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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음의 길이라 해도 (행 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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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길이라 해도 (행 21:1~16)

태풍이 불어온다고 합니다. 바라기는 큰 피해 없이 태풍이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모든 것이 결실을 맺을 때이기에 지금은 비가 별로 반갑지 않을 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예년에 비해 참으로 비가 많이 왔습니다. 그만큼 지구의 환경이 바뀌고 있다고 하는 증거도 됩니다. 결국은 사람들이 잘 살아보겠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지구 환경을 나쁘게 만들고 있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기에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재앙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노아의 홍수가 있기 전 여호와께서 땅 위에 사람의 악한 행동이 크게 퍼진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이 언제나 악할 뿐이라는 것도 아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땅 위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만든 땅 위의 사람들을 모두 멸망시키겠다. 사람에서부터 땅 위의 모든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도 멸망시키겠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을 후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아는 여호와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노아는 그가 살던 시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홍수가 끝난 뒤 노아는 배에서 나와 여호와께 제단을 쌓습니다. 노아는 깨끗한 새와 짐승 가운데서 좋은 것을 골라 제단 위에 태워 드리는 제물인 번제물로 바칩니다. 여호와께서 그 제물을 기뻐 받으시고, 마음속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생각은 어릴 때부터 악하지만, 이번처럼 땅 위의 모든 생물을 멸망시키는 일을 다시는 하지 않을 것이다. 땅이 있는 한, 심고 거두는 일,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서는 그 생각하는 것이 어릴 때부터 악할 뿐임을 말씀하시면서 결국에는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는 잘 해 보겠다고 하지만 그 결과가 악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은 죄 가운데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생각하는 것도 악할 뿐이요 그러니 거기서 나오는 말도 행동도 악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러니 그 열매가 어찌 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처음의 뜻은 좋지만 그러나 그 좋은 뜻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거리가 멀 수밖에 없고 그러니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날 동안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날도 있지만 때로는 뼈를 깎는 듯한 아픔을 겪게 될 때도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다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은혜 가운데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성령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서 그 뜻 가운데서 살 수가 있고 그럴 때 우리는 죄악으로 인해서 망가진 것들을 회복하고 서로 화목을 이루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믿음 안에 있는 성도들과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 살아갈 수 있을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사람을 따르랴 하나님을 따르랴”입니다.
바울이 밀레도에 잠시 머물며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당부의 말을 전할 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제 나는 성령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 곳에서 내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어느 도시에 가든지 감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성령께서 내게 경고해 주셨다는 사실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 목숨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곧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이미 성령께서 이끄셔서 자기가 가야할 길이 환난의 길이요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죽기까지 각오하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바울을 지켜보는 성도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뻔히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가고자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말리고 싶은 것이 우리네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만큼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뜻도 되지를 않겠습니까? 문제는 그 길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라서 고난당하기를 좋아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뻔히 어려움이 보이는데 그 길로 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길이 진정 보람된 길이라면 오히려 그렇기에 더 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인생은 모험이라는 말도 합니다. 산악인들이 그 험한 산을 오르는 것은 그 길이 결코 힘들지가 않아서가 아닙니다. 험한 만큼 위험도 따릅니다. 그냥 실패가 아니라 죽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산을 정복한다는 보람된 뜻이 있기에 그들은 산을 오릅니다.

그런데 그들보다도 더 보람된 삶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온 세상의 주인이자 왕이 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십니다. 정말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서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든든하게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때로는 오히려 우리를 죽음의 길로 보내실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열매를 거두고자 하실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그 많은 열매를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죽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내 마음 하나 죽이는 것도 쉽지 않은데 하물며 내 목숨을 내 놓아야 한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것도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다 어쩔 수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과 오히려 당당하게 기쁘게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어찌 같은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 뻔히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을 지켜보는 입장에서 할 수만 있다면 말리고 싶은 것이 사람의 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의 전하는 말을 들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이 바울과 함께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하고 난 뒤 바울을 차마 말릴 수 없기에 서로 얼싸안고 울면서 배웅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과 작별을 하고 배를 타고 여러 곳을 거쳐 두로에까지 왔을 때 그곳에서 일 주일을 함께 지내게 됐을 때 두로의 성도들이 성령께서 알려주신 대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만류를 합니다. 어찌 안 그렇겠습니까?

물론 성령께서 이끄시는 길을 누구라서 안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길만은 아니지 않느냐? 다른 길도 있지를 않느냐고 우겨대고 싶은 것이 성도들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두로의 성도들이라고 해서 다르겠습니까? 하지만 성령께서 이끄시는 길은 아니라고 할 수는 없기에 차마 바울의 길을 막지는 못해도 그래도 한 번쯤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압니다. 결국 바울이 비록 죽음의 길이라고 해도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들도 압니다. 그래서 함께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 바울을 배웅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가이사랴에 도착하여 일곱 안수 집사 중 하나인 빌립의 집에 며칠 동안 머물게 됐을 때 빌립의 집으로 아가보라는 예언자가 유대에서 찾아옵니다. 그는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다가 자기 손과 발을 묶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이 이 허리띠 임자를 이와 같이 묶어서 이방인들에게 넘겨 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죽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바울과 함께 간 사람들과 가이사랴의 성도들 모두가 다 함께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간곡하게 말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미 성령께서는 바울이 가는 그 길은 많은 환난이 따르는 길이요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는 길임을 바울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그 길을 미리 보여 주신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길을 피하라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 길로 가야만 한다는 것입니까? 물론 바울은 그 길을 가야만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 장로들은 어땠습니까? 그들은 그 반대로 해석하고 싶어 했습니다. 물론 바울을 잃고 싶지 않다는 뜻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을 그들은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바울이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길 역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냥 도망쳐 숨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더 크게 할 수도 있지 않느냐 그것은 바로 바울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왜 그들의 말이 솔깃하지 않겠습니까?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그것을 이제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냥 단순히 후계자들을 세워서 그들로 하여금 그 일을 맡아서 하도록 하고 자기는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 죽음의 길이라고 한다면 이건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성령께서는 바울로 하여금 에베소에서는 손을 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성령께서 알려주시는 대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청하여 에베소 교회와 성도들을 부탁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자기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그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간곡하게 기도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울면서 배웅하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보면서 바울의 마음 역시 몹시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로에 잠시 머물 때 두로의 성도들 역시 간곡하게 바울을 말립니다. 그래도 바울은 다시 그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흔들리려는 마음을 바로 잡습니다. 하지만 아가보라는 예언자까지 멀리 유대로부터 찾아와서 바울의 길이 어떤 길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었을 때 빌립과 가이사랴 교회 모든 성도들이 울면서 바울의 길을 말립니다. 이렇게까지 되면 아하 하나님께서 나를 이끄시는 길은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다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할 만도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만나는 세 곳의 성도들이 한결같이 이렇게 내 길을 말릴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은혜 아래 살아가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간다고 해도 여전히 환난은 피하고 싶은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나의 생각입니다. 어려서부터 악할 뿐인 우리네 생각이란 말입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옳다고 여겨질 때 그것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이 길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여겨지면 우리는 그 다음부터는 더 이상 생각하고 자시고 없이 그냥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것도 나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한결같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면 그래 역시 이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라고 단정을 해 버립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우리 모두가 다 한 마음이 되어서 이 길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라고 그렇게 판단을 한다면 그 길은 틀림없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되는 것인지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약한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똑같은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모두의 생각일 뿐이지 하나님의 생각도 그러한지 다시 확인해 보십니까? 나 혼자서 라면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입니까?” 하고 계속해서 하나님께 묻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모두의 마음이 하나로 합쳐졌을 때는 우리가 다 기도하는 사람들인데 우리의 마음이 다 하나가 된 것을 보니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뜻이다 하고 그냥 결론을 내려버리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사람의 생각인지 하나님의 생각인지 항상 깊이 살피기를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위대함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께서 자기에게 보여주신 그 길을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갑니다. 물론 그 길이 얼마나 힘든 길인지 잘 압니다. 아니 힘든 정도가 아니라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는 길임을 바울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자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그 길을 따라간다고 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힘든 길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따라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의 길입니다. 이미 바울 자신은 그러한 자신의 태도를 밝히 말하면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였습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종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명하시면 종 된 자기는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성도들을 향해서 말을 합니다.

“어찌하여 그렇게 울면서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십니까? 나는 예루살렘에서 묶이는 것뿐만 아니라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죽는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자의 길입니다. 아니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이 마땅히 가야할 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는 우리네 사회가 알게 모르게 교회를 억눌러 왔다면 이번 아프간 피랍 사태를 계기로 해서 앞으로는 아주 노골적으로 교회를 억누를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겠지만 앞으로는 주변으로부터도 더 많은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이 우리에게 이미 악한 마귀를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회의 어두운 곳들을 밝게 비쳐주는 빛의 역할을 계속해야 하고 사회가 아름답고 맛깔스런 모습이 되도록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히 나를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신을 태워 빛을 내는 기름이 되어야 하고 자기를 다 녹여 맛도 내고 썩지 않도록 역할도 하는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사명의 길은 때로는 죽음까지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하셨고 또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라고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희생으로 끝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길은 잠시는 희생처럼 보이고 잠시는 아픔이 있을지 몰라도 오히려 보다 많은 열매를 얻고 나도 더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환난도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광야로 나가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광야의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 광야가 있기에 우리는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도야말로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그러나 그 광야의 기도 역시 쉽지를 않습니다.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광야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누구라도 피하고 싶은 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은 보다 쉽고 재미있는 길을 가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잠깐만 눈을 돌려보면 얼마나 재미있고 얼마나 편하고 얼마나 좋은 것이 많은데 그것을 다 마다하고 광야로 나간단 말입니까? 그것도 모두가 다 가는 길을 나만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쩌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도 없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보라는 소리도 듣고 고집불통이라는 소리도 듣게 됩니다. 아니 조금만 그들의 눈에 벗어났다 싶으면 온갖 비난이 다 퍼부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라가는 길 자체가 광야의 길이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들일 뿐입니다. 오히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허락하시는 기쁨과 즐거움이야말로 영원한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심는 것이 없이 어찌 거둘 수가 있겠습니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많은 것을 거두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 16절에서 바울 사도는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복종하여 여러분 자신을 그 사람에게 바치면, 여러분은 그 사람의 종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여러분은 죽음에 이르는 죄의 종이 될 수도 있고 의에 이르는 순종의 종이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성령께서 자기에게 가도록 하는 길이 오히려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는 길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으로 볼 때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해도 오히려 기쁨으로 그 길을 가려고 한다고 간곡하게 말했고 비로소 가이사랴 교회 모든 성도들과 바울과 함께 가던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뜻대로 되기를 바랍니다”하고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 죽음의 길인 줄 알지만 그것이 바로 주님의 뜻임을 깨달은 가이사랴 교회의 제자들 중 몇 사람도 함께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야할 길이 바로 이 길입니다. 지금 잠시는 죽음에 이르는 길 같으나 그 길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더 이상 세상의 종이 아니라 주님의 종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야할 길입니다. 이를 위해 항상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기를 힘쓰는 성도들이요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들은 누구를 따르겠습니까? “사람들을 따르겠습니까 아니면 주님을 따르겠습니까?” 사람들은 따르는 길은 쉽게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세상이 다 함께 가는 길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따르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철저히 나를 죽여야만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외로운 길입니다. 그만큼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나를 의의 병기로 주님께 드리신다면 더 이상 그 길은 힘든 길이 아니라 그 길만큼 보람된 길도 없을 것입니다. 아니 주님이 함께 하시기에 오히려 더 즐겁게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뜨겁게 기도해야 합니다.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을 따라 함께 기도하는 것도 바로 그 이유입니다.

믿음 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는 광야의 훈련을 우리는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주님의 약속을 따르는 길입니다. “두 세 사람이 땅에서 함께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시리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라” 그렇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그 길은 비록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해도 오히려 영원히 사는 길이요 그 길이야말로 진정 복된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야말로 주님이 앞서 가신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는 길입니다. 이제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귀한 성도들 다 되시도록 비록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도 기쁨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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