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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백성과 회복 (창 17: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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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과 회복 (창 17:1-27) 

세상의 영웅호걸들과는 달리, 믿음의 조상 아브람이 후손들에게 남긴 것은 놀랄만한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계시입니다. 그의 전 생애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점점 더 깨달아가는 삶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12장에서는 단지 하나님의 이름만 불렀으나, 14장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 했고, 15장에서는 ‘주 여호와’라 칭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자신의 종 됨을 고백했습니다. 16장에서는 하갈을 통해 간접적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하나님을 알아가던 아브람에게 오랜 침체 기간이 생깁니다.

1a절을 보면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16장 마지막 절에서 아브람은 86세였는데 갑자기 99세로 훌쩍 건너뜁니다.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에 13년이라는 긴 침묵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는 어떤 계시도 주시지 않았고, 아브람 역시 하나님에 대해 더 이상 깨닫는 바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흘러 보낸 시간들에 대해서 한 마디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하나님 앞에서’ 행하지 않은 시간, 그래서 기록될 가치가 없는 시간들이이라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침묵을 깨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1b).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전능한 하나님’(엘 샤다이)이심을 가장 먼저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리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고 살고 있는 아브람 때문입니다. 아마 아브람은 큰 허물을 범한 상황에서 더 이상 약속의 자녀를 바랄 염치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럴 자격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브람은 노년에 얻은 늦둥이 이스마엘에게 푹 빠졌습니다. 아들 앞에서 사는 동안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리라는 희망을 접었습니다. 부르심의 소망, 사명, 복의 근원, 이런 말들이 지난날의 아련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18)라는 구절에 아브람의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c)고 말씀하셨습니다. ‘완전하라’(타밈)는 흠 없이 되라는 뜻인데, ‘정상적이 되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13년 동안 아브람이 윤리적인 큰 잘못을 범한 일은 없어 보입니다. 신앙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소박한 일상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으며, 이스마엘 하나로 족한 줄 알고 욕심 없이 살았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고상한 아버지의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기준으로 평가하면 비정상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아기자기한 기쁨 속에서 사명감 없이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시간만 흘려보내는 것은 하나님 백성다운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그분 앞에서’ 다시 정상적으로 회복되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아브람과 그의 후손 사이에 “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2, 9). 이 언약은 하나님께의 언약이므로 “영원한 언약”이며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그 후손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내용입니다(7, 8).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회복시키기 위한 첫 번째 조치는 그의 이름을 고쳐주신 일입니다. 이름이란 한 존재를 대표합니다. ‘고상한 아비’라는 뜻의 ‘아브람’에서 “열국의 아비”라는 뜻의 “아브라함”(4, 5)으로 개명하심으로 언약의 내용을 전 존재로 드러내는 삶을 살게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후손들이 번성할 것과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6, 8).

저는 오늘날의 교회가 자신을 대표하는 성격을 스스로 바꾸고 있음이 심히 염려스럽습니다. 세상과 구별되기보다 세상을 따라가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촉구하기보다, 아기자기한 삶의 만족과 기쁨을 좇도록 유혹하는 신앙서적들과 설교들이 넘쳐납니다. 현실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아브라함’이 아닌 ‘아브람’으로만 살도록 만듭니다. 신앙과 도덕성은 있지만 사명감과 부르심의 소망은 상실한 신자로 살도록 만듭니다. 신앙을 일신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변질시키고, 장차 하나님께서 주실 참 기쁨과 참 만족을 기대하는 대신에 이 땅에서의 적당한 기쁨과 만족에 안주하도록 가르쳐 지는 것이 참으로 염려스럽습니다.

사람이 죄와 허물을 남겼다면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집니다. 회개한다고 해서 전혀 없었던 일처럼 원상 복구된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허물을 남겼다면 세월을 낭비하지 않고 순종하며 장성해간 사람과 똑같을 수 없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저렇게 요구할 아무런 자격이 없음을 깨달았다는 것은 옳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두신 하나님의 언약이 취소라도 된 것처럼 모든 소망을 잃어버린 것은 옳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인간의 죄와 허물 속에서도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아갈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소박한 일상의 삶에서 행복을 누린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하나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 만큼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브람처럼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부르심의 소망마저 상실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매순간 자기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의식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삶의 태도가 자신을 대표하게 해야 합니다. 고상한 아비의 삶도 나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삶을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행하는 삶이 아니라고 평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대표하는 성격, 우리 교회가 대표하는 성격이 과연 어떠한지 점검하면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행하려고 힘쓰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더 이상 마음으로 기대하지는 않고 있는 이상한 상태가 될 때가 있습니다. 야고보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믿고 싶은데 믿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믿쑵니다’하고 힘주어 기도해보아도, 거울을 보면서 ‘나는 성공한다’고 자기 암시를 무수히 해보아도 믿어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땅히 깨달아야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매우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하신 것을 철저히 성취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 두 번째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아브람의 가솔 중 모든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10)고 명하시고, 이는 “언약의 표징”(11)이라 하셨습니다. 할례는 피 흘림을 통해 죄책과 오염을 제거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음을 상징하는 거룩한 성례입니다. 이것이 신약에 와서는 세례라는 형식으로 바뀌었지만 하나님의 백성임을 상징하는 표징이라는 점에서 두 가지 모두 동일합니다. 두 번 세례 받지 않는 이유도 두 번 할례를 행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자칫 간과하기 쉬운 점은 아브람과 그의 약속하신 자녀만 할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12)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아브람의 혈통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지 않으셨음을 말해줍니다. 또한 할례는 이미 하나님께서 백성으로 삼은 자들이 받아야 할 표징일 뿐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는 수단은 결코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상징이라고 해서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까닭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14)는 말씀의 엄위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살에 새겨주심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하신 후에 취하신 세 번째 조치는 사래의 이름을 “사라”로 개명하신 일입니다(15). 둘 다 왕비라는 뜻이지만 한 족장의 왕비라는 의미에서 민족의 열왕들을 낳을 “열국의 어미”(16)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브람에게 종속된 사래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동일한 언약의 대상이며 이 언약을 후세에 전해야 할 동일한 사명을 가진 존재임을 다시금 분명하게 명시하셨습니다.

아브람을 회복시키시고 신뢰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조치들에 대한 아브람의 첫 반응은 엎드려 웃으면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17) 나이가 늙어 기력이 쇠했다는 자연 현상은 하나님이 만드신 법칙인데 이미 뭘 더 바라겠는가 하는 심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19)고 확정해주셨고, 내년 이 맘 때에 낳을 그 아이가 하나님의 언약을 계승할 자임을 알려 주셨습니다(21).

그러자 아브라함의 반응이 달라졌습니다. 22-2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그대로 순종합니다. 집안의 모든 남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할례를 받게 했습니다. 현실적으로만 보면 100세 된 남편과 경수가 끊어진 90세의 아내 사이에 자식이 생긴다는 것은 1%의 가능성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다시금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 앞에서 하나님 백성답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브람은 회복되었고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그의 삶을 통해 드러내며 후세에 알리는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행복을 누리는 것이 신앙의 궁극적 목적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99세의 아브람에게 나타나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아브람은 그의 삶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전 삶을 통해 드러내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온전한 모습이므로 그를 회복시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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