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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눅 14: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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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본  문  :  누가복음14:25-35

  우리는 오늘부터 제3기 제자훈련 사역반, 제4기 제자훈련 제자반, 제6기 성장반을 개강합니다.  우리 교회가 제자훈련에 들어가면 가장 긴장하는 사람은 목사들입니다.  지도하는 목사가 먼저 기도해야 하고, 철저히 교재를 준비하게 되니, 긴장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홍모목사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 예수의 제자로 훈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예수님이 나의 삶의 중심이 되시고, 나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나의 주인이 되게 하려면 그동안 주인 노릇하던 나를 바닥으로 내려놓고 진정한 주인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주인님에게 위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의 주님이라는 말은 나의 임금이요, 나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제자훈련에 들어가면 가장 힘들고, 어려운 사람은 목사라고 했습니다.  학생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자훈련하면 우리 학생들이 힘들지, 아니 목사님들이 힘들 것이 어디 있습니까?  같은 교재로 가르치는데 힘들 것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말씀 하실 것입니다. 

  지금 예배드리는 것처럼 목사와 우리 성도들이 조금 떨어져 있을 때에는 저의 진솔한 모습을 보여줄 수도 없고, 보실 수도 없습니다.  혹시 보신다고 하여도 제가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정도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훈련에 들어가면 함께 성경구절을 암송하고, 한 주간 QT하면서 받은 은혜를 나누고, 함께 읽은 책을 가지고 서로 나누고, 말씀을 깊이 공부하면서, 함께 찬송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제자로서 살아가다보면 저는 물론이고, 학생의 실력이나 변하지 않은 옛사람이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제자 훈련하는 목사가 먼저 제자로서 살아가는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제자로 살지 않으면서 누구보고 제자로 살라고 할 것입니까?  지도자는 먼저 자신이 제자로 살아가려고 힘쓸 때에 우리 함께 제자로서 살아가자고 가르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실 때에는 수많은 무리가 따랐습니다.  때로는 집안에 계시면 사람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25절입니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고 있었는지, “수많은 무리”,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라고 했습니다.  눅12:1에는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라고 하셨습니다.  수많은 무리,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으니, 예수님 앞으로 서로가 가까이 나오려고 하니 사람이 밟힐 지경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벳세다 광야에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람들을 먹이실 때에 여자와 어린 아이를 제외하고 5000명의 사람들이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제자로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다만 큰 무리였습니다.  큰 무리요, 군중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나오는 것은 다만 병을 고치기 위함이요, 한 끼 배부르기 위하여 따랐으며, 무엇인가 얻으려고 따랐습니다. 

  26-27절의 말씀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3절에서도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우리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모두 제자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을 돌이켜 보면서 엄청난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자는 그의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미워하지 아니하면”이란 말씀을 하셨다고 하여 사실 ‘미워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혈육과 자기 자신까지도 미워할 수 있는 철저한 각오,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한 일이라고 하면 자신의 소중한 것들은 다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미워하지 아니하면”이라고 하였는데, 이런 흑백 논리가 어디 있느냐고 하실 수 있습니다.  헬라어 미워하다는 말은 “미세오”라고 하는데, 적극적으로는 ‘미워한다’, ‘증오한다’, ‘포기한다’는 말이지만, 그것을 결단할 때가 올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나의 이익을 위하여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 좋아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기에, 그 분이 참 생명이시기에, 주님을 따른다는 그 목적을 분명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27절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마16:24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는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생각하는 십자가는 단단한 각오 정도로 생각하는데, 예전에는 십자가라고 하면 당연히 죽음을 생각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진 사람이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고 살아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 때문에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것은 영광이요, 자랑이요, 감사한 마음으로 죽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나도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겠다고 하는 마음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가져야 하는 자세입니다.  언제든지 죽을 각오, 다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의 핵심은 어디에 있고, 또 무엇입니까?  십자가와 부활에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근거를 십자가와 부활에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와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이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 신앙의 전부입니다.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이 그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사망권세를 깨치시고 살아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참된 인생이 무엇입니까?  진정 성공적인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잘 죽는 것입니다.  의미 있게 죽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죽음이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죽으셨던 것처럼 그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예수님이 그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말은 그 자리에서 나도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 주님은 그 십자가에서 죄로 인한 형벌과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심판을 다 담당하신 자리입니다.  당신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나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갈2:20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고 말하는 것은 곧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두 기둥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실 때에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만이 주님이 누리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그 각오를 단단히 하라고 다음 세 가지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제자의 길의, 그 첫째 비유는 망대 비유입니다.  28-30절의 말씀입니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이 망대를 세우는 말씀은 헤롯 일가의 건축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헤롯 일가는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여러 도시에 커다란 건물을 세웠지만, 대부분의 공사가 미완성으로 끝났습니다.  그래서 조롱과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우리 교회가 교육관을 건축하였습니다만, 시작하기 전부터 당회는 건축위원회를 구성하고 자금 계획을 세웠습니다.  우리의 가진 재정은 얼마이며, 전 교인이 헌금하면 어느 정도 할 것이며, 교회가 가용하여 쓸 수 있는 돈은 얼마인지 잘 판단하고 최대 10억 정도면 능히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교육관 건축은 빚지지 않고 임당 겸 헌당하겠다.” 라고 선포하고는 공사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어떤 무엇을 건축할 때에는 그 주인은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자기의 가진 돈으로 건물을 완공할 수 있을 것인지, 건축비용을 계산해볼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믿음만 강조하면서 예배당은 믿음으로 짓는 것이지 돈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100억대의 예배당을 건축하였지만, 수많은 성도들에게 피해를 주고, 완공은 했으나 몇 년 사용하지도 못하고, 은행에서 차압이 들어왔습니다.  그 좋은 성전이 성업공사로 넘어갔고, 경매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교단의 큰 교회가 입찰에 참가하였는데, 적게 써넣는 바람에 다락방 계열의 교회가 들어왔습니다.  그 교회는 다 뿔뿔이 흩어지고, 담임목사님은 목회를 접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망신입니까? 무슨 돈이든지 끌어다 예배당만 지으면 부흥될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지금은 그런 요행을 바라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목회자가 빚을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데, 잘 준비해서 우리의 역량에 맞게 건축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걸어갈 때에 그 길은 부귀영화를 누리는 길이 아니요, 자기의 목숨까지도 희생해야 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끝까지 따르고, 중단 없이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향한 뜨거운 열정을 보이던 사람이었는데 얼마 가지 않아 작은 유혹과 시험에 쓰러지는 것을 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 부귀영화가 있습니까?  주님이 마지막 가신 길에는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멸시와 모욕과 천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제자의 길은 끝까지 가야할 길입니다.  중도에 내려오면 비웃습니다.  조롱당합니다. 우습게 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종이요,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면서 끝까지 가지 못하고, 중도에 내려온다고 머리를 흔들며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제자로서 끝까지 걸어가야만 합니다.

제자의 길, 두 번째 비유는 전쟁의 비유입니다. 

  31-33절입니다.  “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전쟁에 대한 비유도 헤롯 안티파스의 어리석은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갈릴리지역은 로마의 한 주로 분류되었고, 헤롯 안티파스가 로마제국의 분봉왕으로 다스렸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본래 아라비아 왕 아레타스의 딸과 결혼하였습니다.  헤롯 안티파스가 로마를 방문하였을 때에 이복동생인 빌립의 집에 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의 아내는 안티파스와 빌립의 다른 이복형인 아리스토불루스의 딸이요 유대를 다스리는 아그립바 왕의 누이로 이름도 유명한 요부 헤로디아였습니다.  헤로디아는 자기의 작은 삼촌과 결혼하여 살았는데, 갈릴리의 왕, 그의 다른 삼촌 안티파스가 로마에 묵는 동안 안티파스와 눈이 맞았습니다.  이 집에서 안티파스가 이미 결혼한 헤로디아에게 청혼하였고, 서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사랑이라고 어쨌든 서로 사랑했답니다.  헤로디아는 남편을 버리기로 하였고, 안티파스가 아내와 이혼하고 다시 만나 결혼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안티파스가 갈릴리로 돌아와서 아내와 이혼하였습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따라온 헤로디아와 결혼하였습니다.  이때에 세례요한이 안티파스의 결혼에 대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책망했습니다.  그래서 거추장스러운 세례요한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때에 전쟁을 하는데, 친정인 아라비아로 돌아온 공주가 안티파스로부터 쫓겨 와서 아버지에게 원수를 갚아달라고 했습니다.  아라비아의 왕은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전쟁의 결과 아레타스가 승리하였고, 갈릴리는 초토화 되었습니다. 

  안티파스는 겸손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자존심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아레타스와 한판 전쟁을 벌였지만, 그야말로 중과부적이었습니다.  그는 적군을 과소평가하였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지고 한동안 어려웠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이런 어리석은 전쟁을 친히 겪고 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죽은 전쟁을 보면 구스 사람 세라가 유다를 치러 백만 명과 병거 3백대를 거느리고 올라왔는데, 아사왕이 이끄는 유다 군대가 한 사람도 살려 보내지 않고 다 죽였다고 합니다.  백만 명이 죽었다고 하면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손실이요, 인류의 재난입니다.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이 한판 싸우는데 남 유다의 아비야 왕과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이 생사를 걸고 싸웠습니다.  남쪽 군대가 40만 명과 북쪽의 여로보암의 군대 8십만 명이 싸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날 5십만 명이 죽고 나서 여로보암이 항복하였습니다.  유다의 죽음은 승리하였기에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거기도 10여만 명은 죽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말이 그렇지 백만 명이 죽고 오십만 명이 죽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칼과 창을 가지고 전쟁하는 것이 가장 무서운 전쟁입니다. 

  전쟁할 때에는 조속한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의 아군은 만 명인데, 적군은 2만 명이라고 하면 미리 화친을 청하는 것이 옳은 판단입니다.  미리 유감을 표하고, 사과하고 다시는 그런 일 하지 않겠다고 하였으면 큰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끝까지 싸워보는 것이요, 지혜로운 사람은 화해를 청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입니다.  우리 아군은 1만 명이요, 적군은 2만 명이라고 하면 아무리 전술이 좋아도 중과부적임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전쟁을 미연에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전쟁은 자존심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오기를 가지고 전쟁에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은 칼 가지고 하는 것이요, 총 가지고 하는 놀이입니다.  재미있는 오락이 아니라, 서로가 죽이는 가장 비열한 게임입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인간을 할 수 있는 최후의 선택이지, 진정한 평화를 원한다고 하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하기 전에 냉철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이 비유는 영적인 전쟁에서 타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해석하기 쉽지 않은 본문입니다.  이 싸움에는 승산이 있는지, 그 여부를 빨리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이 두 비유를 말씀하고 작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33절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27절의 말씀을 좀 더 구체화한 것이요, 망대의 비유와 전쟁의 비유의 결론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제자의 길을 가는 것은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하는 상황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는 각오와 결심으로 제자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무소유의 상태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에 대한 의식, 집착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제자의 길, 세 번째의 비유는 소금의 비유입니다. 
 
  34-35절을 봅니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팔레스틴의 소금은 사해의 소금물을 증발시켜서 만드는 것인데, 사해의 바닷물에는 염화나트륨이란 소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 성분들이 있어 먼저 결정되는 소금은 좋은 소금이지만, 나중에 바닥에 있는 소금 덩어리는 다른 물질과 같이 결정되므로 그 소금은 음식에 넣어 맛을 낼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소금은 자기를 녹이고 희생하므로 그 맛을 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를 희생할 때에 참된 제자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자는 제자다워야 하는데, 소유에 집착하든지, 명예만 중시한다든지, 자기의 이익을 위한 수단과 방편으로 삼는다는 것은 제자이기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이해하고 현명한 판단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누구의 강요나 협박에 의하여 하는 헌신이 아니라, 자기의 자유로운 의사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목회자이신 맥스 루카도라는 텍사스주의 오크힐스 교회의 담임목사입니다.  이 분이 쓰신 책 중에 대표작으로 “예수님처럼”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대로 두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이 예수님처럼 되기 원하신다.”라고 합니다. 

  1장 제목이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것인데, “딱 하루만 예수님이 당신이 된다면?” 그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루 24시간 예수님이 당신의 침대에서 일어나시고,  당신의 신발을 신고 걸으며, 당신 집에서 살고, 당신의 스케줄을 대신 맡는다면?  당신의 상사가 그 분의 상사요, 당신의 어머니가 그 분의 어머니요, 당신의 고통이 그 분의 고통이 된다면?”라고 쓰고 있습니다.

  우리의 건강이나 우리의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고, 우리의 스케줄도 달라지지 않고 예수님이 당신의 마음으로 우리의 삶을 대신 사신다고 하면,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가치관, 주님의 정신, 주님의 우선순위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의 마음으로 우리가 하루를 산다면 달라질 것이 있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는데,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로 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제자는 우선권을 오직 주님에게 두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나의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 주님의 진실한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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