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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는 눈을 들어 바라보라 (창 13:14~18, 요 4: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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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눈을 들어 바라보라 (창 13:14~18, 요 4:35~36)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심리 용어가 있습니다. 아들이 어머니를 본능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용어의 근원은 소포클레스가 쓴 그리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 기인합니다.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는 그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사랑을 합니다. 오이디푸스는 결국 죄를 깨닫고 자신의 눈을 찔러 멀게 합니다. 자신을 벌한 것입니다. 오이디푸스가 어머니와 결혼한 다음에 이런 말을 합니다. “즐겁게 볼 수 없는데 눈으로 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 말이 결국 자신의 눈을 뽑아내게 합니다. 현대인들은 즐겁게 볼 수 없는데도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의 눈은 악한 것을 보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현실적인 것, 욕망의 것에 익숙한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눈을 가지고는 아무리 봐도 즐겁게 할 수 없습니다. 영혼이 만족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눈은 하나님의 눈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탐심으로 아버지까지 죽이고 얻은 어머니지만 어머니와의 사랑이, 삶이 그리 즐겁지 않았습니다. 탐심의 눈은 만족이 없습니다. 탐심의 눈은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시편 123:1에는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라고 합니다. 눈을 들어 주님을 향하면 주님이 보이고, 세상을 향하면 세상이 보이고, 빛을 향하면 빛이 보이고, 어둠을 향하면 어둠이 보입니다.

  조카 롯이 떠난 후에 아브람은 홀로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되어 헤브론에 거주지를 확정합니다. 롯이 떠나면서 삼촌인 아브람은 많은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상처받은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은 친히 위로하십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하나님이 치유하십니다. 혹시 여러분, 사람에게 상처가 있습니까? 사람 때문에 속이 상하십니까? 하나님께 맡기세요. 하나님께서 치유하시기를 기다리세요. 아브람을 위로하시고 치유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상처받은 하나님의 사람을 위로하시고 달래시고 치유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는 눈을 들어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10절과 대조하신 말씀입니다.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롯은 자기 눈으로 보았고, 욕심으로 보았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에 의하여 보았고, 신앙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롯은 현재에 산 사람입니다. 보이는 것으로 산 사람입니다. 아브람은 미래에 산 사람입니다. 보일 것으로 산 사람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의 문제입니다. 아브람은 이것을 알았고, 롯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서양의 속담에 “눈은 입보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말에도 눈으로 말한다는 표현이 있지 않습니다. 눈으로 웃음도 칩니다. 눈은 참 많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귀를 기울이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눈을 들어 바라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첫째, 눈을 들어 바라보면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보입니다.

  14절에는 말씀합니다. “너는 눈을 들어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하나님께서는 사방을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한쪽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방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좁은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작은 분이 아닙니다. 사방이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널려 있습니다. 동서남북을 보면 하나님의 뜻이 보입니다. 그래서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레는 “세계가 나의 교구이다”라고 외친 것입니다. 온 세계를 하나님이 주신 비전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온 세계에 그가 뿌려놓은 씨가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몽골인의 평균 시력은 4.0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무엇을 알아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인사는 “안녕하십니까?”가 아니라 “당신이 온 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라고 합니다. 멀리서 말이 달려오며 먼지를 일으킵니다. 우리 눈으로는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먼지 구름만 보고 그들은 “삼촌이 돼지 두 마리 잡아 온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육의 눈이 밝은 것은 좋은 일입니다. 더 좋은 일은 영의 눈이 밝아 하나님의 비전을 보는 일입니다.

  아브람의 눈과 롯의 눈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눈이 있습니다. 육의 눈과 영의 눈입니다. 탐욕의 눈과 순종의 눈입니다. 육의 눈은 우선 보기에 좋아 보이는 땅을 택합니다. 눈에 보기에는 여호와의 동산 같은 땅으로 보입니다. 육의 눈으로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볼 수 없습니다. 눈으로 땅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보면 그 눈이 영적 눈입니다. 복 있는 눈입니다.

  땅을 바라보다 주님을 발견한 어느 기자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흰 바탕에 껌은 무늬가 있는 그림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중국 대륙에서 말을 타고 가던 어느 크리스천 기자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예수님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면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진을 찍어라, 사진을 찍어라.” 사진을 찍고 보니 눈이 녹은 땅이 얼룩얼룩하게 예수님의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반면에 땅을 쳐다보며 살다가 평생 동전 수천 개를 모은 사람도 있습니다. 땅을 바라보고 살지만 하늘의 눈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을 봅니다. 세상의 눈을 가진 사람은 동전을 봅니다.

  영의 눈은 우선 보기에 좋은 자리가 아니라 영적 은혜의 자리를 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보는 자리를 발견합니다. 영국 속담에는 “탐욕은 인간을 소경으로 만들어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탐욕으로 세상을 보면 신령한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롯의 눈을 잃은 사람이 아브람의 눈을 얻습니다.

  창세기 22:4에는 “제 삼일에 아브람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모리아까지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축복의 땅, 인정의 땅 모리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보고 싶겠어요? 아들을 죽이는 자리인데 즐겁겠어요? 아마 보통 사람 같으면 일부러라도 고개를 숙이고 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하는 그의 자세였습니다.

  지난 번 성지를 탐사하면서 소돔과 고모라로 추정하는 지역을 가 보았습니다. 야자수가 있고, 푸른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참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동굴이 있는데 옛날에 어느 수도사가 와서 평생을 살던 수도원의 자리가 있었습니다. 롯이 좋아할 만한 곳이었습니다. 사람이 욕심의 눈으로 보면 욕심을 쌓아 갑니다. 본회퍼는 “눈을 불순한 도구로 삼는 자는 그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상가 키엘케고르는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은 보이지 않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날마다 거룩하고 좋은 것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옛말에 “장님 나라에서는 애꾸눈이 왕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결국 볼 줄 아는 사람이 왕입니다. 볼 줄 아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보는 것은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시력을 회복하려면 120만개의 섬유조직을 눈에서 뇌까지 정확하게 순서에 맞게 붙여야 합니다. 영적 눈으로 하나님의 비전을 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우리의 생각이 일치해야 합니다. 인간에게 들어오는 정보의 80%는 눈을 통하여 들어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정확하게 맞아야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운동경기를 보세요. 보는 것만으로도 많을 것을 배웁니다. 골프 시합 때 갤러리라고 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따라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무엇 때문에 남의 경기에 따라 다니나?”라고 하는 사람은 아직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보면서 배우고 하나님의 비전을 얻기를 바랍니다. 보면 비전을 얻습니다.

둘째, 눈을 들어 보는 만큼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십니다.

  15절에는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벧엘과 아이 중간 고지대의 동서남북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지경을 아브람에게 주셨습니다. 헤브론은 벧엘 남방 3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원래 이름은 기럇아르바입니다. 이곳은 다윗왕조 7년 동안의 수도였습니다. 동서남북의 삶의 중심이 될 자리입니다.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 자리를 주실 것을 확인하셨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동서남북을 바라보았습니다. 동으로는 모압의 산맥들과 요단의 골짜기가 펼쳐져 있습니다. 서로는 지중해가 이어져 있습니다. 남으로는 헤브론 산맥이 있습니다. 북으로는 유다와 비옥한 사마리아 평야가 터져 있습니다. 이곳은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땅을 주리니”라고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봐야 하나님은 주십니다. 크게 보는 사람에게는 큰 것을 주십니다. 넓게 보는 사람에게는 넓게 주십니다. 큰 꿈을 가져야 큰일을 이룹니다.
  최근 세계를 여행하다보면 세계 방방곡곡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없는 데가 없습니다. 북극에서 남극까지 가는 곳마다 한국 사람들을 만납니다. “이런데도 먹고 살게 있나?”라고 할 만한 데도 가보면 있어요. 아프리카 우간다에 가서도 그 나라의 경제를 움직이는 사람이 한국 사람이었습니다. 세계 동서남북에 가보면 한국 사람이 없는 데가 없습니다. 눈을 들어보면 아직도 우리가 갈 수 있는 곳, 가야 할 곳이 많습니다. 큰 꿈을 가진 자가 큰 것을 봅니다. 오래 전 미국에 있을 때 그림을 보니 ‘꿈을 꿀 때는 크게 꾸라’(When you dream, dream big)이라는 글이 있고 고양이가 호랑이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보세요. 땅을 보세요. 새 하늘과 새 땅이 비전으로 주어집니다. 선물로 다가옵니다.

  창세기 15장에는 아브람을 부르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깜깜한 밤에 하나님은 아브람을 이끌고 밖으로 나갑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고 하십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입니다. 그러나 이런 밤에는 별이 더 잘 보입니다. 세상이 깜깜하면 하나님이 더 잘 보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만큼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십니다. 희망은 별을 보게 합니다.

  동전을 손가락으로 잡은 채 시야를 가리도록 팔을 쭉 뻗어보십시오. 그러면 그 동전으로 1천 5백만 개의 별을 가릴 수 있습니다. 작은 절망은 모든 별들을 다 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러시아가 미국에 알래스카를 사라고 제안하였습니다. 미국은 러시아에 200만 달러를 주고 알래스카를 샀습니다. 그 때 의회에서 의원들 대부분이 반대하였습니다. 당시 미국의 재무장관이었던 윌리엄 시워드는 의원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여러분, 나는 눈 덮인 알래스카를 보고 그 땅을 사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 안에 감추어 있는 무한한 보고를 바라보고 사자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세대를 위해서 그 땅을 사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서 그 땅을 사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볼 줄 아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지금은 알래스카가 미국의 모든 주 가운데 가장 부요한 주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4:35에는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부지런한 농부가 밭을 유심히 관찰합니다. 곡식을 바라봅니다. 바라보는 자가 추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에게 수확의 기쁨을 주십니다. 우리의 손을 기다리는 자가 너무 많습니다.

  “생물학은 운명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이는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영원은 운명이다.” 위를 올려다보는 사람은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필립 얀시가 ‘내 눈이 주의 영광을 보네’라는 책에서 한 말입니다. 위를 올려다보며 비전을 가진 사람은 영원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많은 것을 얻습니다.

결론

  술집에서 거나 하게 취한 중년 신사가 웨이터에게 말합니다. “여기 술 깨는 좋은 거 좀 가지고 와봐.” 웨이터는 “알겠습니다. 여기 계산서 있습니다”하고 계산서를 가지고 왔더랍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어렴풋하게 깨어나는 눈이 아니라 확실하게 깨어나는 눈이 필요합니다. 영혼을 깨우는 계산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을 확실하게 깨우는 약입니다. 이 약이 영혼의 보장이 됩니다. 보이는 땅을 주십니다.

  4세기 이집트 사막의 사제는 “인간은 온전하게 눈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고, 자신을 보고, 비전을 보고,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다가 하늘에서부터 빛이 내려와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이 전의 세상으로부터 닫혔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에서 아나니아를 만나 눈이 떠졌습니다. 눈이 떠져서 세계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눈으로 세계를 누빕니다. 온 세계가 추수할 때가 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세안식’을 합니다. 눈을 씻는 예식입니다. 사울이 아나니아를 통해 눈이 떠졌듯이 눈을 뜨는 의식입니다. 우리에게도 영혼의 세안식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눈이 떠져서 자신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보는 것마다 우리의 것이 되고 보는 것마다 영혼을 거룩하게 하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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