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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석] 축복의 절기에 (창 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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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절기에 (창 27:38)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물론 여러 가지 모습으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놓쳐버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뒤늦게야 아하 하나님의 뜻이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뒤늦게 깨닫고는 감사도 하고 또 후회도 하곤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름을 입은 사람들의 선을 위하여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렇듯 모든 일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도록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그것은 주신 말씀대로 우리를 하나님의 목적이 있어서 자녀로 불러주신 것이요 또한 우리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꾼으로 세우신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틀 후면 우리의 전통 명절인 추석입니다. 그러나 이 추석이 그냥 단순한 우리네 명절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이 시간 함께 살펴보며 이 추석 명절이 진정한 축복의 절기가 되도록 함께 은혜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살펴보는 추석 명절을 생각해 봅니다.
성경을 은혜로운 글로 우리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도록 전하여주는 귀한 소설가가 있습니다. 바로 김성종 장로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의 글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미국에 이민 간 한국인들이 유대인들의 단골 업종인 생선장사 야채장사 세탁소 등을 썩 잘하여 ‘제 2의 유대인’이라는 별명을 얻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한국인과 유대인의 공통점에 대해서 아예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대학의 교수이며 세계평화연구소 소장인 베냐민 슬로니 박사 같은 이가 바로 그런 사람 중 한 분인데 그는 이렇게 연구 결과를 말하고 있습니다.

슬로니 교수는 한국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비교하면서 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똑같고 이스라엘이 같은 혈육인 아람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처럼 한국 역시 같은 핏줄인 일본 때문에 고통을 당한 것도 똑같다고 비교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더욱 신기한 것은 이스라엘과 한국의 인사법 비교입니다. 유대인들은 인사할 때 ‘샬롬’이라고 인사하고 한국 사람들은 ‘안녕’이라고 인사하는데 이는 모두 ‘평화’를 위미하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모두 ‘Good morning’ ‘Bon jour’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할 때 유대인과 한국인들은 ‘평화’라는 말로 인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유대인들은 만날 때마다 우리가 ‘안녕하십니까?’ ‘안녕히 가십시오’ 하듯이 ‘평안한가?’ ‘평안히 가라’하며 인사하고 있습니다. 인사뿐만이 아니라 슬로니 교수는 언어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는데 유대인들은 아버지를 부를 때에 ‘아바’라고 부르는데 한국어의 아빠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유대인들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가리켜 말할 때에는 ‘아비’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더 기이한 것은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오른 쪽에서 왼쪽으로 쓰는데 그것은 아랍어의 영우에도 마찬가지고 우리나라도 원래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썼었으며 같은 우랄 알타이어군에 속해 있는 몽고나 일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언어뿐만 아니라 옷차림에도 공통점이 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자 쓰는 것을 좋아해서 지금도 보수적인 사람들은 검은 모자를 쓰고 다니는데 한국인도 이미 오래 전부터 모자 쓰기를 좋아해서 조선 시대 사람들은 방안에서까지 갓을 쓰고 감투를 썼으며 하인들도 초립을 썼고 아이들이나 아녀자들까지도 모자나 쓰개치마 같은 것을 쓰고 다녔던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옷은 하얀 세마포인데 한국도 옛날부터 흰옷을 좋아하여 ‘백의민족’으로 불리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슬픈 일이 발생하면 굵은 베를 입고 통곡하였는데 한국인도 그러했고 곡을 하다가 지치면 사람을 사서 대신 곡을 하도록 하는 풍습까지도 똑같습니다.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은 우리나라 꽃인 무궁화입니다. 이 무궁화의 학술명은 ‘Hibiscus Syriacus' 즉 ‘시리아에서 온 꽃’이라는 뜻입니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안티오쿠스가 다스린 시리아에는 이스라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궁화가 이스라엘에서 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궁화의 별명이 ‘Rose of sharon’ 즉 샤론의 장미입니다. 그러니까 찬송가 89장에 나오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샤론의 꽃’이 바로 무궁화입니다.

모든 백성이 지키는 절기에서도 공통점이 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세 개의 절기가 있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한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과 첫 열매를 드린 날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을 기념하는 ‘칠칠절’과 하나님과 동행한 광야 생활을 추억하며 한 해 동안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동시에 메시야의 강림을 기다리는 ‘초막절’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양을 잡았던 유월절은 예수의 희생을 상징하는 날이고 칠칠절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50일 즉 성령 강림을 기념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메시야를 기다리는 초막절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이 초막절은 유대인들에게는 절기 중 최대의 명절로 7일 동안 노동을 금지하고 초막을 집 밖에 지어놓고 성회를 엽니다. 초막절은 유대인의 달력으로 7월 15일인데 이는 음력으로 사용하는 것으로서 우리네보다는 한 달을 앞서 가기 때문에 우리 음력으로 하면 8월 15일입니다. 세계 모든 나라들 가운데 음력 8월 15일을 명절로 지키는 나라는 오직 이스라엘과 한국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추석 명절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원래 추석은 한가위라고 해서 신라 때부터 지켜오던 명절로서 한 해 농사를 마무리 하면서 하나님께서 감사드리는 절기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절기가 조상에게 제사하는 날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간교한 무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눈길을 돌려놓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한 해를 지내면서 우리가 누구에게 감사를 드려야 합니까? 바로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감사의 대상을 하나님으로부터 조상으로 바꾸어 놓음으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조상 즉 귀신들에게 제사 드리는 날로 기가 막히게 살짝 바꾸어 놓았던 것이요 그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잊어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날을 지키도록 하셨겠는지 왜 다른 나라에서는 다 시들하며 사라지는 그런 날을 우리들에게는 오히려 큰 명절로 지키게 하셨는지 그 뜻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신앙 안에 굳게 서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불과 며칠 전에 태풍으로 인해 제주도와 남해안이 쑥대밭이 되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남아 있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추석 명절에 더욱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귀한 날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요 우리가 고향을 찾는 마음 이상으로 우리가 가야할 본향 하늘나라를 항상 기억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찾아 나아오듯 주님의 성전을 찾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명절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명절을 축복의 절기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리브가와 가정 꾸렸지만 오래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아내를 위해 여호와께 기도드리니, 여호와께서 이삭의 기도를 들어 주셨으므로, 리브가가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리브가의 뱃속에 있는 아기들이 서로 다투었습니다. 리브가는 “어찌하여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생각하며 여호와께 나아가 여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리브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나라가 네 몸 안에 있다. 두 백성이 네 몸에서 나누어질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하고,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아이를 낳을 때가 되자 리브가는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먼저 나온 아이는 몸이 붉고, 그 피부가 마치 털옷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에서라고 지었습니다. 나중에 나온 아이는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있었으므로, 그 아이의 이름을 야곱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그리고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에서가 자기의 가분을 잇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다 컸을 때 에서를 축복하고자 했지만 이를 안 리브가가 꾀를 부려 이삭을 속임으로 결국 야곱이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 기도를 받게 됩니다. “내 아들의 냄새는 여호와께서 복을 주신 들판의 냄새로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충분한 비와 좋은 땅을 주시고 넉넉한 곡식과 포도주를 주실 것이다. 나라들이 너를 섬기고, 백성들은 너에게 절할 것이다. 너는 네 형제들을 다스리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너에게 엎드려 절할 것이다. 너를 저주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고, 너에게 복을 주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이삭이 야곱에게 복을 빌어 준 후에 야곱이 아버지 이삭에게서 나오자마자, 에서가 사냥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일어나셔서 이 아들이 사냥한 것으로 요리한 음식을 드시고, 저에게 복을 빌어 주십시오.” 이삭은 놀라 몸을 떨며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오기 전에 나에게 사냥한 짐승을 요리해서 가져다 준 사람은 누구란 말이냐? 나는 그것을 먹고 그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 이제는 그 사람이 복을 받을 것이다.” 에서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었습니다. 에서가 자기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저에게 복을 빌어 주십시오. 아버지, 저에게도 복을 주십시오.”
에서가 또 자기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빌어 주실 복이 하나밖에 없습니까? 아버지, 저에게도 복을 주십시오.” 이 말을 하고 에서는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삭이 왜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에서의 말처럼 아버지 이삭이 빌어 줄 복이 하나밖에 없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하나님이 처음 계획하신대로 큰 자가 동생을 섬길 수밖에 없다고 해도 그에게도 충분히 복된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라온 에서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어찌 됐든 자기를 축복하기를 거절할 때 그 받는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인정을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무런 인정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낄 때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나만 홀로 버려진 것 같은 마음이 들 때 그 고통과 괴로움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축복의 말을 듣고 싶은 것이 모두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축복에 인색하고 그저 부모의 생각대로 자식을 몰아대는 그런 모습으로만 자식에게 비쳐지게 될 때 그 자녀가 어디에 발을 디디고 설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인정받고 있다는 그 마음은 곧 사랑받고 있다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정받고 사랑받을 때 사람은 자신감을 가지고 내일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들의 자녀들을 어떻게 축복해야 하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축복하기보다는 상처만 안겨주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더군다나 이제는 장자를 따지는 그런 시대가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아들 딸 가리지 말고 하나만 낳아서 잘 기르자고 하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지금은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나아서 잘 기르자고 하지만 거기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현실입니다. 이제는 군대에 갈 사람조차도 갈수록 줄어서 돈을 주고 군 생활하는 사람들을 구해야 할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이런 때에 자녀들을 우리가 어떻게 키워야 하겠습니까?

물론 자녀들을 사랑치 않는 부모가 없을 줄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바르게 자녀들을 사랑하고 키우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명절이라고 해서 고향을 찾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효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효도 사랑도 다 없어지고 그저 의무만 남아 있는 그런 삶을 우리가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자녀들을 향해서도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자녀들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대리만족의 마음은 아닌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를 잘 공경하도록 가르치고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공경할 수 있도록 자녀들을 축복하며 키우고 있는지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명절에 자녀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무엇을 자녀들이 보고 배울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까지는 함께 모여서 차례를 지내고 그리고는 온 가족이 모여서 무엇을 했던가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자녀들이 보고 배울만한 그런 무엇이 있었던가요?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에서의 통곡을 다시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빌어 주실 복이 하나밖에 없습니까? 아버지, 저에게도 복을 주십시오.”
이 에서의 통곡이 우리들 자녀 가운데 어느 하나에게서도 들려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과연 우리는 모든 자녀들에게 공통적으로 사랑을 베풀고 있습니까? 모두를 마음껏 축복하며 격려해 주고 있습니까? 자녀들을 축복하며 기도하여 주는 것이 무엇이 그리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무슨 큰돈이 드는 일이겠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자녀들을 축복해 주어야 하고 끊임없이 격려하기를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공부하라고 하는 말을 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기를 위해서 간구하며 축복해 보셨습니까? 명절을 맞이해서 이 명절이 왜 있으며 왜 우리가 고향을 찾으며 온 가족이 모여서는 어떤 일로 서로를 격려해야 하는지 이야기해 본 적이 있는지요? 오히려 함께 모이게 되면 서로를 비교하며 자녀들의 마음에 오히려 상처만 안겨주지는 않았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명절이란 먼저 온 가족이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요 서로를 축복하며 격려하는 날이라는 것을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서로를 비교하는 날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껏 축복하는 날 부족하다 싶으면 더 격려하고 축복하는 날이 되도록 할 때 우리 자녀들이 그리고 온 가족들이 다 함께 행복을 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명절에 온 가족을 서로가 축복하며 격려하는 귀한 날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특히 이번 추석 명절에는 하나님께서 왜 이 땅에 이스라엘과 한국에만 이 날이 큰 명절이 되도록 남아 있게 하셨는지 그 깊은 뜻을 마음에 새겨 더욱 하나님께 감사하며 온 가족이 함께 격려하고 축복하는 귀한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삭에 에서를 마음껏 축복해 주었으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아마 에서가 이삭을 그렇게 미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죽이겠다고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서의 후손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토록 괴롭히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삭은 왜 마음껏 에서를 축복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오히려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먼저 깨달았다면 두 아들을 함께 불러서 마음껏 축복하되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대로 저들을 축복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두 아들이 서로 다툴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서로를 편 가름하고 편애하고 내 하고 싶은 대로만 하려고 했기에 이런 불행이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그

렇다면 이제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녀가 하나밖에 없다면야 그렇겠지만 여러 자녀가 있다면 모두를 진심으로 축복하며 격려하도록 하십시오. 물론 어쩔 수 없이 하나에게만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다른 자녀들에게도 격려와 사랑을 아까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에만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른 자녀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이해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두를 진심으로 날마다 축복하게 되면 그 누구도 혼자 외톨이와 같은 느낌을 갖지 않을 것이요 따라서 비뚜로 나가는 자녀들도 없을 것입니다. 이번 명절이 이런 사랑과 격려와 축복이 넘치는 명절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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