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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점검해 봅시다 (고후 13: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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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검해 봅시다 (고후 13:5-13)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우리가 버림 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 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한을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한 사람을 평가하거나 점검해 보는 것은 객관적인 평가로 가능합니다. 물론 어떤 평가도 이 세상에서는 완전한 것이 없습니다. 평가에 사용하는 것은 객관적인 방식을 도입하는데 미국식 채점방식인 A.B.C.D.E.F로 표기하는 성적평가제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닙니다.

제가 학교에 다닐 때는 점수를 그대로 통지표에 표시했고, 한 때는 우리나라의 순위를 표시하는 '갑을병정' 순으로 표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때는 '수우미양가' 순으로 표기한 때도 있었습니다. 점수나 학점은 노력과 시험에 대한 결과입니다. 노력하고 공부하면 그 수고에 비례해서 성적은 대부분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나 '성적과 인생의 성공 여부는 동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대학입학을 위한 수능 성적이 400점이라고 해서 인생도 400점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성적이 150점이라고 해서 인생도 150점은 아닙니다. 성적은 400점이지만 사람됨이나 그의 사는 모양은 150점짜리도 있고, 비록 성적은 150점이지만 그의 인격과 삶의 모습은 400점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 대학의 경우를 보면 입학생을 선발할 때 종합적인 선발기준을 적용시킵니다. 고등학교 시절의 성적, 특별활동, 특기 등을 종합 평가합니다. 운동을 잘한다든지, 특별 서클 활동을 했다든지, 봉사활동의 리더였다든지 하는 것들이 입학전형에 결정적 영향을 줍니다. 거기 비해 우리나라는 오직 성적입니다. 반사회적 품성을 가졌든지, 이중인격을 가졌든 오로지 성적만 좋으면 들어갑니다. 미국식 전형방법이 인격 인을 양성하는 데는 더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앙을 채점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어느 한가지만을 잘했다고 신앙점수가 올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전인격적 사건이기 때문에 한가지만으로 평가하거나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 안에서의 신앙생활은 만점인 사람이 있습니다. 예배출석 잘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성가대도 빠지지 않고 참여하고, 십일조도 부지런히 합니다. 그런데 교회 밖으로 나가면 세상 사람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할 짓 다하고 마실 것 다 마시고 갈 곳 다 갑니다.이런 경우 교회 안에서의 신앙생활만으로 만점을 매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모든 크리스천들의 신앙생활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되며. 종합적으로 잘 해야 됩니다.

1) 첫째는 개인의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영성을 개발하고 믿음을 지켜나가는 개인적 신앙생활이 있는데 이것은 자신의 믿음의 집을 짓는 것과 때문에 최선을 다하여 거룩한 성도로 그리스도의 군사로, 믿음을 가진 충성된 일꾼으로 신령한 능력의 성도가 되도록 교회생활, 영성생활, 개인 경건 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2) 둘째는 가정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개인의 신앙관리를 제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가정신앙 생활에 실패하면 무의미합니다. 가정은 신앙의 보금자리입니다. 가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교회의 일꾼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정 안에 주님이 늘 계시도록 주님께서 가정의 주인이 되시도록 가정에서도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3) 셋째는 교회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경에 비추어 신자들의 신앙규범과 신앙의 올바른 방향을 수시로 제시합니다. 그 헌법과 교회 전통과 내규 규범을 잘 따르고 순종해서 교회를 잘 섬겨야 바른 신앙생활이 유지되고 지속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함께 목표를 세우고 결의한 것은 협력하고, 하라는 것은 해야 합니다. 하지 말라는 것은 해서는 안 됩니다. 가자는 곳은 따라가고, 가지 말라는 곳은 가지 말아야 합니다. 먹어도 된다는 것은 먹고 먹지 말라는 것은 먹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건전한 교회 생활을 마로 유지하는 일이며 바른 신앙인 것입니다.

4) 넷째는 사회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가정에서는 모범적인 것 같고 교회에서는 착실한 교인인 것 같지만 일단 사회 속으로 끌려 들어가면 도저히 신앙인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의 쭉정이와 같은 신앙인, 세속화된 신앙인이 있어 신앙의 진위를 구분하기 어려운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어느 직장인한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5년 정도 함께 일한 직장인이었는데 어느 날 그가 교인이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교인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리고 교인으로서의 품위나 모범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대기업 영업부장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다른 부서에서 일하던 사원이 영업부로 전임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언제나 다른 직원들보다 15분∼20분을 먼저 출근하는가 하면 사무실을 정돈하곤 하더라는 것입니다 .태도며 언사들이 다른 사람과 다르기에 주목하며 지켜보았더니 늘 그 태도가 한결 같더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직원모임에서 본인이 기독교 신자라고 밝히더라는 것입니다.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천재도 만점은 없다고 합니다만 신앙생활을 평가해서 만점을 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점수의 신앙생활은 개인, 가정 ,교회, 사회 안에서 일관되고 한결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우리교회에 자체 성경 퀴즈 시험을 보았습니다. 채점결과 점수가 나왔습니다. 저는 시험 점수가 신앙 점수는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만 점수가 얼마나 노력했느냐의 노력을 평가하는 기준은 될 것입니다.??

대학교 입학이 점수로 결정됩니다. 대학 입학이 수능시험이나 고등학교 내신 성적으로 점수로 판가름 됩니다.

금년에 있을 대통령 선거가 어떤 분이 당선 될 것인가는 표차이로 결판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속에 있었던 모든 일들에 대한 평가가 하나님 심판대 앞에서 일어 날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성도는 날마다 악한 세상을 본받지 아니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 주의 뜻을 분별해 보고, 날마다 주님을 따르되 좁은 길을 걸어가며, 신앙생활도 채점해 보고 자신의 삶을 심판대 앞에 서게 도리 순간을 기억하여 좋은 열매를 맺도록 아름다운 인생, 후회가 없는 신앙인의 삶을 마무리 하도록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신앙점수를 채점한다고 가정할 때 우리들이 점검해서 될 네 가지 사실에 대한 항목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 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본문 5절 하반 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5절 앞부분에서 "너희가 믿음이 있는 가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했고 뒷부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너희 안에 계신가?"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선데이 포스트지에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한 교회에서 목사를 찾고 있었습니다. 목사 초빙위원회는 그 교회에 목사로 오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검토하면서 고르고 있었습니다. 목사 초빙위원회는 서기가 지망하는 목사들의 지원서를 하나하나 읽는 것을 듣고 있었습니다.

지망하는 목사들은 한 사람만 빼놓고는 모두 높은 도덕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신사들처럼 보였습니다. 이들은 아주 훌륭한 웅변가들이었고, 정력적인 목회자들이었고 그리고 회중들의 신앙을 부흥시킬 수 있는 전문가들이었습니다. 다른 지망 목사들과는 다른 면을 가지고 있는 한 지망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대개 큰 도시들 안에 있는 많은 작은 교회에서 목회했습니다. 그러나 한 교회에서 삼 년 이상 목회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책을 저술한 저자로서 약간 성공했습니다. 내가 목회하던 교회의 제직들과 나와의 관계는 아주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교회의 제직들은 나를 협박하기까지 했습니다. 나는 평화를 깨뜨렸다는 죄목으로 서너 차례 투옥된 적이 있습니다. 나이는 50세가 넘었습니다. 건강은 별로 좋은 편이 아닙니다. 기억력도 좋지 않습니다. 내가 세례 준 사람들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만일 목사로 초빙해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목사 초빙위원회 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런 건강도 좋지 않고, 말썽꾸러기이고, 기억력도 좋지 않고, 감옥을 제집 안방 드나들 듯이 하는 사람을 목사로 초빙해야 하다니 도대체 그 사람은 어떤 녀석인가?'

서기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위원장님, 그런데 그의 이름은 바울이라고 합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어떤 교회에 목사로 가기 위하여 그 교회에 청빙지원서를 썼다면 위의 내용으로 자기를 소개하기 위하여 쓴 내용과 거의 비슷했을 것입니다."고 하였답니다.

사도 바울은 목회하기에 적합한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그의 몸에 찌르는 가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몸에 있는 가시 때문에 지쳐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의 많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 가운데 연약함이 있었지만 그리스도께 사로잡혀 있었기에 놀라운 삶을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로마의 위대한 황제 어거스터스는 위궤양을 앓았습니다.

가장 위대한 장군들의 하나였던 쥴리어스 시저는 간질병 환자였습니다.

넬슨은 위대한 해군 제독이었지만 말년에는 배만 타면 배 멀미를 했습니다.

스코틀랜드가 낳은 가장 인기가 있는 설교가들 중의 하나는 '토마스 찰머스'였습니다. 그는 설교할 때에 항상 눈을 원고에서 떼지 않았습니다. 그는 설교할 때에 스코틀랜드 한 지방의 독특한 억양으로 원고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재주가 없었던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상 바울만큼 효과 있는 설교를 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의 영력 있는 설교는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즉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주안에서 주시는 능력으로 위대한 삶을 산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과 "그분이 나의 삶의 주인이요. 구주가 되신다."것을 믿고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계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고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전적으로 살아도 주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그리스도께 속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연약하였지만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변함없이 주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따라합시다. "최상의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내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부모와 함께 집안에 있는 아이들은 겁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외출한 집에 혼자 남아있는 아이는 두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가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서울 어느 곳에서 일하거나 볼일을 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집에 없으면 두렵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온 우주 어느 곳에나 계십니다. 우주는 하나님이 지으셨고 땅도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그 주님이 내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다는 믿음이 없으면 불안합니다. 소유가 있어도 불안하고 없어도 불안한 것은, 지위가 높아도 불안하고 낮아져도 불안한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들이 주안에 있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2.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살고 있는 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본문 5절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 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 하였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가스스로 반문해보고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는 버리운 자"라는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 회개하고 '진리 편에 서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라.'는 뜻입니다.

유대 나라에는 좋은 풍속이 하나 있습니다. 남자 아이를 낳으면 감람나무 묘목을 심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이 아이가 어른이 되면 꼭 감람나무 열매 같은 좋은 행동이 있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자 아이를 낳으면 소나무 묘목을 심는데 이것은 소나무와 같이 변치 않는 사랑의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대단히 좋은 관습이라 생각됩니다.

무엇보다도 그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늘 그 감람나무와 소나무를 바라볼 텐데 그 때마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고 그 뜻을 샛길 수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인들도 처음 그리스도를 받아 들였을 때부터 믿음으로 살기위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달려갈 때에 스스로 점검을 하고 자신 스스로가 인정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결코 낙오됨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본문 7절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리운자 같을 찌라도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7절은 세 가지를 교훈합니다.

1) 그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로 악을 행하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힘을 주셔야 된다.'는 것이고
2) 또한 '그 누구도 자기가 옳다는 것을 자랑하고 나타낼 수는 없다.'는 것이고
3) 동시에 '선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7절은 바로 사는 사람이 지녀야 할 신앙적 태도를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바로 산다는 것, 하나님의 뜻대로 구별되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종이 위에 붓으로 선을 그어 보십시오. 아무렇게나 선을 긋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바르게 곧게 선을 긋는 것은 어렵습니다.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고 신앙생활이나 교회 생활을 아무렇게나 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바로 믿고 바로 사는 것은 종이에 일직선을 긋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선을 행함으로 의로워지거나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조건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바로 살기 위해서는 거기에 합당한 믿음의 생활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행함의 문제인 것입니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그 학교의 학칙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입학하고 학생이 되고나면 학칙을 철저하게 지켜야 합니다.

젊은이가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는 제멋대로 살아도 되지만 일단 육군 훈련소에 입소하고 나면 어림도 없습니다. 군부대 수칙에 규정된 시간에 일어나고 자야 합니다. 정한 시간에 먹고 모이고 훈련하고 쉬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안 믿고 지옥 갈 사람들은 성경대로 살 필요도 없고 ,교회법을 따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군사가 된 사람은 그 법을 따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바로 살고 선을 행해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3. 진리를 위해 살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본문 8절을 보면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본문 8절에서 두 가지 교훈합니다. 하나는 '진리를 거스리면 아무 것도 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진리가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가 되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도전입니다.

진리가운데 사는 것은 그리스도께 속한 삶,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가 되신 '그리스도를 거역해도 되느냐?' 하는 질문은 '몇 천 만개의 달걀을 던져야 6.3빌딩이나 서울의 남산을 무너뜨릴 수 있느냐?'는 질문보다 더욱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것은 도전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충주호나 팔당호 그리고 미국의 미시간 호수나 온타리오 호수의 물을 다 퍼내고 바닥이 드러나게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태평양이나 대서양의 물을 다 퍼내고 바닥을 드러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유는 육지보다 바다가 더 넓고 크기 때문입니다.

누가 예수님께 싸움을 걸 수 있습니까? 싸움을 걸었던 구약의 모든 열국들이 모두 무너졌습니다. 공산주의의 태조인 칼마르크스나 레닌도 죽었습니다. 무신론자 볼테르도 죽었습니다. 천황이라고 자칭하던 일본의 국왕도 죽었습니다. 누가 진리를 거스릴 수 있습니까?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성경말씀을 불순종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합니다.

또 한 가지는 더욱 중요한 것은 '진리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 산다.'는 것은 성삼위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것이요. 쉽게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예수님을 높이고, 전적으로 섬기고 철저하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믿음이 좋다는 것은 나보다 예수님을 더 소중히 여기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일보다 주님의 일 쪽에 우선권을 두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뜻보다 주님의 뜻을 더 받들고 순종하는 것이 진리를 위하여 사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신앙생활이 하나님 앞에서 신앙점수를 높게 평가 받을 수 있는 결과로 나타날 줄 믿습니다.


4. 믿음으로 사는 결과가 평안한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 할찌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했습니다.

본문 11절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신앙생활의 결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주안에 살면 기쁘고 즐겁고 위로가 있고 그리고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나의 신앙이 몇 점이나 되는가 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결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답안지를 놓고 채점표를 만들어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삶의 목적이 바뀌고, 인생의 목표와 소속의 본질이 바뀌고, 신분이 바뀌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일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과 보장과 사랑을 받는 일이기에 가장 복되고, 행복하고, 즐거운 일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지옥 갈 인생이 천국 가는 일이요, 죄인이 정죄함과 죄책감과 죄의 무거운 심판에서 벗어나 죄 용서함을 받은 길이며,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보장 받는 길이며, 영생을 얻는 방법이기에 평안해야 합니다.

반대로 창조주 하나님, 절대자, 전능자를 믿지 못하면 불안합니다. 든든한 배경이 없다면 이 세상의 것은 유한하고 불안하기에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세상의 것을 의지한다면 모래위에 쌓은 집과 같습니다. 곧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결코 안심이나 소망이 없고, 사후에 불안은 가중될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난 후 마음이 평안해졌다면 그것은 점수가 올라갔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믿기 전이나 믿고 있는 지금이나 매한가지라면 아직도 내 믿음이 합격점 이하를 밑돌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신앙생활은 종합적 사건이기 때문에 점수 역시 평균점수를 내야 합니다. 마치 뒤집지 않은 전병과 같은 신앙생활이었다면 앞 뒤 모두 바싹 잘 익도록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기도를 잘하는데 교회 봉사가 약하다든지, 헌금은 잘하는데 기도를 안한다든지, 봉사는 하는데 예배출석을 안한다든지 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종합평가에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주님 심판대 앞에 서 있다고 가정해 보고신앙을 점검해 봅시다. 각자 스스로 자신의 신앙과 삶을 채점해 보십시다. 나는 과연 주님 앞에 서서 나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지금가지 살아온 생애에 대하여 평가를 받는다면 과연 몇 점이나 될 것 같습니까?

주님께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 가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하였습니다. 얼마 전 자동차를 정비해 보니 손 볼 곳이 많았습니다. 마치 정기적으로 자동차의 엔진과 정비를 통해 고장 유무를 점검해 보듯이 우리의 믿음과 삶도 수시로 점검해 보아합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가운데 내가 바로 실천하고 살고 있는지 점검하고, 잘못된 모습이 있다면 마치 피아노의 음반을 조율하듯이 고쳐야 합니다.

내 믿음의 점수는 과연 주님께서 심판대 앞에서 평가해 보신다면 몇 점이나 될 것 같습니까?

누가복음 4:12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고 하였지만 우리 자신의 신앙의 진위를 위해서는 나 자신의 믿음과 삶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본문 고린도후서 13:5절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 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하였고, 에베소서 5:10절에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좁은 길은 끝까지 걸어가고, 최후의 승리자,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충성된 일꾼들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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