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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한 목자와 양의 문 (요 1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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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자와 양의 문 (요 10:1-10)

우리는 흔히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이시고, 우리는 주님이 이끄시는 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찌하여 주님의 양이라고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옆에 앉으신 분하고 서로 인사해 보십시오. “당신은 주님의 양입니다.”
혹 이 인사를 나누실 때, 마음으로 거부감이 드신 분은 없으셨는지요? ‘저 사람은 양같지 않은데’ 하고.
우리는 어떤 사람을 “양같다” 고 하면 “착하다” 는 말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양이라고 하셨을 때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성경이 말하는 양이 뜻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양이란 말은 우선 약하다는 뜻입니다. 양은 정말 약한 짐승입니다. 양에게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흔해 빠진 뿔도 없고, 빨리 달릴 수도 없어서, 들짐승들에게 쉽게 잡혀 먹히고 맙니다.
또 양은 미련하다는 뜻입니다. 양은 시력도 좋지 않고 냄새도 잘 맡지도 못해서 쉽게 구렁텅이에 빠지고, 가다가 절벽이 있으면 절벽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자기 앞가름을 하지 못하는 짐승이 바로 양입니다. 소나 닭, 개는 주인없이도 얼마든지 삽니다. 그러나 양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인도네시아 선교 여행 중에 수마트라 섬의 농촌에 가보니, 집에서 기르는 온갖 짐슴인 개 소 돼지 닭 오리 염소 양들이 길 가에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다른 짐승은 차가 다가오면 도망가는데, 양은  차가 다가와도 가만히 있었습니다. 위험한 줄 모르고 다니는 참 답답한 동물임을 그 때 알았습니다. 

또 양은 고집불통이고 변화를 아주 싫어하는 동물입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도랑이 생길 정도로 자기가 가던 같은 길만 갑니다. 그리고 한 번 먹기 시작하면 그 언덕에서만 계속 풀을 뜯어 먹어서 그 주위를 완전히 못쓰게 만듭니다. 양은 지독하게 움직이기를 싫어합니다. 한 자리에서 먹고 싸고 눕고 합니다. 그래서 양은 쉽게 병이 듭니다.
이사야는 이사야서 53장 6절에서 죄악 속에서 사는 우리를 양에다 비유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러니 “당신은 정말 양같으시군요.” 하는 말은 사실은 욕입니다. “당신, 정말 약하고 미련하고 고집불통이고 혼자서 살 능력이 없으시군요.”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양이라고 하신 것은 우리를 조롱하고 부끄럽게 하시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약하고 미련하고 무능하기에 반드시 목자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양이 목자 없이는 죽듯이 “나는 예수님 없으면 죽는다.” 는 자세로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지난 주, 교역자 퇴수회를 다녀왔는데 퇴수회가 시작되었을 때 교역자들의 마음에 영적 낙심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약한가? 왜 이렇게 못났나? 왜 이렇게 악한가? 그러고도 목사, 전도자라 할 수 있나? 정말 예수님의 생명으로 산다고 할 수 있는가?’ 깊은 좌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내려놓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보시지 않으심을 깨닫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습 그대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양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믿으면 충분한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자신이나 자녀들이 유능하고 강하고 잘 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발버둥치는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낙심하고 좌절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그런 사람을 배우자로 삼고 사위 며느리로 삼고, 직원으로 쓰려고 찾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양임을 알면 된다.” 양은 착하지도 똑똑하지도 강하지도 않습니다. 단 하나 목자만 죽으라고 따라다니는 짐승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붙잡고 믿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7장 7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하나님만 왜 이렇게 약한 민족을 택하셨을까요? 양이 목자를 의지하듯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백성을 택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를 만나주시고는 베드로에게 한 마디 책망을 하지 않으시고 세 번이나“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만 물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베드로가 너무 약한 것, 죽을까 겁이 나서 예수님을 부인하기까지 했다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문제를 삼지 않으셨습니다. 왜? 양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베드로가 이끌어야 할 성도들은 다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베드로가 양이 목자를 따르듯이 항상 예수님만 의지하고 사랑하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약하고 무능하고 미련해서 죄절이 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점에 대해서 조금도 무엇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양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예수님은 목자요 우리는 양이라는 설교를 듣고 찬양을 불렀지만 예수님이 나의 목자이시고 나는 양이란 느낌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 달라져 있음을 알았습니다. 저는 마음으로부터 예수님만 원하고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고 예수님이 이끄시는대로만 살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이시고 나의 주님이십니다. 공부를 더 많이 해서 학위를 해야 하겠다는 마음도 없고, 돈이 많아야 하겠다는 마음도 없습니다. 주님이 동행해주시면 됩니다. 제가 정말 예수님의 양이 된 것입니다. 양은 자기 목자 외에는 의지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저는 예수님만 원합니다.” 하고 고백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아멘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부담스럽고 짜증나고 답답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아직 예수님의 양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직 예수님의 양이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내가 예수님의 양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마음에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의미를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7절에서 “나는 양의 문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자신은 문이라고 비유하셨을까요? 문이라는 것은 원래 들어가고 나가는 곳입니다. 양은 이 문을 통과해서 우리 안에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이 문에 비유하신 것은 양인 그리스도인들은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가도 예수 그리스도로 나가고, 들어와도 예수 그리스도로 들어오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으로만 살아야 하는가? 왜 예수님께서 문이라고 말씀하시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살라고 말씀하시는지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절도와 강도와 같은 마귀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양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필요가 없다면 굳이 문을 만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8절에서 “절도와 강도” 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 그들은 양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한다”고 하셨습니다. 양은 예수님을 떠나서는 반드시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 알지 못하는 곳에서 마귀는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 인생과 신앙에 있어 도적질당하고 어처구니 없는 실패로 넘어집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합니까? 우리는 복된 가정을 꾸리고 싶고, 자녀들을 훌륭하게 기르고 싶고, 사업에 성공하여 명예로운 삶을 살고 싶고, 은혜 충만한 신앙 생활을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대부분 실패와 좌절의 연속입니다. 절도와 강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행복을 도적질하고 우리를 영적으로 죽이고 완전한 멸망으로 이끌어가려고 하는 마귀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누가 이렇게 되기를 원했습니까? 우연히 그렇게 된 것입니까? 마귀의 존재와 역사를 모르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마귀의 역사를 모르고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하면서 하나님만 원망합니다. 우리가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마귀는 아담과 하와에게 다가왔습니다. 승승장구하던 다윗 왕에게도 정욕의 시험으로 마귀는 역사했습니다. 절도와 강도인 마귀의 역사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 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좀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는 느낌을 받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요즘에는 특별히 그럽니다. 지금 우리 한국 사회 분위기가 이 말씀 앞에서 막 흥분하고 있는 때입니다. 어제도 저녁 뉴스 시간에 평론가 한 분이 기독교에 대해서 그 나름대로는 애정어린 충고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다른 나라에 가서 전도는 하지 말라고 하는. 다른 종교에도 성인으로 추앙받는 이들도 있고, 성경 말고도 고상한 학문도 있고, 교회 아니고서도 감동스런 일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아프카니스탄 문제로 선교 문제가 다시 뜨거운 논쟁에 휩싸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해외에 나가서 봉사하는 것은 좋은데, 그들도 다 종교가 있으니 예수 믿어야만 구원받는다는 전도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는 그들이 다 강도요 절도라고 했으니 이 성경을 읽으면 다시 불같이 들고 일어날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진리를 믿지 못하면 설명이 안됩니다. 참 답답합니다. 침묵으로 주님께 순종할 뿐입니다.

  길에서 남의 집 어린 아이를 데려다가 자기 집에 두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 주고 공부를 시켰다면 잘한 일입니까? 무서운 유괴 죄입니다. 그가 할 일은 그 아이 부모에게 데려다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8절) 라고 하신 말씀은 천국 문 앞에서 다 알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교훈과 가르침이라도 그것 때문에 영생의 복음을 듣지 못하여 천국에 가지 못하였다면 그것이 강도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와 공자와 부처와 마호멭은 절대로 같은 서열에 있는성자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복음이 있다면 가져와 보십시오! 모든 인류가 속죄함 받고 죄와 저주에서 구원받을 복음은 십자가 복음 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가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게 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돈 많이 번 것, 명예를 얻은 것이,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도적 맞고 강도 맞은 것임을 깨닫게 될 지 모릅니다. 만약에 세상에서는 성공했다, 명예롭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정신 팔려서 영생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다면, 그래서 결국 천국에 가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그에게 절도요 강도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모를 잃은 오누이가 있었는데, 억척같이 일하고 돈을 벌었으나, 어느 날 쌀 배달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오빠가 그만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빈소에서 그 여동생이 돈을 쮜어 뜯으며 소리 질렀습니다. “이 놈의 돈 때문에!” 죽음 앞에 서 보니 돈이 절도요 강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9절에서 문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자가 얻는 두 가지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구원을 얻는 복이고 또 하나는 꼴을 얻는 복입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문인 것을 깨닫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천국에 들어갈 때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죄가 있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 갈 수 없지만 예수님을 통하여는 누구나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속죄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살던 자가 천국에 들어갈 때만 예수님을 문으로 삼아 들어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문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이 세상에서도 예수님을 문으로 삼아 출입하던 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리는 함부로 양에게 달려들지 못합니다. 목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목숨을 내어 놓고 양들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지 않은 양에게는 문제는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었으면 예수님으로 살아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때부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문으로 삼아 사는 사람은 구원 뿐 만 아니라 풍성한 꼴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제가 신학교에 들어갈 때, 친구는 육군 사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장교의 삶이 어떻습니까? 평생 군복을 입고 군법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얽매어 사는 삶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랑스러워 했고 행복해 하였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들어갈 때 괴로워하고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군인이 되는 것도 이렇게 자랑스럽다면, 주의 종이 되는 것은 얼마나 자랑스럽겠습니까? 그러나 그 때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였던 때라 주의 종의 길의 영광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이왕 목사가 되었다면 성공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는데, 주님은 저를 진짜 종이 되라고 부르셨습니다. 그 때가 제 인생에 있어 가장 어려운 결단의 순간이었습니다. 저 자신의 끔과 계획을 다 버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왜 더 분명히 더 속히 응답하지 못했는가 부끄럽습니다. 쉽지 않았지만 그 선택은 결코 후회함이 없었습니다. 제 계획과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인생이 성공하는 데도 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행복한 가정이 이루어지는데도 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성공적인 기업을 꾸려가는데도 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목회에도 문이 있습니다. 교회도 문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어떤 것을 하고 싶다면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의 허가를 받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어 주시면 나가십시오. 그리나 만일 예수님께서 막으신다면 그만 두십시오. 이렇게 사셔야 합니다.

  90이 넘으신 장로 교회 원로 목사이신 방지일 목사님은 아버지가 먼저 믿으셨답니다. 방씨 문중에 종가집 아들이 믿는다고 해서 온 문중이 모여서 붙들어 매놓고 두들겨 패고, 물을 뿌려가며 때렸답니다. 짐승처럼 잔인하게 때리며 호적을 파서 내좇는다고 해도, 끝까지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매맞아 죽어가면서도 신앙을 지키는 것을 보고 고문하던 할아버지가 "내가 예수 믿을란다.“ 하며 그 아들을 풀어주었답니다. 그리고는 그 동네를 떠났답니다. 문중 재산 다 버리고, 모든 것 다 버리고, 거지 같이 나와서 산으로 가서 밭을 일구며 감자 심고 옥수수를 심었는데 은혜를 주셔서 농사가 그렇게 잘 되었답니다.
  그렇게 살다가 전쟁이 나서 남쪽으로 내려 왔는데, 방목사님을 통해 자녀들 중에는 85명의 목사, 박사가 태어났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철저히 양이 되어야 합니다. 양의 자세란 우리가 미련하고 약하고 고집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의 계획, 지혜, 고집을 내려 놓고 매 순간 목자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함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교역자 퇴수회 때 목적지인 설악산 숙소로 가는 중에 미시령 터널을 지나 내리막 길에서 버스 브레이크 에어가 빠지면서 비상 상황이 초래했습니다. 톨게이트에 다행히 차가 하나 없어서 통과한 후 겨우 엔진 브레이크로 차가 멈추었습니다.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차를 잘 정비하고 갔는데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상황이 벌어질 때, 차 중에서는 모두 통성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위하여 우리 자신을 위하여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모두 기도가 마친 후 상황이 얼마나 위기였는지 깨닫고 망연자실했습니다. 그리고 기도 중에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생명 싸개로 감싸주셨음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삶 자체가 항상 목자이신 예수님이 지키고 인도하시지 않으면 당장 엄청난 어려움에 빠질 수 있는 상황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렵거나 좌절하지 않을 것은 예수님이 우리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내일부터 기도하러 나오시기 바랍니다.

양은 걱정 근심하지 않습니다. 탄식이나 좌절도 하지 않습니다. 오직 기도하며 목자만 따라 갑니다. 그러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라고 노래한 다윗의 고백처럼 살게 됩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황폐한 땅 같아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있으면 구원을 얻을 뿐만 아니라, 영적 양식과 풍성한 삶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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