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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벧전 1:13 ~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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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벧전 1:13 ~ 16)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Time) 최신호(9월 3일자)가 빈자의 성녀(聖女) 테레사(Teresa 1910-1997) 수녀의 '나의 빛이 되어라(Mother Teresa: Come Be My Light)'라는 새 책을 인용한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는 캘커타에서 봉사 활동을 시작한 1948년부터 1997년 사망할 때까지 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내적 고통을 지옥에 비교했고 한 때는 천국과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까지 드러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가 1979년 12월, 노벨 평화상 시상식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가 여러 명의 교회 신부들에게 보낸 40여장의 미공개 서한들은 그녀가 폐기되기를 원했던 편지들입니다. 그녀는 "내게는 그리스도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고 했는가 하면 미공개 편지에는 어둠, 외로움, 고통이란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금세기가 정한 가장 거룩한 성녀(a Holy Woman)였습니다. '거룩'이란 단어는 일반인들에게는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아니하는 용어입니다. 신의 존재와 천국과 지옥의 실존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결코 거룩이란 단어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창 1:26-27). 신의 형상은 타락한 후에도 잔존해 있습니다.
협의의 신의 형상은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입니다. 광의의 신의 형상은 하나의 물리적인 형상입니다. 즉 인간의 물리적인 본래의 품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협의의 신의 형상은 곧 윤리적 형상입니다. 이 윤리는 종교적 윤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지, 정, 의의 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삶입니다.
협의의 신의 형상이 상실되면 광의의 신의 형상이 막대한 영향을 받아 같이 부패하게 됩니다.

영감 받은 사도 베드로는 로마에서 시작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전국적으로 확산될 것을 예상하고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여러 교회들을 대상으로 한 회람(回覽)문서의 형태를 지닌 서신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종말론적 기대를 제외시키지 않았습니다.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은 험하고 악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결코 약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주의 날이 가까워 올수록 성도들의 삶이 비윤리적이거나 비도덕적이거나 반사회적이거나 비이성적인 것을 경계했습니다.
그는 율법에 근거하여 거룩하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신의 형상을 따라 행하라는 명령입니다.

Ⅰ. 종말신앙을 온전히 가지라는 말입니다.

본문 1장 13절에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하는 말은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전투적 자세를 말합니다. 주의 날을 소망하면서 깨어 근신하는 자세로 인내하며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재림의 날을 믿고 소망해야 합니다.
여기 『온전히 바랄지어다』라는 명령형은 완벽(perfection)이라는 말보다 더 역동적인 말입니다. 『온전』은 정상적이라는 'Sound unbroken'이 아니고 'built'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분명하고 확실한 종말신앙을 말합니다. 빈틈없는 종말신앙을 말합니다. 어떤 환난의 풍파가 몰아쳐도 넘어지지 아니하는 종말신앙을 기다리는 말입니다.

Ⅱ. 불신앙의 요소를 버리라는 말입니다.

본문 1장 14절에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자식』이란 말은 부모의 모든 재산권을 상속받는 자라는 일차적 의미 외에 부모의 인격이나 기질을 공유한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순종의 자녀는 불순종의 자녀와 비교됩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순종하는 자식이 된 것입니다. 『이전 알지 못할 때에』라는 말은 하나님을 모르는 영적 무지를 말합니다. 영적 무지는 사욕의 삶과 직결합니다. 왜냐하면 사욕이란 원시 인간의 본능적 삶입니다. 이것은 도덕적, 영적 퇴폐와 함께 우상 숭배와 육체적 쾌락주의를 지향합니다. 이러한 삶을 표준으로 삼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사욕을 좇던 옛 사람 곧 멸망의 자식(살후 2:3; 사 57:4), 죽을 자식(삼하 12:5), 진노의 자식(엡 2:3)의 때의 일을 과감하게 청산해야 합니다. 이제는 평화의 자식(눅 10:6), 빛의 자식(엡 5:8)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아버지의 유업을 상속받습니다. 그리고 아비의 유전과 전통을 지켜 나가는 것을 자랑으로 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함입니다(고후 5:15).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이전에 알지 못했던 불신앙 때의 일을 완전히 버렸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삶의 방향 전환입니다. 완전한 변화입니다.
불신앙의 때를 완전히 청산한 어거스틴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옛날에 자기와 같이 놀던 여자들이 '어거스틴! 어거스틴!' 하고 불렀습니다. 그때 어거스틴은 뒤를 돌아보면서 그 여자들에게 말하기를 "당신들과 함께 놀던 어거스틴은 여기 없다."고 했습니다. 한국교회사에 등장하는 김익두 목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스도에게로 방향 전환을 한 자들의 삶은 언제 어디서나 투명하고 과거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그 누구에게나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거듭나게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이렇게 자신이 변화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부담스러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랑스러워하고 그것으로 긍지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Ⅲ. 성화적 삶을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본문 1장 15절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1) 추상적 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화된 거룩입니다.
본문 1장 15절에 『…모든 행실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완전한 도덕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성화적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룩의 최종은 영화입니다. 완전한 거룩은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완전한 거룩은 죽음과 함께 영화로 성취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십니다(약 1:17).

계시록 4장 8절에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완전히 거룩하십니다. 그는 무죄성결 하시고 그의 속성은 죄를 지을 수 없고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거룩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거룩한 행실의 기대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사람은 거룩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할 동안 모든 행실에 거룩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2) 분명한 목적을 가진 거룩입니다.
본문 1장 15절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처럼 거룩하라는 말인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거룩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한 이 엄청난 요구는 막연한 요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는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거룩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는 삶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거룩은 세상과 분리되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일차적 목적과 함께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적 삶입니다. 그것은 바로 선교적 삶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사는 십자가의 희생적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삶입니다.

Ⅳ. 거룩은 신적 명령입니다.

본문 1장 16절에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레위기 11장 44절에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고 기록한 말씀의 인용입니다.
『거룩』이란 말 히브리어 카도쉬( )는 '분리'를 의미합니다.
여기에 거룩한 자는 보통 70인 역에서는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오성과 도덕적 완전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택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을 닮아 거룩한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거룩한 자가 되라』에서 '되라'의 헬라어 '게네데테'( )는 '기노마이'( ) '되다'의 단순과거 수동태 명령형입니다. 그러나 실제 활용적으로는 '기노마이'가 '되다'(become)의 의미보다 '이다'(be)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데 거룩한 자가 되라는 명령의 의미보다 이미 거룩한 존재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성경적 흐름입니다. 문자적 해석이 뒷받침되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미 거룩한 존재입니다.
비록 거룩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택한 백성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택자들의 잠시 동안의 연약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룩하다는 말은 불신자들에게 해당되는 용어가 아닌 것만큼 그리스도인들이 거룩의 단어적 의미를 이해하는데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거룩이란 필연적으로 성도들이 함께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거룩한 것과 본문의 대지의 명제는 동시성을 띠고 있습니다. 종말신앙을 확실히 가질 때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거룩한 자는 종말신앙을 소유한 자입니다.
불신앙적 요소를 버려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양보나 타협이 없는 성화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성화적 삶은 추상적인 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화된 거룩입니다. 이 거룩은 분명한 목적이 있는 거룩이어야 합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거룩은 선택적 명령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되는 당위적 명령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가리켜 베드로전서 2장 9절에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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