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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석이 주는 교훈 (레 23:3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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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주는 교훈(레23:33-43)
 
  레위기 23장에 나오는 일곱 절기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요, 그 실체는 바로 그리스도다(골2:16-17). 일곱 절기만 아니라 성경의 모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요5:39, 눅24:44).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이기에, 예수님으로 하나님의 절기의 뜻을 알 수 있다.

  유월절은(4-5) 그리스도의 죽음이요, 무교절(6-8)은 그리스도가 무덤에 들어가는 장사다. 초실절은(9-14)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부활을 말하며, 칠칠절(15-22)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임하심이요, 나팔절(23-25)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하며, 속죄절(26-32)은 그리스도의 속죄언약의 완성을 말한다.

  그리고 초막절(33-43)은 그리스도의 성도 추수를 말한다. 초막절은 우리 추석에 해당한다. 따라서 초막절이 주는 교훈이, 바로 추석이 주는 교훈이다. 초막은 풀로 만든 원두막 같은 어설픈 집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모세부터 지금까지 추석이면, 초막을 만들어 놓고, 일주일을 지낸다.

  뜰이 있는 집은, 뜰에 초막을 세운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베란다에 초막을 만들어 놓고 밤에는 초막에서 자야 한다. 세를 들어 살기에 초막을 만들 수 없는 사람들은, 회당에 공동 초막을 만들어 놓고, 밤에는 그 곳에 가서 잔다. 배를 타는 사람은, 배 갑판 위에 초막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잔다.

  여행 중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머무는 호텔 방에 풀을 뜯어다 놓고 지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초막절을 지켜야 한다. 초막절에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지내야 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살펴보기 원한다.

1. 추석에는 감사를 생각하여야 한다(37-41).

초막절은 1년 동안 농사하여 가꾼 각종 곡식과 과일 등등, 열매를 추수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알곡을 바쳐 감사하는 가을 추수 감사제이다.

  그러므로 한해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축복을 즐거워하며, 영광을 돌려야 한다(40). 초막절에 많은 예물을 드리고, 모든 제물은 불살라 화제로 하나님께 드렸다. 이는 예수님의 희생의 예표로서, 죄 사함과 성령의 은혜, 그리고 천국에 가는 것도 모두 예수님의 공로임을 말씀한다.

  우리는 무엇을 받을 때, 당연하게 받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야 한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수고하는 것을 많은 자녀들이 당연하게 받는다. 그러나 당연하게 받지 말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받아야 한다. 그래야 아름다운 관계가 이루어지고 행복하다. 행복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매년 세계 곳곳에, 재난이 일어난다. 지진, 태풍, 교통사고, 화재 등, 얼마나 많은 재앙이 있는가? 그런 중에 우리 가족이 무사하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가? 그러나 사고가 없고, 문제가 없어도, 건강해도,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대게 병원에 입원해서, 죽는다고 했다가 살아나면 그때 감사한다. 그러나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건강한 사람은 더더욱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감사하라고 하면 대부분, 육신의 필요를 채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최고의 이유는, 바로 우리 영혼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는 영혼의 필요를 채우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를 잊고 살지만, 신실한 성도들은 어려운 환경과 고난 중에도,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하며 감사한다.

  기도하면 사자 굴속에 던져지는 상황에서도, 다니엘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이처럼 가장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다니엘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림을 보면 ‘감사는 믿음’이 있어야 할 수 있다. 감사는 신앙의 문제이지 환경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이 없으면 감사하지 못한다.

  예수님을 잘 믿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언제나 무슨 일이든 ‘감사합니다’ 하시기에 붙여진 별명이 감사 할아버지였다. 하루는 감사 할아버지가, 고기 한 근을 사 가지고 오시다, 돌에 걸려 넘어졌다. 그때 지나가던 개가, 고기를 물고 달아나 버렸다.

  할아버지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감사합니다!”라고 하였다. 때마침 어떤 젊은이가 지나가다가 말한다. “할아버지, 무엇이 감사한 일입니까? 돌에 걸려 넘어졌고, 비싼 돈을 주고 사온 고기도, 개에게 빼앗겨 버렸는데, 무엇이 감사합니까?”

  그때 감사 할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 “이 사람아! 고기는 잃어버렸으나, 내 입의 입맛은 빼앗기지 않고 그대로 있지 않은가?”라고 하시더란다. 헬렌 켈러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삼중고를 겪으며 살았던 여인이다. 사실 그녀는 만족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받은 것이 너무 많아서 받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 헬렌 켈러는 삼중의 고통이 있었다. 볼 수 없는 눈과 들을 수 없는 귀, 말할 수 없는 입을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없는 것에 고민하지 아니했다.

  오히려 자기에게 주어진 것, 받은 것, 가지고 있는 것들을 생각하고 감사했다. 우리의 감사 지수는 얼마인지 살펴보고, 이와 같이 감사하는 추석이 되시기 바란다.


2. 추석에는 심판을 생각하여야 한다(슥14:16-19).

초막절은 수장절이라고도 하는데, 알곡은 모아 창고에 저장하기 때문이다(출23:16). 추석은 이처럼 알곡 성도들은 모두 천국 창고에 들어가고, 쭉정이는 불 속에 넣는 최후심판 날이다.

  성경은 알곡과 쭉정이를 분명히 구분한다. 이처럼 추석은 심판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과일이나 새 곡식을 먹으면서, 맛만 느끼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여야 한다. 미국의 ‘볼트리오 썬’라는 일간지가, 독자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다. “당신이 일 년만 산다면, 그 일 년을 어떻게 살겠습니까?”

  많은 분들이 응답했는데 “집을 사겠다. 은행에 저축을 많이 하겠다.”고 응답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응답자 중 많은 사람이 “많은 사람을 도와주며 살겠다. 좀 더 미소를 지으며 살겠다. 좀 더 많은 사랑을 베풀며 살겠다. 조금이라도 이 세상과 사회를 위해서 뭔가 일을 하고 죽겠다”고 했다.

  이처럼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의 삶의 목표가 달라지고, 삶의 차원이 달라진다. 심판에는 2종류가 있다. 하나는 흰 보좌 앞에서 받는 심판인데, 불신자들이 받는 심판이다. 죽은 자들은, 자기의 책에 쓰여진 대로 심판을 받는다. 불신자를 성경은 죽은 자라고 한다. 영이 죽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 살아있는 성도들은, 생명 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들은 생명 책에 이름이 기록되어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란다. 생명책은 한 권밖에 없다. 그런데 다른 책들은 각각 다 책이 있다. 생명책은 천국의 호적이다. 우리의 자녀가 한번 호적에 올라간 이름은, 죽을 때까지 있다. 말 안 듣는다고 호적에서 뺐다가, 말 잘 듣는다고 다시 올리지 않는다.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이 바삐 길을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한 소녀가 갑자기 달려오더니 무릎을 꿇고, 다급히 말했다. “폐하! 제 아버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나폴레옹은 무슨 사연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 소녀는 대답하였다. “제 아버지가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나폴레옹이 조사하여 보니,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다. 그러나 황제는 어떤 사형수도 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러나 황제가 판단하여도, 그 아버지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소녀를 불러 말했다. “너의 아버지는 법을 어겼으니 어쩔 수가 없구나!” 그러자 소녀는 흐느끼며 말했다.

  “황제님!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황제님에게 법의 심판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님의 자비를 원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침묵을 지키던 나폴레옹이 말했다. “네 말을 듣고 너의 아버지를 용서하니, 기쁨으로 돌아가거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 공의의 심판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심판을 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 때문에, 우리를 자비로 심판하신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용서하여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구원받은 우리가 속을 썩이면, 속을 썩이는 자식일 뿐이다.

  이처럼 우리가 한 번 거듭나서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줄 믿으시기 바란다. 그렇지만 백보좌 심판에서 심판 받은 자들은, 그들이 행한 대로 받는데 그 결과는, 불못 곧 지옥에 던지운다고 했다.

  “불못”은 불신자들이 가야할 지옥, 그곳은 영원히 불이 꺼지지 않는 곳이요,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불못은 (마25:41)에 “저주받은 자와 마귀와 마귀의 종자들을 위해서, 예비 되어져있는 영원한 불”이라고 했다. 이 땅위에서 버림받은, 인간 쓰레기들이 들어 가야할 곳이다.

  이 지옥의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주님은 “너의 손이 만약에 범죄하면, 잘라 버리라”고 하셨다.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가는 것보다, 불구자가 되어 천국 가는 것이 낫다고 했다. 그만큼 지옥의 고통이 극심하다는 말씀이다.

  지옥의 고통에 대해서 D.L. 무디는 “만일 지옥이 없다면 성경책을 모두 다 불태워 버리고, 많은 시간 돈을 들여 예배당을 건축할 필요도 없고, 있는 예배당도 오락장소로 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지옥이 있고, 지옥의 형벌이 있음을 믿기 바란다.

  또 다른 심판은, 성도들이 주님 앞에서 받을 상급의 심판이다. 사도바울은 (고후5:10)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리라 함이라.”고 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심판은 없지만, 상급의 심판이 있는 줄로 깨달으시기 바란다.

  구원은 거저 받았지만, 상급은 행한 대로 주신다. 우리가 태어날 때에, 부모님이 낳아주셔서 그냥 태어났다. 우리의 수고 없이, 호적에 올라갔다. 그러나 이 땅에서 대접받고 존경받으려면, 노력해야 된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대접받으려면, 상 받는 삶을 살아야 된다.


3. 추석에는 나그네 인생으로, 영원한 천국을 생각해야 한다(42-4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초막을 짓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가나안에 거하기까지, 이 땅은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나그네다. 본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해마다 추석에는 고향을 찾기에, 민족 대이동이 일어난다. 미국 가는데 10시간 가량 걸리는데, 서울에서 부산까지 20시간이 걸리면서도 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마다 초막절이면, 초막에서 7일간 지내면서, 애굽에서 나그네 되었던 시절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 땅은 나그네 땅이며, 우리가 가야할 곳은 영원한 천국임을 생각한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는 이 땅의 나그네다.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초막 같은 일시적인 집에 불과하다.

  우리는 산소에서 벌초하면서, 인생은 나그네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숙연하게 살아야 한다. 언젠가 우리도 무덤으로 들어가야 할, 나그네임을 느껴야 한다. 추석이 되면 고향을 찾는다. 그리고 반가운 사람들을 만난다. 이처럼 인간은 고향을 찾고 싶어한다. 우리의 영원한 고향은 천국이다.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이, 추석을 통해 더욱 뜨겁게 일어났으면 좋겠다. 아무리 길이 막혀도, 고향 가는 길은 즐겁다. 이처럼 하늘나라에 가는 길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즐거운 길이 되어야 한다. 신앙생활은 언제나 즐거워야 한다. 천국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고향에 가면 부모님을 비롯한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처럼 천국가면 그리운 모든 이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신난다. 저는 사랑했던 어머니를 만날 것이다. 어떤 분은 먼저 가신 사랑하는 남편을 만날 것이다. 사랑하는 부모를, 먼저 보낸 사랑하는 자녀를 다시 만날 것이다.

  사람들이 추석이면 고향을 찾지만, 우리의 진짜 고향은 천국이다. 천국에서만 인간은 참된 행복을 되찾을 수 있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셨기에, 하나님 안에서만 참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천국을 더욱 사모하는 추석이 되기 바란다.


4. 추석에는 나눔을 생각해야 한다(레23:22).

“너희 땅에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절기는 함께 기뻐하는 날이다. 혼자 기뻐하는 날이 아니다. 함께 기뻐하는 날이다. 그래서 추석은 나누는 계절이다. 추수를 하는 계절이기에, 빈부의 차가 심해지는 절기다. 추수한 사람은 부요하다. 그러나 추수할 것이 없는 사람은 가난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추수할 때, 모두 추수하지 말고, 남겨두라고 하셨다. 나누라는 말씀이다. 가난한 자들과 같이 추수의 기쁨을 맛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였다. 추석은 나누는 절기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가위만 같아라.” 이것이 우리 민족이 추석 때면 늘 하는 말이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 고통 당하는 이웃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가난한 자들은 “차라리 추석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우리 민족은 추석이면, 밝은 보름달 밑에서 강강수월래하며 춤추면서, 함께 즐겼다. 이스라엘도 함께 즐거워했다.

  (40)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7일 동안 즐거워하라”고 하였다. 추석에는 송편을 나눠먹는다. 우리나라에는 ‘까치 밥’이라는 좋은 풍습이 있다. 감을 딸 때 꼭대기 하나는, 까치가 먹으라고 남겨두었다.

  우리는 동물에게도 온정을 베푸는 좋은 풍습이 있는데, 이웃을 섬기며 나누는 일을 가볍게 해서는 안 된다. (요일3: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고 말하고 있다.

  섬김과 나눔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신다. 축복은 사명이다. 초대교회는 ‘나눔의 공동체’였다. 예배는 은혜의 나눔이요, 봉사는 섬김의 나눔이며, 전도와 선교는 복음의 나눔이고, 화해는 사랑의 나눔이었다. 하나님나라에는 네 것과 내 것이 없다. 천국은 나눔의 나라이다.

  히말라야를 넘어가는 길에, 눈보라 속에서 죽어 가는 사람을 발견했다. 산을 넘어가던 두 사람은 다른 생각을 했다. 앞서 걸어가던 사람은 그를 발견하곤 “이 사람을 살려주다가, 나까지 같은 꼴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냥 지나쳐 버렸다.

  그러나 그 뒤에 온 사람은, 거의 죽음에 이른 그를 발견하고, 그를 등에 없고 걸었다. 눈이 너무 많이 내리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 여간 힘들지 않았다. 사력을 다해 업고 가는데, 눈에 덮인 사람이 발에 걸렸다. 힘에 부친 몸으로 겨우 들춰보니, 그는 앞서 가던 사람으로 이미 죽어있었다.

  엄습해 오는 추위에 체온을 유지하지 못하여,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러나 죽어가던 사람을 엎고 가던 사람은, 땀을 뻘뻘 흘리며 산을 넘었는데, 죽어가던 사람은 그 사람의 체온에 몸이 녹아,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그는 바로 인도의 유명한 성자 썬다씽이다.

  세상은 이렇게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공동체 정신을 가진 이가 사회를 따뜻이 하고, 주위를 밝게 하며, 많은 사람을 살리게 된다. 따라서 이번 추석에는 초막절, 추석이 주는 교훈을 생각해야 한다.

  이번 추석에는 하나님께 무엇을 감사할 것인가를 생각하자. 심판을 생각하자. 쭉정이가 알곡 되기 바란다. 또 추석에는 천국을 생각하고, 나눔을 생각하기 바란다. 이런 은혜가 넘쳐나는 추석이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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