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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구주 고백 (벧전 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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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구주 고백 (벧전 3:13-17)

얼마 전에 안정환 축구 선수가 프로축구연맹으로부터 벌금 천만 원이란 중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는 요즘 프로축구에서 성적을 내지 못하자 2 군으로 추락했습니다. 그는 설움을 삼키고 2 군 경기를 하고 있는데 상대방 응원석으로부터 야유를 받았습니다. 그는 비방하는 말을 참지 못하고 경기를 하다가 관중석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 일로 선수는 퇴장을 당해야 했고 공식 사과와 벌금을 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징계 수준이 사상 최대인지라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너무 과한 것이 아니냐? 선수가 잘못했느냐, 비방한 관중이 잘못했느냐 논쟁입니다. 비방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참지 못할 욕설을 들었어도, 끝까지 참았으면 더좋았을 일입니다.

남에게 모욕을 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중동지역에서는 이교도에게 얼굴에 침을 뱉고 회초리를 치기도 합니다. 이슬람에 이교도를 개처럼 여긴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걸프전 때 사우디아라비아에 미 여군이 더우니까 민소매를 입고 시내에 쇼핑을 나왔습니다. 그곳의 여자들은 얼굴까지 가리고 다녀야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여군은 몸매까지 드러나는 차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그 사이 누가 신고를 해서 경찰 두 명과 ‘무타와’라는 종교 지도자가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여군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야단을 쳤습니다. 아랍어를 모르는 여군은 반응이 없었습니다. 무타와는 경찰에게 체포하고 말하면서 여군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그러자 여군은 M16 총을 들어 무타와를 겨눴습니다. 이들은 혼비백산하고 도망을 쳤습니다. 그 광경을 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습니다. 모욕을 당할 때 이렇게 앙갚음을 할 수 있다면 속이 시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 그렇게 갚아도 후환은 계속 남습니다. 그래서 복수하는 것은 기독교 정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멸시 천대 모욕을 당할 때도 참아야 합니다. 특히 종교를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비방을 할 때 이에 대처할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16절에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욕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부끄럽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침을 뱉는 사람을 민망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을 쉽게 할 수 있겠습니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힘으로 하면 쉽습니다. 그러나 힘으로 말고 어렵지만 그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어떤 것일까요? 바로 신앙고백입니다.

본문 15절에서 16절 앞부분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가 누구입니까? 왜 예수를 믿는지? 왜 교회를 다니는지? 왜 죽음이 기다리는 곳도 마다하지 않고 선교를 하려고 드는지? 왜 주일이면 놀지도 않고 예배를 드리는지? 왜 천국을 소망하는지? 물어보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에게 우리가 대답할 말이 신앙고백입니다. 이 대답을 항상 예비하라고 했습니다. 언제 물어봐도 대답이 척 나올 수 있게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인생에 대해서 질문 하는 것을 철학이라고 합니다. 왜 사는지? 우리는 어디서부터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인생에 대한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믿음에 대해서 묻는 것은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을 누구로 생각하는지? 무엇을 믿는지? 죽으면 천국에 가는 것을 확신하는지?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다닌지 오래 되었지만 신앙고백을 제대로 못한다면 문제입니다. 이 신앙고백은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면 반드시 신앙고백부터 배워야 합니다. 남들이 하는 고백은 소용이 없습니다. 내 입으로 내 마음으로 믿어지는 것들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학생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십시오. 인생의 비전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제대로 했다면 그 청년은 인생 준비가 잘 된 것입니다. 대답을 이내 못하고 머뭇거리는 학생도 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 전공을 선택하고 공부를 하고 있지만 왜 공부를 하는지 목적이 없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목적이 없이 대학을 다닌다면 등록비만 낭비하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 때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사도신경은 말 그대로 사도들에 의해 가르쳐 전해오는 신앙고백문입니다. 이 사도신경을 사도신조(使徒信條)라고도 합니다. 이 명칭은 예수의 12제자가 각기 1구절씩 만들었다는 전승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승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2 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로마신조’를 바탕으로 5-6 세기 경에 갈리아에서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이 사도신경을 기준으로 이단인지 아닌지를 가렸습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한 구체적인 신앙고백으로 되어 있습니다.

남녀가 교제를 하다가 사랑이 싹트면 그 다음은 서로 사랑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혼을 약속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 고백입니다. 경상도 사나이들이 이 사랑고백을 쑥스러워한다고 합니다. 사랑고백도 없이 얼렁뚱땅 결혼하려고 합니다. 이거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면 그리스도로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이를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으면 나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사랑하겠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로마서 10:9-10 말씀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예수님을 주로 시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음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부활하신 것을 마음에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을 얻습니다. 또 이 내용을 마음으로만 믿으면 안 됩니다.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을 때 신앙고백이 제일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구주로 고백해야만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신앙고백이 가장 극적인 장면은 마태복음 16장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이사랴 빌립보에 데리고 가셨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지금 이스라엘의 가장 북쪽에 있습니다. 헤롯 빌립이 갈릴리 북쪽을 다스리면서 이곳에 도시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명칭을 로마 황제를 뜻하는 가이사 칭호와 자기 이름을 넣어 불렀습니다. 지금은 가이사랴 빌립보를 바니아스라고 부릅니다. 바니아스는 이곳에 있었던 판 신전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판’은 그리이스의 목자의 신입니다. 이곳은 더북쪽에 있는 헐몬산이 있습니다. 헐몬산은 2850 미터의 높은 산입니다. 이 헐몬산은 지금 레바논과 이스라엘이 나눠 가지고 있습니다. 이 헐몬산의 높은 산자락에 쌓여 있던 눈이 녹아 내리면 대부분 지하로 스며들어 갑니다. 그 스며들어간 물은 지하로 흐르다가 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다시 솟구쳐 나와 흐릅니다. 봄에 그 수량이 가장 풍부한데 1초에 50톤씩 쏟아집니다. 제가 이번에 갔을 때는 비가 오지 않는 한 여름 건기였는데도 폭포에서 떨어지는 수량이 엄청났습니다. 2월에 찍은 사진은 훨씬 수량이 풍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물이 요단강에 흘러가는 것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연중 물이 풍부한 곳입니다. 그래서 헤롯 빌립은 이곳을 휴양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자기 별장도 짓고 각종 우상을 섬기는 신전들을 세웠습니다. 이 신전은 그 흔적이 지금도 조금 남아 있습니다. 돌벽을 파서 그 안에 우상을 놓고 섬겼습니다. 이런 흔적들이 근방에 많이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예수님 시대에 이곳에 세워진 판 신전을 상상해서 그린 것입니다. 옆에 설명문에 ‘The Sanctuary of Pan’ 판 신전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밑의 사진은 이곳을 조금 멀리서 잡은 것입니다. 다음 사진은 이곳에서 점심을 먹은 식당 벽에 걸린 그림을 찍은 것입니다. 이렇게 우상을 섬기는 신전을 지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우상이 가득한 곳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왜 오셨을까요? 고된 사역을 잠시 쉬기 위해서 휴양도시를 찾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에 우상이 얼마나 가득한 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겠지요. 이곳에서 예수님은 갑자기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 중 누가 대답했습니다. “어떤 이는 세례 요한, 누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다른 곳보다 우상이 가득한 신전 앞에서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받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제자들은 3 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수많은 기적을 체험했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마지막 테스트 하신 것입니다. 졸업 시험 문제였습니다. 문제는 가장 중요한 것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100 점짜리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 기쁜 나머지 흥분하신 중에 베드로에게 놀라운 복을 주셨습니다. 이때까지 베드로는 시몬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베드로란 이름을 지어 주신 것입니다. 이제부터 너는 베드로라고 부른다. 이는 반석이란 뜻인데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이 곳에는 우상을 섬기는 판 신전이 세워졌지만, 나는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열쇠는 천국문을 열고 닫는 열쇠가 아닙니다. 땅에서 하늘을 움직이는 리모컨 열쇠입니다. 이것은 기도와 용서의 권세입니다. 베드로는 신앙고백을 한 번 잘하고 황홀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신앙고백 하나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성지를 탐사하면서 가는 곳마다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감격스러웠던 곳이 이 가이사랴 빌립보였습니다. 일행들이 사진을 찍고 있을 때 저는 한 발 물러나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서 있었을 것 같은 장소를 찾았습니다. 물론 그 자리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령에 이끌린 듯 우상들을 쌓아 두었던 절벽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섰습니다. 그리고 제법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 이천 년 전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고백했던 그 신앙고백을 저도 이 자리에서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생명이십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저는 예수님을 위해서 살고 죽겠습니다. 평생 사는 동안 주님을 찬양하며 영광 돌리며 살게 하옵소서.” 저는 하나님께서 이 고백을 받아 가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어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이곳에 우리 멋지니안들을 데리고 오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세워 놓고 한 사람씩 신앙고백을 하도록 시키고 싶습니다. 뺀질거리는 교인들이 이곳에 서면 저절로 신앙고백이 될 것 같습니다. 백번 천번 설교를 듣는 것보다 이곳에서 신앙고백 받고, 바로 앞에 있는 물가에 데리고 가서 세례를 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인들 이곳에 다데리고 오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들겠습니다. 그냥 해본 소리입니다. 신앙고백은 곧 전도입니다. 예수님이 구주라고 가르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왜 구주이신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사실 그것을 믿는 것은 신비입니다. 그래서 전도할 때 자꾸 설명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가장 좋은 전도는 내가 믿는 것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자리에서든지 바르게 신앙고백을 하면 감동이 몰려옵니다. 그러면 그 감격이 전도할 사람에게 그대로 전해집니다. 이 신앙고백은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할 때 신앙을 고백하면 그 사람에게도 성령의 감동이 전달됩니다. 놀랍게도 그도 같은 고백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같이 믿을 마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을 바로 하면 인생이 정돈됩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마르지 않습니다. 항상 샘물처럼 신비한 은혜가 이어집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고백에 능력이 나타납니다. 내 영혼의 구원은 물론이요 다른 죽어가는 영혼을 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최고의 전도는 신앙고백입니다. 나의 믿는 마음을 입으로 고백하십시오. 따라서 합시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이십니다.” “저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습니다.” 이 고백이 나를 욕하고 비방하는 자를 부끄럽게 만들 것입니다. 이 고백을 항상 준비하십시오. 오늘 말씀에 이 대답을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두려움으로 하라는 것은 거짓이 아닌 정직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온유로 하라는 것은 비록 비방하는 사람 앞에서라도 여유와 부드러움을 잃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준비된 신앙고백에 하나님의 복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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