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교사기도회] 생명을 낳는 영적산파 (출 1:15-22)

  • 잡초 잡초
  • 485
  • 0

첨부 1


본  문 : 출애굽기 1:15-22
제  목 : 생명을 낳는 영적산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큰 일을 위해서 사용되어진 대부분의 사람들의 한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그들은 거의다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보면 그에게 특별나다는 구석이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나이 80이 넘도록 자녀하나 생산하지 못하는 불임부부였지 않습니까? 고대에 아들이 없다는 것은 신의 저주처럼 여겼던 그런 시대에 이들이 이렇게 살았다는 것은 굉장한 스트레스였을 겁니다. 야곱, 하나님의 축복을 잔머리 굴려서 착취해볼려고 별 궁리를 다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제가 볼 때는 계획적이었던 것 같은데, 형이 늘 배고파 헐레벌떡 오니깐 그 타이밍 맞추어서 따끈따끈한 팥쭉 끌여놓고는 그걸로 장자명분을 사지않습니까? 너무 기분좋아서 보너스로 떡까지 같이 줬다고 성경에 나옵니다. 삼촌집에서 사기쳐서 동물들 싹쓰리해오고 말입니다. 요셉, 알다시피 엄마가 네명이나 되는 역기능가정에서 자랐던 인물이었습니다. 11번째 아들로 태어났고 아버지가 편애를 했기 때문에 오히려 형들의 미움을 받고, 게다가 고자질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 아니었습니까? 다윗 생각해봅시다. 사무엘이 기름부을 때에 식사자리에 초대조차 되지 못한 인물이었고 막둥이었습니다. 그냥 양이나 따라다니는 아버지 이새의 눈에 들지 않고 형들 눈에도 차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전쟁터에 도시락 들고 가니깐 하는 소리가 전쟁구경왔다고 평가받을 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사사시대에 귀하게 쓰임받은 사사들도 보십시요. 외손잡이를 쓰고 소모는 막대기로 사람을 죽이고 기드온 같은 경우는 포도주틀에서 타작하는 겁많은 사람이었고 연약한 여자를 사사로 쓰기도 하고 말입니다.

보세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평범할 정도가 아니라 소심하고 성품이 못되먹고 문제가 많은 자들까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만 보더라도 뭐 특이하게 걸출한 제목이라고 생각될 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평범한 그대로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들을 부르신 이유가 뭔가를 가만히 생각해보게됩니다. 그것이 뭐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어떠함에 의해서 자신의 어떠함이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에 하나님자신은 종속되지 않으시고 인간의 처지나 환경에 의해서 제한되지 않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들어 자신의 영광을 취하실 때에 항상 약자들을 들어서 사용하십니다. 뭔가 있고 재주가 있는 사람들도 있고 사회적 신분이 높은 자들도 사용하십니다. 그런데요 원칙이 있습니다. 강하고 힘있는 자들을 사용하실 때도 그냥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자고백을 하게 만들어서 사용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극히 평범한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내가 평범하지 않고 범상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줄은 모르겠습니다만은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범상함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을 깨뜨리셔서 사용하십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인데.. 여기에 인간의 가능성이나 인간의 재주가 능력으로 역사되어질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단지 믿는 것 뿐입니다. 믿음 마저도 하나님께서 그냥 주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자랑할 것이 없고 사람의 강함이 절대로 하나님의 능력을 불러일으킬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십부라와 부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도 지극히 평범, 아니 평범보다도 굉장히 천한 느낌마저 드는 그런 사람같은 느낌이 듭니다.

우리를 별로 이 두 사람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산파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평범하기 때문에 그다지 위대한 업적을 남긴듯한 인상도 별로 주지를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별로 기억해주지를 않습니다. 모세는 기억하고 다윗은 기억해도 이 두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교사라는 자리가 이들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별로 폼도 나지 않고 일을 제일 많이 하면서 빛도 나지 않고 뭐가 거리워진 듯한 느낌을 많이 받게 되는 겁니다. 뭐 청년부나 전도회나 회장같은 거하고 이러면 좀 잘 드러나고 성가대를 하면 얼굴도 드러나고 얼마나 멋찝니까? 예배실에 줄을 지어서 폼나게 들어가면 빵빠레같은 찬양도 나오고... 좋잖아요. 가운도 있고.. 교사들은 가운도 없습니다. 예배당 들어갈 때에 팡파레같은 것도 없어요. 들어가자 말자. 왁작지걸한 아이들 붙들고 앉아라 조용해라 들어라 노래불러라 박수쳐라.. 뭐 이렇지 않습니까?  말은 얼마나 많이 해야됩니까? 성가대나 이런거는 함게 똑같이 부르니깐 시끄럽지 않은데.. 이건 수십개 반이 전부다 다른 나팔을 불기 때문에 시끄러워서 내 목소리를 키우지 않으면 안되지요. 주중에는 전화라도 한통해야되지요. 에너지 소비가 정말 많이 되는 일입니다.

폼나지 않는 산파하고 비슷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산파들을 통해서 위로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은 이 두 산파의 이름까지 기록하면서 모든 믿음의 후대들이 이들을 기억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십부라와 부아 뜻이 뭔줄 아십니까?

십브라는 맑음이라는 뜻이고 부아는 번쩍번쩍하다는 어근에서 나온 의미로 찬란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교사는 표시나지 않게 번쩍번쩍이는 자들이고 표나지 않고 맑은 자들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두 산파, 별로 있어보이지 않는 이 두사람을 통해서 교사들로서 가져야할 몇가지 영적교훈들을 누리고자합니다. 특별히 이들이 생명을 낳는 일을 하는 자드이라는 점에서 교사들이 가져야할 생명의 사역에 깊은 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저항정신입니다.

8절에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질문 던지겠습니까? 애굽의 바로가 요셉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절대로 아니라고 봅니다. 이 표현은 과거의 사실과 요셉을 몰랐다는 말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요셉을 무시했다는 의미입니다. 새 왕이라고 할 때에 ‘새’라는 말은 히브리어 하다쉬인데, ‘다른’의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왕이 새워졌다는 것이고 ‘일어나서’는 반대하여 일어났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결국 이 왕은 마치 앞의 왕조를 깨뜨리는 다른 왕조가 일어났다는 말과 같습니다. 학자들은 요셉 때는 힉소스왕조였는데, 뒤를 이은 애굽18왕조가 등장했고 이 왕이 그 중에서도 투트모세1세로 봅니다. 이 왕조가 뭘 반대해서 일어났겠습니까? 새 왕이 일어나서 바로 히브리 민족을 핍박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히브리 민족을 반대했겠습니까? 단순이 그런 문제가 아니구요. 히브리 민족과 함께 상생하면서 살아가는 애굽의 왕조를 반대하는 겁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요셉의 정신을 거부한 겁니다. 그리고 요셉을 거부한 것은 하나님을 거부한 것과 같습니다.

결국 뭡니까? 새로운 왕조를 뒤집은 투트모스1세는 뒤집혀진 생각을 가졌다는 겁니다. 그는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히브리 민족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기분 나빳습니다. 요셉의 정신이 싫었고 하나님의 방식이 싫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이렇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의 번성을 싫어합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길러내야하는 겁니다.

마귀가 하는 일이 딱 한가지를 말하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피고 살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를 죄로 몰어넣고 더러운 문화에 문들게 하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녀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합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을 세상의 힘으로 죽일려고 합니다.

보세요. 16절에 아들을 낳으면 죽여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이 번성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류창조 이후의 사명인데, 생육과 번성을 막아버립니다.

이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저항정신입니다. 이 세대의 흐름을 반대하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십부라와 부아는 이런 저항정신이 있었습니다. 신과같은 바로가 명했는데, 이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 아닙니까? 바로를 상대로 저항한다고 되는 일이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보세요. 지금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약점이 뭡니까? 세상에 들어갔을 때에 저항할 능력이 부재되어 있다는 겁니다. 원래 개신교 프로테스탄트는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입니다. 중세1000년 동안에 말씀과 동떨어졌던 기독교에 성경을 펼쳐들고 다시 돌아가자고 저항했지 않습니까?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일려고 안들인데, 이런 시대적 정신을 거부하고 저항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사사시대의 마지막 시대를 살았던 사람인데, 그 시대가 사사마저 타락한 시대 아닙니까? 마지막 사사에 해당하는 엘리 보세요. 성전에서 제사를 더럽히는 아들들을 말리지 않습니다. 세상의 방식을 취하는 아들을 보고도 제사장이면서 사사였던 그가 거부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습니다. 살만 뒤룩뒤룩쪄서 영적비만에 빠졌고 기도하는 한나를 술먹었고 평가하는 영적안질에 걸려서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는 분별력이 막혀버린 사람이었습니다. 한나가 왜 아이를 달라고 했습니까? 단순이 자식없는 설움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시대의 흐름을 아파하고 시대의 질병을 저항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나에게 아이를 주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하면서 나실인의 서원,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을 서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무엘을 얻었을 때에 그를 어떻게 합니까? 젖떼기를 기다렸다고 하나님의 성전에 보내버립니다. 하나님께 드립니다. 사무엘의 이름이 하나님게 구했다는 뜻 아닙니까? 그 시대가 하나님 찾지 않는 것에 저항하는 이름입니다.

우리는 이런 저항정신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저항하면서 우리들에게 맡겨지 학생들을 정말 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런 저항정신이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17절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고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저항정신이 발생한 것입니다.  바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왕이고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보잘것 없는 사람입니다. 이 둘이 싸우면 누가 더 강합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산파가 더 강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한 사람이 있으면 한 나라와 싸워서 이길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11:33절에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라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한 사람이 있으면 나라도 이깁니다. 바로도 이기고 왕도 이깁니다. 하나님 두려워하는 것이 이런 겁니다. 세상의 논리와 힘을 NO라고 부정하는 것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거부권을 행사하고 당당히 거절하고 당연히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 안에 시대의 뒤집어진 가치 앞에서 저항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다른 거 하나도 없어도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만 있으면 내 자신을 유지시켜줄 데이터가 바닥나더라도 세상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뜻을 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들이 뜻을 정했다는 말이 직접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애굽왕의 말을 거역한 것은 그냥 마음에 감동이 되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뜻을 정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뜻을 정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뜻없이 살아가고 역전된 가치, 뒤집어진 세상속에서 뒤집어진 채로 살아가는 이유가 뭔줄 아십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왜 힘없이 살아가는 줄 아십니까? 뜻을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부딪힐 때에 미리 준비해야할 것이 뜻을 결정하는 겁니다. 지금 당장에 뜻을 결정해야합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친구들이 바벨론 땅에 포로로 갔을 때에 제일 먼저 했던 것이 뭡니까? 뜻을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뜻을 정하는 자에게 얼마나 놀라운 축복을 주시는 줄 아십니까? 다니엘 1:9절에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고 합니다. 은혜와 긍휼입니다. 이건 오늘 산파들이 뜻을 정했을 때에도 똑같이 주신 축복입니다. 20절에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 뜻을 정하면 은혜를 주십니다.  이것과 함께 성경은 한가지 더 기록합니다. 1장 21절을 보십시요.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고 합니다. 여기에 경외하다는 말과 앞에 살핀 두려워하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같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함으로 뜻을 정했을 때에 어떤 축복을 받았습니까? 왕성함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뜻을 정했을 때에 어떤 복이 임합니까? 히브리 소년들이 바벨론 땅 한복판에서 왕성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왕성하다는 말의 원래의 의미가 뭐냐하면  확립하다, 기반을 잡다, 이런 단어입니다.

왕성함이 뭡니까? 무작정 번창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성함이란 불편한 세상속에 들어가서 그들 속에서 자리를 틀어 잡는 것입니다.

둘째, 사명정신입니다.

십부라와 부아가 하는 일이 뭡니까?  아이받는 일입니다. 이들은 아 받는 일 외에는 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사명으로 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밥벌이로 아이를 받았다고 하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생존만을 위해서 살아가면 뭐든지 합니다. 이게 세상의 뒤집어진 가치입니다. 생존, 잘 먹고 즐기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것이 세상의 뒤집어진 가치입니다.

이런 뒤집어진 가치와 맞서서 싸울 수 있는 무기가 뭡니까? 사명입니다. 사명이 무기입니다. 사명은 생존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을 위해 사는 자들이 아이들을 죽일 수 있습니까? 못하는 겁니다. 사명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들은 아무리 시시해보이고 사소한 일일지라도 거기에 혼을 불어넣습니다. 시시한 일 같아도 사명으로 하기 시작하면, 그 일에 최선을 다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시시한 일로 세상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보세요. 바로가 죽여라고 했지만 두 산파는 사명으로 아이들을 받았습니다. 약한 두 산파가 애굽의 정신, 뒤집어지고 파괴되어진 이 정신을 사명정신으로 다스립니다.

여러분 한 가지만이라도 자신의 하는일에 최선을 다 해보십시요. 그리고 그 일을 사명으로 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강해집니다. 무시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터치할 수 없는 능력이 길러지는 법입니다.

출애굽의 역사의 시작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이 두여자의 아이 받는 일 때문에 일어난 겁니다. 이들이 아이들을 살리지 않았으면 출애굽 역사의 모세도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모세는 그래서 이 두여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명이 있으면 출애굽은 시작되어집니다. 세상의 죄악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생명을 사명을 다해서 지키고 보호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손에 의해서 받아진 생명들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킬 줄 믿습니다.




셋째, 희생정신입니다.

이 두여자는 생명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 누굽니까? 죽음을 이긴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이긴 자들 아닙니까?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두 산파가 왕의 명을 어겼습니다. 이유는 한가지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행하는데 목숨을 건 베팅을 한 겁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돌아보십니다. 이런 자를 살려주십니다. 무릇 죽으려 하는 자는 살것이고 살려고 하는 자는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러면 이런 희생, 생명을 걸고 이런 일을 했을까요? 생명에 대한 애착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명을 거는 모든 사람들은 생명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의 대한 애착이 없으면 어떻게 산파를 하고 어떻게 아이를 받겠습니까? 이들은 적어도 히브리민족 중의 최고의 산파입니다.

여러분 어떤 교사가 최고의 교사입니까? 생명에 대한 애착이 있는 자입니다. 이 생명애착의 정신이 있으면 희생정신도 나오고 투자도 나오고 아이들에게 최고의 것을 먹이기 위해서 시간도 투자하고 물질도 투자하고 방법론도 연구하고 희생적으로 움직이게 되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런자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자들을 돌아봐야할 것같습니다.

여러분 우리안에 이런 생명에 대한 강력한 애착심이 회복되어지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보세요. 하나님이 희생하는 이들을 어떻게 돌아보시는 가 보세요. 19절에 산파들이 바로가 왜 남자를 살렸냐고 물을 때에,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고 합니다. 무슨 이야깁니까? 혼자서 아이들 다 낳아버리더라는 겁니다. 말그대로 하자면 순풍순풍 놓았다는 뜻입니다. 자기들이 가기도 전에 말입니다. 아를 한 둘 놓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100% 다 스스로 다 놓겠습니까? 말이 안되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리고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라고합니다. 히브리 여인은 강하고 애굽여자는 약해빠졌다는 아주 기분 나쁜 이야기입니다. 안그래도 히브리 민족이 너무 번창하고 강해서 없애버릴려고 하는데, 성질 돋구는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런데 뒤에 바로가 어떻다 저떻다 이야기가 없습니다. 히브리 여인은 별로 말이 안되는 거짓말을 했고, 확률상 데이터가 거의 없는 이야기를 함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거기에 속아 넘어갑니다. 여러분 웃기는 거 아닙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바로가 바봅니까? 답은 20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 이게 답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바로가 분위기 파악못하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들이 사명에 목숨을 걸면, 유치해보이고 시시해보이는 어떤 일이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일이라 여기며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그것을 사용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목숨을 돌아보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세상을 바보로 만들어 버립니다. 말도 안되는 거짓말 앞에도 눈이 가리워지고 생각이 어두워 져서 하나님의 사람을 해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적산파들입니다. 별로 표시나지 않는 일을 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 스스로 거대한 일을 별로 할 수 없을 만큼 미약한 자들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히브리 산파의 정신은 애굽의 정신을 이기고 출애굽의 역사의 기초를 놓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같이 약한자들도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의 도구로 사용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기르고 양육하는 아이들이 모세가 되고 사무엘이되고 다윗이 되어서 세상의 흐름을 주도하는 세력들이 될 줄 믿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