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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모세는(2) (히 11: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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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모세는(2) (히 11:24~28)

부끄러운 이름

외국에서 오래 산 한국 분을 만나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이름인 코리아(Korea) 혹은 꼬레아(Corea)가 외국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있기 전만 해도 많은 외국인들이 코리아가 어디 있는 나라인지도 몰랐다고 하는데, 올림픽을 치루고 2002년 월드컵을 일본과 공동개최하면서 코리아, 꼬레아라는 이름이 많이 알려지게 되었고, 지금은 '코리아' 하면 경제 기적을 일군 나라, 최고품질의 휴대전화를 만드는 나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되었다는 그 분 말을 듣고 대한민국 국민인 것이 꽤 뿌듯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방송을 보며 이런 뿌듯함이 한 순간에 무너졌습니다. 경제가 발전하여 세계 곳곳에 한국 기업이 진출하게 된 것까지는 좋은데 한국 남성의 추한 성매매 행각이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 러시아, 베트남의 유흥가에서는 성매매를 하는 한국 관광객을 흔하게 볼 수 있고 심지어 현지처를 두고 생활하는 기업인도 있다고 합니다. 가장 충격적인 소식은 우리나라 원양어선의 기항지인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키리바시' 이야기입니다. 이곳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 선원들의 청소년 상대 성매매가 심각한 문제가 되어서 키리바시 정부가 2003년 한국 어선의 정박을 금지하기까지 했다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현지에서 한국 선원을 뜻하는 '꼬레꼬레아'란 말이 성매매를 하는 여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지 오래라는 것입니다. 이 '꼬레꼬레아'라는 이름이 '부끄러운 한국, 부끄러운 한국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잠시의 쾌락을 위해 자신뿐 아니라 조국의 이름까지 더럽히는 부끄러운 한국인 이야기입니다. 잠시를 위해 영원을 희생한 어리석은 사람들 이야기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잠시와 영원의 차이

지난주에 모세의 믿음에 관해 말씀을 나누면서 첫 번째 질문으로 '모세의 정체성'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모세가 비록 애굽의 궁전에서 왕자로 자랐지만 자신이 히브리인임을 잊지 않은 것은 그를 키운 친어머니가 "너는 애굽 사람이 아니라 히브리 사람"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모세처럼 오늘 우리들 자신도,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도 내가 비록 이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말씀 드렸지요.

오늘은 계속해서 모세의 믿음의 특징에 대해 알아봅니다. 모세가 애굽 궁전의 왕자 자리를 포기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되어 고생길로 가기를 자처한 두 번째 이유는 잠시와 영원을 구분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4절부터 26절까지 다함께 읽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5절을 보면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지금 내가 애굽 궁전에서 누리는 이 부귀영화와 편안함은 '죄악의 즐거움'이라는 것입니다. 이 '죄악의 즐거움'이라는 말은 '세상 즐거움'이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찬송가 94장에 이런 가사가 나오지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여기서 '이 세상 부귀'나 '세상 즐거움'이 다 같은 뜻입니다. 세상에는 즐거운 일들이 제법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돈 벌어들이는 데서 즐거움을 찾고, 또 어떤 분들은 권력이나 지위를 얻는 데서 기쁨을 찾습니다. 자녀를 통해 기쁨을 얻을 때도 있고 운동이나 취미생활을 통해 즐거움을 찾는 분도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술 취함과 방탕 속에서, 혹은 육신의 쾌락과 성적 타락에서 기쁨을 찾는 이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일들에 전혀 기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제법 재미도 있고 즐겁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세상 즐거움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때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이 순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괴로울 때 술을 마시면 잠시 고통을 잊을 수 있지요. 하지만 술이 깨고 나면 더 큰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약에 빠져드는 이유는 환각에 빠져 잠시 고통을 잊고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약의 약기운이 떨어지고 나면 잊으려고 했던 그 고통보다 수십 수백 배의 고통을 느끼며 마약중독과 폐인이 되는 무서운 결과를 맞게 됩니다. 세상 즐거움이 다 이와 같습니다. 비록 잠시의 즐거움과 기쁨이 있지만 그 효과는 잠시에 불과하고 그 잠시가 지나고 나면 한없는 고통과 아픔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추구하는 세상적인 즐거움, 세상적인 만족에 우리의 목표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모세는 이것을 잘 알았습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애굽 궁전, 그곳에서 내가 누리는 왕자로서의 화려하고 편안한 삶이 결코 싫어서가 아닙니다. 참 즐겁고 행복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것이 잠시의 즐거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내가 왕자로 누리는 행복이 너무 큰데, 그러면 그 다음은 뭡니까? 그냥 그렇게 살다가 궁전에서 죽는 것입니다. 혹시 왕위 다툼 속에서 다른 왕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혹시 그 치열한 왕위 다툼 속에서 다른 왕자들을 다 죽이고 왕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렇게 왕에 오른다면 남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왕의 지위와 권력, 엄청난 부귀와 영화, 세상 사람들은 다 부러워 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얼마나 허무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큰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는 솔로몬 임금도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모세는 지금 내가 누리는 이 즐거움이 잠시의 헛된 것에 불과함을 알았기에 영원한 것을 찾아 떠난 것입니다. 그 영원한 것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고 저 광야를 지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물론 그 길은 오늘 말씀 25절에도 나온 것처럼 '고난의 길'입니다. 또 26절에 나온 것처럼 '수모의 길'입니다. 하지만 이 고난과 수모에도 불구하고 그 길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이요, 영원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길임을 알기에 기꺼이 그 길을 간 것입니다. 순간의 쾌락과 즐거움이 아닌 영원한 즐거움을 선택한 것이지요. 그래서 26절에 모세가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 즉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바라보았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렇게 순간이 아닌 영원을 택한 것이 모세의 믿음의 두 번째 특징입니다.

여러분도 모세처럼 현명한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고 권력을 맛보고 쾌락과 즐거움을 누린다 해도 그것은 정말 잠시에 불과합니다. 모두 풀의 꽃처럼 곧 시들고 맙니다(약 1:1). 그래서 잠시에 불과한 허무한 세상 즐거움에 절대 우리의 영원한 목표를 둘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여기에 영원한 소망이 있음을 깨달으면, 이 길을 가면 하나님이 더 큰 상급을 주심을 깨달으면 과감하게 세상 즐거움을 포기하고 그 고난의 길을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느니라(롬 8:18)

보이는 자가 아닌 보이지 않는 분을 두려워 함

이제 27절로 넘어가면 모세의 믿음의 세 번째 특징이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여기 나타난 모세의 믿음은 '보이는 사람이 아닌 보이지 않는 분을 두려워하는 믿음'입니다. 모세가 믿음을 가지니까 애굽 왕 바로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권력을 무서워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분, 즉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바로 왕이 아무리 협박을 하고 위협을 해도 과감하게 애굽을 떠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모세는 눈에 보이는 사람을 무서워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장에 보면 모세가 동족 히브리인을 때리는 애굽 사람을 쳐 죽입니다. 용감하지요. 그런데 출애굽기 2:12에 보면 모세가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일 때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죽였다고 나와 있습니다. 즉 누가 볼까봐, 사람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날 그곳에 다시 갔을 때 동족인 히브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 말리자 그 중에 한 사람이 "네가 애굽 사람 쳐죽인 것을 안다"고 협박하자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갑니다. 15절에 보면 "바로의 낯을 피해" 도망갔다고 합니다. 바로 왕이 알면 자신은 살인자가 되어 사형을 면치 못할 테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모세는 처음에는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고, 바로 왕을 두려워하고, 보이는 사람을 무서워 한 인물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도 모세처럼 무슨 나쁜 짓을 할 때, 죄를 지을 때 좌우를 부지런히 살피지 않습니까? 혹시 누가 볼까봐 들킬까봐 말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큰 실수를 했습니다. 좌우는 살폈지만 위는 살피지 않았습니다. 위에서 누가 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보시지요. 사람은 못 보더라도 위에서 하나님이 보고 계시지요. 이것을 잊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모세처럼 죄 지으면서 좌우만 살핍니다. 사람들이 알까봐 그것만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정작 두려워해야 할 분은 위에서 보고 계신 하나님입니다. 왜?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은 아시니까요.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운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아시니까요.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좌우만 살피는 사람이 아니라 위도 살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미국 윌로우크릭 교회 빌 하이벨스 목사님이 이런 책을 썼습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Who You Are When No One's Looking) 우리의 진정한 인격은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도 없을 때라도, 아무도 안 볼 때라도 하나님이 아시고 하나님이 보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바로 이런 인격,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미디안 광야로 도망한 후에도 모세는 별로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했다는 것은 아무도 안 보는 곳으로, 아무도 자기를 알아 볼 수 없는 것으로 도망갔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그 아무도 안 만날 줄 알았던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라"고 명하십니다. 그랬더니 온갖 핑계를 다 대면서 피하지 않습니까?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1)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내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출 4:1)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 4:10) 등등 끊임없이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려 하는데 이 핑계들을 가만히 보면 모세의 마음속에 지금 큰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음을 눈치 채게 됩니다. 보세요.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것은 겸손함이 아닙니다. 실은 "내가 바로가 무서워서 지금 미디안 광야까지 도망 와서 40년을 살았는데 왜 또 바로에게 돌아가라는 말입니까?" 하는 뜻입니다. "그들이 내 말을 안 믿으면 어떻게 하지요?" 여전히 사람들 눈치나 살피고 겁내는 모습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훈련 받았어도 여전히 사람을 두려워하고 눈치나 살살 살피는 모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핑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모세를 지명하여 보내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출애굽기 5장에 가면 이렇게 겁 많고 바로를 두려워하던 모세가 바로 앞에 당당히 서서 "내 백성을 보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절). 완전히 달라진 모습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 바로 왕을 두려워해서 온갖 핑계를 대고 있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출애굽기 3:12에서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시자 용기가 생긴 것입니다.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바로 왕이나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또한 그분만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 바로 앞에서 그토록 당당하게 큰소리 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로가 온갖 협박을 해도 꿈쩍도 안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고자 부르실 때 얼마나 많은 핑계를 대고, 얼마나 다양하고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그 부르심을 회피하는지 모릅니다. "제가 바빠서요," "돈이 없어요," "가족 때문에요," "애들이 어려서요," "건강 때문에요," "너무 나이가 많아서요." 등등 말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핑계들 뒤에는 일종의 두려움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괜히 하나님이 가라는 길로 가다가 힘들까봐, 손해볼까봐, 무엇보다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걱정되고 두려운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이나 이익, 사람들을 무서워해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게 됩니다. 그래서 기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이 두려움 없는 담대함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바로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은 모세의 부모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23에 보면 바로가 아들을 낳으면 다 죽이라고 했지만 모세의 부모는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아서" 모세를 숨겼다고 했습니다. 부전자전, 그 부모에 그 아들입니다. 부모의 아름다운 믿음은 유전이 됩니다. 우리도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보이는 것들과 다른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믿음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

마지막으로 모세의 믿음의 특징 네 번째가 28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습니다.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모세는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제정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애굽에 내려진 열 가지 재앙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홉 가지 재앙에도 바로 왕의 완악한 마음이 바뀌지 않자 하나님은 마지막 열 번째 재앙으로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이시게 되는데 이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라. 그러면 내가 애굽을 칠 때에 그 피가 발라져 있는 집은 넘어갈 것이다."(출 12:1~13 요약) 그래서 이때부터 유월절(逾越節, Passover=넘어간다는 뜻) 절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 유월절 절기를 제정하여 지키게 한 것이 왜 그리 중요한가? 이 유월절 어린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니 죽음의 재앙이 넘어갔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않고 생명을 얻게 된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즉 히브리서는 모세가 유월절을 제정하고 어린양의 피를 바르게 한 것이 단순히 재앙을 면하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고 모세에게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 증거가 26절에도 나옵니다.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말씀했는데 모세는 믿음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수천 년 전에 이미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하나님의 아들이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 그 피를 뿌리심으로 자신들의 생명을 구원하실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그래서 히브리서는 모세의 믿음을 그토록 크다고 본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의 믿음의 색깔은 너무도 다양합니다.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전당>에 나온 것처럼 사람들마다 다 다르고 특징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믿음의 모양과 색깔이 달라도 한 가지만은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는다는 사실,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피가 아니고서는 죽음을 면하고 생명을 얻을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민족마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사람마다 신앙의 색깔이 다르지만, 또 장로교니 감리교니 침례교니 하는 교파들마다 교리도 조금씩 다르지만 인종과 민족과 교단을 초월해 이 사실 한 가지, 즉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 받고, 예수님의 피가 아니고는 십자가가 아니고는 생명이 없다는 사실만은 똑같습니다. 여기서 벗어나면 이단이요 잘못된 신앙이 됩니다. 모세는 그 오랜 옛날 유월절 절기와 어린양의 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진리를 가르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실만은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입니다. 오직 예수님과 십자가만 믿고 의지해서 구원 받고 영생을 얻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모세는 출애굽 당시에 그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절기를 지키고 그리스도의 피에 의지하도록 가르칩니다. 아무리 바빠도 이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신앙'과 '예배'가 최우선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이 바쁘고도 즐거운 추석 명절에 예배에 오신 여러분은 참 잘 하신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예배가 최우선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예배중심, 하나님 최우선의 믿음을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 자녀들에게도 가르쳐야 합니다. 세상 무엇보다 믿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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