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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권하노니 (빌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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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내가 권하노니 
본 문: 빌립보서 4:2~3

한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성인 남자가 다른 남자를 등에 업고 밭이랑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여 가까이 가 서 물어보았습니다.“여보시요. 무거운데 왜 어른을 등에 업고 밭이랑 사이를 다니고 있소?”그러자 대답하기를“우리는 문둥이 들이오.”라고 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한 사람은 다리가 일그러져 다라를 쓰지 못하고, 또 한 사람은 손이 일그러져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리가 건강한 사람이 손이 건강한 사람을 업고 서로의 손과 발이 되어 밭이랑을 다니며 흙을 덮고 곡식을 뿌리면서 일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나그네가 인사를 하고 몇 걸음 걷다가 뒤돌아보니까 손이 성한 사람이 자 기를 업고 있는 다리가 성한 사람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오늘 봉독한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 이러한 협력의 삶을 권면 하고 있습니다. 협력을 위한 권면은 빌립보 교회만 아니라 이 지구상의 모든 교회에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요소입니다. 교회만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면 어디나 누구에게나 꼭 있어야할 삶의 요소입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입니까?

一.“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본문 2절에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하셨습니다. 옥에도 티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옥에 티가 없으면 그 옥은 더 소중한 보배가 될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사도가 “나의 사랑, 나의 기쁨, 나의 면류관”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사도 바울사도가 보기에 보석 같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보배로운 빌립보 교회에도 티가 있었습니다. 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성도 사이에 갈등과 다툼과 분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하나님의 교회에 몸 바쳐 헌신하고 봉사하는 귀한 일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사이에 갈등과 다툼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다투고 분쟁하므로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또한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사람은 리더십이 있는 유력한 여성도 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까지 두 편으로 나뉘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여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다투고 시기하고 분쟁하는 것은 신앙인의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시기와 분쟁은 자신이 땀흘려 쌓은 헌신과 봉사를 퇴색시키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두고 염려한 바울 사도는 2절에 권면하기를 “내가 유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이들의 시기와 질투는 서로를 미워하며 멸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충성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시기와 질투하므로 다투고 미워하게 되면 상대방을 멸시하는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은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서에는 겸손에 관한 교훈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2절~3절에는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고 했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면서도 서로 상대방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다가 다툼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서로가 자기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고 귀하게 여기면 다툼이나 갈등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 5절~8절에는그 리스도의 마음을 예를 들어 권면하기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0절~21절에는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예수께 그의 두 아들 요한과 야고보를 좌우정승으로 삼아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자 다른 열 제자들이 화를 내는 장면이 마태복음 20장 24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서로 높아지려고 할 때 싸움이 일어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태복음 20:27)하셨습니다. 내가 높아지고 싶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낮아지는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그리하면 교회도 가정도 하나가 되어 은혜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33편 1절~3절에 말씀하시기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같이하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감동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 가운데 밥 호프(Bob Hope)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월남전이 한창이던 때 월남에서 부상당하고 돌아온 군인들을 위한 대대 적인 위문 공연을 준비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프로그램을 총책엄진 감독 이 밥 호프를 초청했습니다. 그러나 밥 호프는 너무 바빠서 갈 수 없다며 거절을 했습니다. 밥 호프가 없는 위문공연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감독은 전 장에서 돌아온 이들에게 위로를 주려면 당신이 꼭 필요하다며 여러 번 간곡 히 부탁을 했습니다. 선약이 있어서 갈 수 없다며 거절하던 밥 호프도 끝내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러면 제가 한 5분 정도만 얼굴을 보이고 내려와 도 되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주최 측에서는 그렇게만 해줘도 고맙겠다고 해서 밥 호프는 월남전 참전 용사를 위로하기 위해 위문공연에 출연을 했습니다.

5분을 약속하고 무대에 오른 밥 호프는 5분 동안 얘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웃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5분이 지나도 밥 호프가 끝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10분, 20분, 30분이 넘었습니다. 거의 40분 동안 공연을 하고 내려왔는데 밥 호프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감독이 밥 호프에게 묻기를 “5분을 약속하고는 30분이 넘도록 공연을 하고, 또 우는 건 뭡니까?”했더니 “저 앞에 있는 두 친구 때문에 그렇습니다.”“앞줄에 있는 두 친구가 어떻게 했기에 그러느냐?”하니까 “나가서 보라.”는 것입니다.

감독이 나가서 보니까 앞줄에 두 상이 용사가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오른 팔을 잃었고, 또 한 사람은 왼팔을 잃었습니다. 오른 팔을 잃은 사람은 왼팔을 사용하고, 왼팔을 잃은 사람은 오른팔을 사용하여 두 사람이 함께 박수를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밥 호프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저 두 사람은 나에게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가를 알려 주었습니다. 한 팔을 잃어버린 두 사람이 힘을 합하여 함께 기뻐해주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참된 기쁨을 배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므로 헐뜯고 비방할 것이 아니라 서로의 약점과 허물 을 감싸주고 도와주는 곳에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를 위로하는 삶,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는 삶,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 주는 삶, 이것이 곧 하늘나라 생명록에 이름이 기록된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二.“도우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분쟁의 당사자에게는 공개적으로 겸손하기를 권면한 후 본문 3절에 서는 이 분쟁의 모습을 지쳐보고 있는 주위의 성도들에게 이들을 도우라고 했습니다. 본문 3절에 도우라는 말씀을 두 번 거듭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위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부녀들이란 2절에 나타나 있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가리킵니다. 이들을 도우라는 것은 물질적으로 도우라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화해를 도와 교회를 평안케 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복음증거를 위해 협력했던 자이며 이들의 이름은 모두 하늘나라 생명록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협력하라는 것입니다. 협력하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이러한 곳에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게 됩니다.

기러기들이 V자 대형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비행기와 망원경으로 추적한 조류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첫째, 기러기는 혼자 나는 것보다 떼를 지어 날 때 71%나 더 오래 날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기러기가 V자 대형으로 나는 것은 공기대(swath of air)가 형성되어 뒤따르는 기러기들이 날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뒤에 있는 동료를 조금이라도 편히 날게 하기 위하여 V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앞에서 나는 인도자격인 기러기가 가장 빨리 지칩니다. 이것을  아는 기러기들은 가끔 위치를 바꾼다고 합니다. 

셋째, 기러기들은 날면서 계속 웁니다. 이것은 힘들어 지르는 비명이 아니라, 기러기의 울음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자기의 위치를 알림으로써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를 격려하는 나팔 소리와 같은 것입니다.

넷째, 만일 기러기 한 마리가 아프거나 부상으로 함께 여행을 계속하지 못하게 될 경우 반드시 서너 마리의 동료가 이 낙오자와 더불어 머문다는 것입니다.

새들도 이처럼 서로 도우며 목적지를 향해 날아갑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은 누구입니까? 우리의 본향 하늘나라를 향해 달려가는 성도들입니다. 혼자의 힘으로는 이 세상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서로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서로 권면하고 도우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서로 권면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합니다. 시기하고 질투할 정신적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갈 길이 멀고 바쁘기 때문입니다. 시기와 질투로 인한 분쟁은 모두를 패망케 합니다.

산속에 공명조란 이름을 가진 원앙새가 있었습니다. 그 새는 몸은 하나이지만 머리는 둘이었습니다. 어느 때, 머리 하나가 맛있는 과일을 혼자서 먹는 것을 보고 다른 머리 하나가 화가 나서 질투하는 마음으로 생각했습니다.“네가 그래 보아라. 나는 독한 과실을 먹고 네 목숨을 끊으리라.” 이렇게 결심하고 그 후 독한 과실을 쪼아 먹었습니다. 독은 두 머리에 똑같이 펴져서 함께 죽고 말았습니다.

시기는 스스로 파멸의 함정을 파는 것입니다. 시기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지 않습니다. 그는 사탄의 꾀임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본문 3절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바울사도가 말한 동역자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바울사도는 영혼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 바울의 동역자란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복음전도자를 도우므로 힘 있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돕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돕는 것이 됩니다. 요한복음 13장 20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10장 41절~42절에는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하셨습니다.

전쟁을 하는데 최전방에서 싸우는 군인들만으로는 전쟁에 이길 수가 없습니다. 후방에 위치한 지원부대의 지원이 원활해야 그 전쟁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영적인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사나 목회자는 최 일선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힘만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영혼구원의 역사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힘을 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권면하기를 본문 3절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고 했습니다.

복음증거는 이 세상의 수많은 일들 가운데 가장 소중한 일입니다. 영원한 멸망에 처한 영혼은 구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증거는 이 세상의 수많은 일들 가운데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입니다. 영원한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영혼은 구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의 핵심은 언제나 영혼구원에 있습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하셨습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비롯한 수없이 많은 주의 종들을 순교의 제물로 내어 놓으셨습니다. 이 고귀한 하나님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혼구원의 거룩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 힘쓰는 나라들을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에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때가 되면 종말을 고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베드로후서 3:10)고 하셨습니다.

죄악이 가득한 이 세상의 멸망이 지금까지 연기된 것은 아직도 건질 영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베드로후서 3:8~9)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므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합니다. 리빙스턴 선교사가 아프리카 선교지로 떠나려고 배를 타는데 어느 여성도가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손에 봉투하나를 쥐어주면서 말했습니다. “선교사님 나는 선교사처럼 아프리카에 갈수가 없는 처지입니다. 밀림지대를 다니시려면 돕는 사람이 필요할 텐데 이것을 받으세요. 얼마 되지 않지만 폐물을 팔아서 마련했습니다. 돕는 사람을 한 사람 구해서 선교하도록 하세요.” 리빙스턴 선교사는 그 여성도의 요청대로 그곳 지리를 잘 아는 원주민을 고용했습니다. 어느 날 밀림을 지나다가 리빙스턴 선교사가 사자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이때 고용한 원주민이 달려들어 사자를 죽이고 선교사를 구했습니다. 이처럼 복음증거에는 협력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격려하는 말 한 마디가 사람에게 엄청난 용기를 줍니다. 제임스 진 스톡레일이라는 해군 제독이 월남전에서 베트콩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서 8년 동안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어려움을 잘 견디고 무사히 그의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어떻게 8년 동안 수용소에서의 엄청난 고통을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수용소에 있던 어느 날 베트콩에 협력하지 않는 포로는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 주기 위한 모델로 그가 뽑혔습니다. 베트콩이 해군 제독의 팔을 뒤로하여 수갑을 채운 뒤에 한 자리에 앉히고 조금만 자세가 흐트러져도 모질게 때렸습니다. 3일이 지나자 온몸이 상처  투성이가 되었고 잠이 와서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졸면 또 모질게 때리니까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살을 결심하였습니다. 저녁 점호시간이 되자 다른 포로들이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포로 중의 한 사람이 제독에게 ‘뚝 뚜뚜뚝’ 하면서 암호를 보냈습니다. 암호를 풀어 보니“장군님, 하나님의 은총이 당신과 함께하기를 빕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암호를 푸는 순간에 ‘누군가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었구나. 누군가 나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었구나.’라는 마음에 새 힘이 솟아났고, ‘그래, 하나님의 은총이 나와 함께하시면 살 수 있다, 살아야지.’라는 믿음과 소망을 갖고 마음을 바꾸어 그 어려운 고문을 이겨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따뜻한 관심을 갖고 있고. 누군가 나를 도와주고 있고 누군가 나를 사랑해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세상살이가 비록 힘이 들어도 세상사는 재미가 있습니다.

딘 마틴이라는 미국의 유명한 배우가 있습니다. 그는 연기만 잘한 것이 아니라 노래도 잘 불렀습니다. 그가 부른 노래 중에 유명한 노래가 있는데“You are nobody(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 가사가 의미 깊습니다.

누군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한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군가 당신을 돌아보지 않는 한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기 전까지는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돌아보기 전까지는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든지, 누군가의 사랑을 받든지, 내가 누군가를 돌보던지, 누군가의 돌봄을 받을 때 비로소 살맛이 난다는 말입니다. 사랑도 관심도 도움도 주고받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이처럼 사람에게는 사랑이 귀중합니다.

사람은 절대 밥만 먹고는 살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좋은 조건 속에서 살아도 사랑과 도움을 줄 사람이 없을 때, 나에게 사랑과 관심을 베풀어 주는 사람이 없을 때는 고독하여 사는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도 누군가와 사랑과 도움을 주고받을 때는 그 어려움을 헤쳐나갈 힘과 용기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권면하시기를 같은 마음을 품으라, 동역자들을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같이하므로 언제나 교회에 평화가 가득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복음증거에 협력하므로 하나님의 뜻인 영혼구원의 역사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결실의 계절 가을에 우리 교회에 아름답고 중요한 두 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영혼구원을 위한 새생명 축제요, 또 하나는 우리의 자녀들을 말씀으로 교육하기 위한 교육관 건축입니다. 서로 돕고 이해하며, 격려하므로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는 계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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