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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 앞에 왔나이다 (신 26:1-11, 딤전 2:1-7, 눅 1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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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앞에 왔나이다 (신 26:1-11, 딤전 2:1-7, 눅 16:1-10)

1. 내일 모레가 추석명절이요 우리 교회는 추석을 전후해서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전례에 따라 다음 주일을 추수 감사주일로 지키게 됩니다. 따라서 이번 한 주간, 그리고 다음 주일까지 우리는 고유의 명절인 추석과 교회의 추수 감사절 절기 분위기가 겹쳐서 더욱 은혜와 기쁨이 넘치게 되겠습니다.

   우리 민속학자들은 옛날 우리나라의 큰 명절은 설, 단오, 한가위였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서 단오는 그 기원이 분명치 않아서인지 최근에 와서는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설은 수난을 많이 겪어왔습니다. 이중과세라고 해서 정부가 금하기도 했고, 지키기는 하되 구정이라고 격하하기도 했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민속의 날”이라는 엉뚱한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설”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해서 우리 고유의 명절 중 최대의 명절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추석 즉 한가위는 계절로 봐서 춥지도 덥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햇곡식과 햇과일이 풍성한 때라 흩어졌던 가족들이 다 함께 모여 즐길 수 있는 아주 아름다운 명절입니다. 요새는 워낙 자동차가 많고, 도로 사정도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이런 명절만 되면 소위 “민족 대 이동”이라고 할 만큼 엄청난 혼잡에 시달리기도 하며 그에 따라 달갑지 않은 사건사고도 만만치 않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찾는 기쁨 때문에 이런 한때의 번거로움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신 26장에 보면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수를 마치면 맏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두신 곳의 제단으로 가져와서 바쳤습니다. 거기서 예물을 주님 앞에 드리면서 민족 공동체적인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것이 오늘 구약 본문의 내용입니다.

(1) 그 첫 번째 말씀이 3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여기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1년 농사를 짓고 나서 당연히“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우순풍조케 해서 풍년을 주셔서 이만한 소출을 거두었나이다.”라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 번째로돌리고 맨 먼저 고백한 말이“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이 땅에 이르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a. 이것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때로부터 이미 5백 여 년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기억하고 있습니다. 창 12:3의“너는 너의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간 수많은 세월과 말로 할 수 없는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하신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이와 같이 이루심으로 그 성실하심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일제 때 사할린으로 끌려갔다가 해방이 되고 반세기의 세월을 보내기 까지 고국 땅을 밟아보지 못한 90세 난 노인이 서울의 어떤 교회의 주선으로 그렇게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와서 여생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어른의 감회가 어떠했겠습니까? 남의 나라에서 받고 겪은 설움과 고생이 오죽했겠습니까? 해방이 되었으나 돌아올 수 없었던 그 사정은 또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이제 늦게나마 고국에 돌아와서 살게 되었을 때 그 착잡한 마음을 한 두 마디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00여년 살면서 나중에는 노예로 전락하고 민족이 전멸할 위기까지 맞게 되었었습니다. 그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또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유랑하며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출애굽 1세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야말로 고난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자기 땅에서 1년 농사를 짓고 그 첫 열매를 주님께 가져왔을 때 그것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그 특별한 은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우리 찬송가의 가사처럼 그야말로“지금까지 지나온 것 주의 크신 은혜”입니다. 에벤에셀의 은총입니다. 이 은총을 먼저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옛날 공화당 시절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 씨는 옷 한 벌만 걸치고 있어도 우리는 흑자인생을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태어날 때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음성의 꽃동네 입구에는“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이라?”고 적어놓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 추석과 함께 추수 감사절을 앞두고 있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해야 합니까? 단지 지난 1년에 대한 회고겠습니까? 내가 세상에 태어남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총체적인 신앙의 고백을 나를 향하여 신실하신 하나님께 드려야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우리 교회와 온 성도들이 우리 교회를 향하여 신실하신 우리 하나님께 대한 우리 신앙을 저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고백해야할 줄 믿습니다. 80년이 넘도록 우리 교회를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 우리에게 새 성전을 약속하시고 말로 할 수 없는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도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어주신 일에 대한 우리 신앙이 항상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b. “내가 이 땅에 이르렀나이다.”라고 하는 이 말은 그들이 발붙이고 살 수 있는 땅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심지어 그 땅을“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광야 40년을 지나온 이스라엘에게야 그 땅이“젖과 꿀이 흐르는 땅”일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가나안 땅은 그렇게 기름진 땅이 아니었습니다. 성지 순례를 다녀오신 분들은 최근에 그 나라가 땅속에 파이프를 묻어서 갈릴리 바닷물을 끌어와서 옥토로 만들어 놓은 것을 보았겠습니다만 그랬느니 만큼 가나안 땅은 아주 척박하기 짝이 없는 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땅을“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셨고, 이스라엘은 그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을“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종살이 하던 그들, 광야에서 40년의 방랑생활을 해야 했던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가나안땅이 정말 하나님 임재와 축복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고 하는 증거였습니다. 그러므로 땅도 땅이지만 여기 이 땅에 하나님께 함께 계신다고 하는 이 사실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임마누엘의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인하여 감사해 보셨습니까? 비록 정치적인 혼란이 있고 남북통일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이 나라를 인하여 감사해 보셨습니까? 탈레반에 의하여 42일간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피랍되었다가“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지 말라.”는 협박을 들으면서 겨우 풀려나서 도망치다시피 빠져나온 우리의 의료 봉사단원들을 보면서 마음 놓고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전할 수 있는 이 나라를 인하여 감사해 보셨습니까?

   여러분이 살아오신 인생길이 어떠하든지 오늘 여기서 지난 세월 주님이 나를 인도해주셨고, 오늘 여기 내가 이만한 역할을 감당하면서 살아가게 된 것, 이것을 인하여 사도 바울처럼“내가 나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2) 10절에“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라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랑은 마음의 생각이나 입술의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을 통하여 실천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형제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고 했으며 야고보 사도는“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도 그렇습니다. 입술로만“주여, 주여”할 것이 아닙니다.“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내가 토지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라고 하는 것은“이 땅에 이르렀나이다.”라고 한 신앙고백의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해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햇곡식을 광주리에 담아 제단에 바쳤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보면 모심기 때나 논매기 때 부인들이 일꿀들이 먹을 점심식사를 큰 광주리에 담아 이고 와서 일꾼들에게 배식하기 전에 밥과 반찬 얼마를 논에 던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토속적인 신앙으로는 삶의 터전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땅에 대한 감사의 뜻이 담겨있습니다.

   오늘 신명기 내용의 본문 당시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은 자연을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그들이 존재하고 먹고살게 되는 모든 것이 그 자연신들에 의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그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고 믿었습니다. 적어도 엘리야가 바알신의 제사장들과 싸워서 이긴 그 드라마틱한 이야기 배후에는 이런 토착신앙에 대한 하나님 신앙의 승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토지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다고 하는 이 고백은 하나님의 몫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인정하고 성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일은 하나님의 날입니다.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아니 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우리의 확실한 신앙고백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것을 고아와 과부들 즉 소외계층을 위한 배려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추수할 때 모조리 싹쓸이 식으로 거두지 않고 다소 남겨둡니다. 그리고 곡식 이삭을 밭고랑에 떨어뜨려 줍니다.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와서 그것을 주워서 시어머니를 섬겼던 것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므로“토지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라고 하는 이 고백은 하나님을 사랑함과 함께 이웃에 대한 사랑도 역시 고백하는 것입니다. 만일 밭에서 가난한 이웃에 대한 배려도 없이 한 이삭도 버려두지 않고 싹쓸이로 추수하고 나서 하나님 제단에“믿물을 가져왔나이다.”라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께 받으심 직한 예물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수직의 기둥과 수평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과 나만이 아닙니다. 거기 이웃도 함께 참여할 때 올바른 십자가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맏물을 가져왔나이다.”라고 자신있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2. 오늘 추석을 맞이하면서 우리 한 두어 가지를 생각해 보십시다. 나를 나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그 첫째입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기리고, 증거하며, 감사하고 있습니까? 그 증거로 내 삶에 있어서 하나님은 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계십니까?“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그것이 내 삶의 목표가 되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서에 보면 일자리를 잃게 된 청지기가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 주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윤리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여기서 우리가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내일 나의 위치가 좌우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이웃을 무시하면 저기서도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됩니다.

   서신의 말씀은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기도를 원합니다. 이제는 이웃이 남이 아니라 나의 일부입니다. 중보기도는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럴 대 우리는 이웃과 함께 여기서 주님을 섬기고, 서로 사랑하며 마침내 저기서도 이웃과 함께 우리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내가 주님앞에 왔나이다.”라고 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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