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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욥 34:16~19, 행 2: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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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해 전 장로회신학대학교 사경회의 강사로 간 적이 있었습니다. 학생회 간부가 사회를 하면서 제가 설교할 시간이 되었는데 “이제 이성희목사님 나오셔서 하나님 말씀을 배달하시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회자의 말을 듣고 학생들이 한바탕 웃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확하게 말한 것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달하는 사람입니다. 설교도 내용과 전달(delivery)이 있는데 설교자는 배달꾼인 것입니다.

  배달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는 배달사고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중간에서 떼먹지 말고 보태지도 말라는 말입니다. 때로는 설교자가 해야 할 말도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하지 말아야 할 말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도 설교 시간에 반복되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듣기 싫지만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반복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사유가 있습니다. 오래 전에 어느 책에서 코카콜라 회장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습니다. 기자들이 “코카콜라는 세계적인 기업이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텐데 왜 그렇게 광고를 많이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회장은 아주 간결하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코카콜라를 모르는 아기들이 태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은 최근에 등록하여 아직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분들을 위한 말씀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배달꾼에게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주시는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달하는 것이지 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말을 잘 하는 시간 아니라 말을 잘 듣는 시간입니다. 배달꾼인 설교자가 먼저 귀를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지난 주간에 세계적인 테너이며 천상의 소리라고 하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타계했습니다. 그는 한 때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스리 테너’로 세계를 호령하던 성악가입니다. 오래 전에는 파바로티가 악보를 볼 줄 모른다는 풍문이 있었습니다. 그는 천재적인 음악성이 있어서 한번 들으면 따라할 정도로 청음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가 악보를 볼 줄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노래를 한다는 것은 우선 듣기를 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듣지 못하면 노래를 하지도 못합니다.

  CNN의 토크쇼의 황제라고 하는 래리 킹은 ‘대화의 법칙’이란 책에서 대화의 첫째 규칙은 듣는 것이라고 합니다. 말을 하고 있을 때는 아무 것도 배울 수 없습니다. 훌륭한 화자 되기 위해서는 먼저 훌륭한 청자가 되어야 합니다. 듣는 것은 가장 쉬울 것 같지만 가장 어렵습니다.

  인간은 시(視), 청(聽), 후(嗅), 미(味), 촉(觸)의 다섯 가지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감각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감각이 청각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감각이란 가장 쉬운 것 같으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듣는 것은 가장 쉽지만 잘 듣는 것은 가장 어렵습니다.

  사람은 하루 생활의 9%를 글쓰기에 소비합니다. 16%를 읽기에 소비합니다. 30%를 말하기에 소비합니다. 그리고 45%를 듣기에 소비합니다. 듣는다는 것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모릅니다. 보통 사람들은 1분에 약 180개의 단어를 말합니다. 그리고 300-500개의 단어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듣는 것은 본능적인 능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어려운 일입니다.

  로마서 10:17에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합니다. 듣는 것은 믿음의 기초입니다. 믿음의 결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학자 폴 틸리히는 “사람의 첫 번째 모습은 경청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잘 듣는 사람은 공부를 잘 합니다. 믿음이 성장합니다.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랍비의 말을 경청하고 함께 대화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경청의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말을 너무 많이 한다는 비난은 있지만 너무 많이 듣는다는 비난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고 혹자는 말했습니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할 수 있지만, 말을 많이 들으면 절대로 실수하지 않습니다. 터키 속담에는 “말하는 것은 씨를 뿌리는 것이고, 듣는 것은 수확을 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말을 많이 듣고 풍성한 수확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도 말을 많이 하는 것이 되지 말고, 말을 많이 듣는 것이 되게 하십시오. 말을 많이 하는 기도가 성취되는 기도가 아니라 듣는 기도가 성취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는 것에 익숙하고 듣는 것에 미숙한 우리들입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 듣지 않는 세대에게 하나님은 “내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지혜로운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첫째, 총명이 있는 자가 귀를 기울입니다.

  16절에는 “만일 네가 총명이 있거든 이것을 들으며 내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합니다. 들을 줄 아는 것은 지혜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듣는 게 아닙니다. 아무나 듣는 지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조잘거림은 어릴 때부터 배우지만 듣는 것은 좀처럼 배우기 힘듭니다. 탈무드에도 “말을 많이 해서는 안 된다. 말하는 것의 두 배는 듣도록 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귀는 둘이 있습니다. 눈도 둘이 있습니다. 그런데 입은 하나입니다. 이것은 두 번 보고, 두 번 듣고, 한 번 말하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 번 보고, 한 번 듣고, 수십 번 말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십니다. 요한계시록에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합니다. 귀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들을 줄 아는 자입니다. 들을 줄 아는 것이 총명입니다. 귀가 있다고 다 듣는 것이 아닙니다.

  영성가들은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고 합니다. 자연주의자들은 자연의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꽃이 피는 소리, 싹이 돋는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성 프랜시스는 새의 소리도 듣고, 새와 대화도 했다고 합니다. 신앙의 경지에 올라가게 되면 하나님의 소리도 들립니다. 영혼의 음성도 들립니다. 영혼의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법입니다.

  욥기 34:34에는 “슬기로운 자와 내 말을 듣는 지혜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총명한 자와 내 말을 듣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총명한 자는 말씀을 잘 듣는 자입니다. 외국어를 배울 때 보세요. 처음에는 듣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조금 들리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는 말하기가 힘듭니다. 듣기는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듣기가 처음에는 가장 힘듭니다. 그리고 듣게 되면 말하기가 힘들어집니다. 마음으로 듣는 것도 마찬가지로 가장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가장 힘든 것이 듣는 것입니다. 사람은 듣기만 해도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총명한 사람입니다.

  사무엘상서 15:22에는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듣는 것이 참 중요하고 좋은 일입니다. 듣는 것보다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영적인 사람의 표시는 설교하는 혀가 아니라 귀를 기울이는 마음입니다.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음성을 듣기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 합니다. 진정 총명이 있는 자는 자신에게 귀를 기울입니다.

  저는 장거리 여행을 할 때에 비행기를 타고 잠을 잘 잡니다. 보통 여섯 시간 정도는 잠을 자기 때문에 비행기에서 내려도 별로 피곤할 줄 모르고 여행을 합니다. 잠을 자야겠다고 생각하면 먼저 하는 것이 있습니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혹은 오르자마자 양치질을 합니다. 안대를 가지고 눈을 가립니다. 그리고 귀마개를 가지고 귀를 막습니다. 그러면 쉽게 잠에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귀를 막고 있으면 자신의 숨소리, 침 넘기는 소리, 심장 뛰는 소리가 얼마나 크게 들리는지 몰라요. 주위가 시끄러우면 자신의 말이 안 들립니다. 주위가 조용하면 자신의 숨소리까지 다 들립니다. 외부로부터의 소리를 막아야 내면의 소리가 잘 들립니다. 세상의 소리를 막아야 하나님의 소리를 잘 듣습니다. 없는 소리가 들리면 환청입니다. 들려야 할 소리가 안 들리면 난청입니다. 이 둘 다 병입니다.

  순종한다(obedient)라는 말은 ‘듣는다’는 뜻의 라틴어 단어 ‘audire’에서 나왔습니다. 귀를 기울이고 들려야 순종합니다. 이 말은 ‘귀를 기울이다’라는 뜻의 ‘옵 아우디레’(ob audire)에서 나왔습니다. 귀를 기울여야 순종하고 순종하는 것이 총명입니다. 이런 순종하는 총명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의 뜻이 보입니다.

  17절에 보면 귀를 기울이면 의롭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무엇입니까? 왕과 지도자를 바르게 판단하는 일입니다(18절). 하나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가난한 자와 부자를 차별하지 않으십니다(19절).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뜻은 귀를 기울이면 알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1:9에는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라고 합니다. 언제 뜻을 알게 하시나요? 신령한 지혜와 총명이 있을 때입니다. 지혜와 총명이 있으면 하나님의 뜻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11에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라고 합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특권의 허락과 불허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것과 기울이지 않는 것의 차이입니다. 마음을 열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이지 않는 차이입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납니까?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소리에 밝아서 세상적으로 판단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비켜 갑니다.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세상에 귀를 막으면 바르게 갑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사막의 교부들의 글을 모은 ‘깨우침’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에는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사막의 은자들은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대화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함께 하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수도사들은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애썼습니다. 그 결과 은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도사들의 방에는 여러 가지 하나님에 대한 그림과 글씨가 있다고 합니다. 눈을 크게 그려놓고 이것이 하나님의 눈이라고 생각하고 산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내 작은 행동까지도 보고 계시다고 느낍니다. 큰 귀를 그려 놓고 하나님의 귀라고 생각하고 늘 조심하며 삽니다. 하나님께서 내 모든 소리를 다 듣고 계시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Fiat voluntas tua’(당신의 뜻대로)라는 글을 써놓기도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의미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수도사들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이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귀를 주신 것은 양쪽의 말을 공평하게 들으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늘과 땅의 뜻을 함께 분별해야 합니다. 세상의 소리를 통하여 세상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눈과는 달리 귀에는 꺼풀이 없습니다. 늘 열려 있습니다. 늘 듣고 그때그때 주시는 뜻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6:14에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에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고 합니다. 루디아는 빌립보의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에 귀를 열어 잘 들은 여인이었습니다. 귀를 기울이면 따르게 됩니다. 귀를 열면 하나님의 뜻이 보입니다. 교회를 설립했던 지도자의 조건은 귀를 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리더는 책임지는 역할에서 귀 기울이는 역할로 바뀌어야 한다고 합니다. 리더는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귀를 기울이지 못하면 따르는 자를 알지 못하고 리드하지 못합니다.

  잠수함에는 창문이 없습니다. 밖을 내다볼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잠수함은 어떻게 항해합니까? 소리를 듣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잠수함은 수천 개의 감지기가 보내는 음향 데이터를 분석한 후에 음향 안내를 통해 앞으로 전진합니다. 눈을 감고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면 그 분의 뜻이 보입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진로가 보이고 힘이 생깁니다.
  “청각은 시각을 향상시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듣는 것이 보는 것을 결정합니다. 성경적 견지에서 볼 때에 비전은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리에 비전이 있습니다.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사람은 지도하기도 어렵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베드로와 열한사도들이 유대인들에게 설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들은 “귀를 기울이라”고 선포합니다.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설교입니다.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의 뜻이 보이고, 교회가 보이고, 교인도 보이고, 교회의 참된 모습이 보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춤추시는 하나님’에서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볼 수 있고 그 분을 더욱 충만하게 모셔 들일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귀를 쫑긋이 세우고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분별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결론

  벙어리장갑이란 장갑이 있습니다. 엄지손가락은 따로 끼우고 나머지 네 손가락은 함께 끼우는 장갑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이 장갑을 ‘벙어리’라고 부른 데는 불만이 있습니다. 청각장애인을 비하하는 듯합니다. 이름을 바꾸었으면 좋겠습니다. 벙어리란 말은 중세 고어로는 ‘버워리’랍니다. 이 말은 ‘버벅거린다’, ‘더듬다’는 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다섯 손가락의 장갑은 손가락 모두를 자유자제로 움직일 수 있지만, 벙어리장갑은 자유자재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답답하고 부자유한 것을 말합니다.

  듣지 못하는 것이 보지 못하는 것보다 더 불편하다고 합니다. 헬렌 켈러 여사는 삼중고의 고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보지 못하는 것보다 듣지 못하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고 하였습니다. 듣지 못하는 것이 가장 불편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이 가장 불쌍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청각장애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소리에 민감한 삶을 사세요. 총명을 얻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세요. 어린이들은 듣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듣고, 어른들은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듣지 않는다고 합니다. 듣기에는 어린이가 되세요.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듣지 않아도 다 아는 것처럼 하는 교만을 버리고, 어린이처럼, 스폰지가 물을 빨아드리듯 하나님의 소리를 빨아들이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세요. 그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면 세상이 달라지고, 우리의 존재가치가 빛을 발할 것입니다.

  귀 기울임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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