했기 때문에 기득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우리에게 기득권은 없습니다. 순서도 없습니다. 항상 낮은 자의 자리에 위치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주권 앞에 겸허히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11시에 부름 받은 인생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자격 없는 사람을 부르시고 넘치도록 축복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만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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