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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기도(1)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호 11:8~9, 마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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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1)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호 11:8~9, 마 6:9~13)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의 본문은 산상설교 중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오늘 주님의 기도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산상설교의 중심이며 핵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외적으로라고 함은 그 위치 면에서 5~7장의 산상설교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고, 내적으로 라고 함은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고 실행할 수 있는지, 그것은 바로 이 기도의 정신에 마음을 열고 이 기도의 정신에서 살기 시작하는 정도에 따라 가능하다는 의미에서입니다.

모든 종교는 기도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우리 기독교도 예외는 아닙니다.  예수님도 때때로 한적한 곳을 찾아가셔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기도 하시고, 새벽 미명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기도 하셨습니다.  기도는 믿는 자들에게 생명의 줄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곧잘 오해하듯이 기도는 나의 어떤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도 아니요, 모든 것을 다 잊고 무념무상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한 마인드 콘트롤도 아닙니다.  단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내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기 위한 시위거리는 더더욱 아닙니다.

오늘 주님의 기도가 있는 본문 바로 위를 보면 5절부터 예수님은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기도할 때, 외식하는 사람들처럼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아라,  오히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숨어계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이었고, 또 하나는 이방인 같이 중언부언, 빈말을 되풀이해서 기도하지 말아라.  말을 많이 한다고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 아니다,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기도란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의 내면의 깊은 것들을 내어드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말의 의미는 굉장히 중요한데, 그것을 밝혀주는 말씀이 주님의 기도의 첫마디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경계해야 할 두 가지를 말씀하신 다음에,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 부름말에는 심오한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깊이 깨닫고 이 부름말이 의미하는 관계 안으로 들어가기만 한다면, 우리의 삶은 분명히 달라질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보았던 세계이고, 예수께서 기원(基源)하셨으며 다시 돌아가셨던 세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를 그 세계로 초청합니다.  그 세계로 끌어들이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먼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기도문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번역이 되었습니다마는, 헬라어 원문에 보면 “아버지(파테르) 우리(헤몬), 하늘에 계신(호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이라는 어순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어순은 중요한 것을 시사합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말은 ‘파테르,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은 수식어로 아버지를 꾸며주는 말입니다.

‘아버지여, 우리 아버지여’ 할 때, 이 말은 부름말입니다.  부름말은 불리어지는 사람과 부르는 사람의 관계를 규정짓습니다.  예수님은 놀랍게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이 헬라어로 말하기 때문에 파테르, 아버지이지, 당시 예수님과 제자들이 쓰던 일상적인 말이었던 아람어로 말하면, 아빠, 우리말로도 아빠입니다.  당시 유대인들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다니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라고 하다니요? 

어떤 분들은, 왜 어머니는 아니고 아버지냐고 항의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아버지라는 말 속에는 어머니의 모든 속성이 들어 있다고 ale습니다.  ‘집나간 아들을 기다시는 아버지’라는 예수님의 비유(눅15:11~32)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분명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라,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기다리는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아마도, 예수님 당시의 세계관이 부성적인 세계관이어서 예수님은 대표적으로 아버지라는 말을 하신 것이지, 이 말 속에는 아버지의 속성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속성이 더 많이 들어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 혹은 아빠라고 부를 때는, 어머니, 엄마라는 뜻으로도 새겨야 합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을 아버지 아빠라고 부를 때, 우리는 무엇이 됩니까?  우리는 아들, 혹은 딸로 되어버립니다.  더 적나라한 말로 그 분의 ‘새끼’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내 새끼’라고 불러주신다는 말입니다.  이 ‘새끼’라는 말은 주로 동물에게 붙이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이 욕이 되었습니다마는, 실은 이 새끼라는 말 속에는 본능적이며 원초적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 말이 마음에 듭니다.  우리가 아빠라고 부르면, 하나님을 우리를 ‘내 새끼’라고 불러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아버지에 대해 다 좋은 감정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 중 어떤 사람에게는 비교적 좋은 아버지가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이 땅의 아버지는 인자하다고 해도 역시 불완전하고, 뛰어난 지혜로 가르친다고 해도 잘못 인도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아버지가 정말 힘든 환경에서 어렵게 어렵게 살아오면서 자녀들을 키웠다고 하면, 거기다가 아무런 부모교육도 받은 일도 없고, 또 아버지 자신이 제대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고 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부모가 자녀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 주었겠습니까?  아마도 이것이 바로 인간의 불완전한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도 부모로써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는 원초적인 아버지의 모습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내 새끼’라고 부를 때와 같은 원초적인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저는 처음에 집단상담을 하면서 심하게 베게뺏기를 한 후에 땀이 흠뻑 적셔진, 그야말로 동물 같은 상태에서 업어주기를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베개뺏기를 하던 사람의 등에 업혔을 때, 내가 느낀 느낌은 아, 이런 기억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어릴 때, 아버지의 등에 업혀 세상의 어떤 두려움도 잊은 채, ‘완전한 평화’를 누렸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는 기억이 난 것입니다.  완전히 힘을 빼고 아버지의 등에 업혀, 혹은 어머니의 품속에서 ‘완전한 평화’를 누렸던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 분명히 느껴졌습니다.  알고 보면, 그 원초적인 경험은 내가 그나마 세상을 이 정도라도 믿고 나 자신을 열어 보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에릭 에릭슨이라는 심리학자는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것이, 부모와의 만남을 통해 세상을 믿을 것이냐 불신할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여기 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부모의 품에 안겼던 원초적인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후에 숱한 실망과 또 상처로 기억이 안나서 그렇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불완전하지만 이만큼까지라도 우리가 세상을 믿고 살아온 것은 바로 그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할 때, 그 아버지는 바로 이런 관계를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 주기도문의 첫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미 이런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빠, 엄마’라고 부를 때, ‘내 새끼야’라고 응답해 오는 원초적인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주기도문을 의례적으로 읽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기도 끝이나 예배를 폐할 때 읽는 기도 정도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끌어 주시는 관계 속으로 우리가 들어간다면, 이 기도는 사실 엄청난 기도입니다.

그러면 이런 관계는 좀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제가 언젠가도 설교를 했고, 앞으로도 자주 설교를 하려고 하는 본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제가 자주 이 본문을 말하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 모습의 절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아마도 이 비유 하나 만으로도 기독교의 복음은 생생하게 전파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거기에는 모든 기독교의 핵심이 들어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분배받은 후 아버지 집을 멀리 떠나 재산을 다 탕진해버린 작은 아들은 깊은 절망과 좌절 가운데서 자신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집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집에서는 아버지가 아직 자신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비록 아들이라는 이름으로까지는 염치가 없다면, 이것은 분명 아들의 생각이었습니다마는, 종으로라도 그 집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먼 길을 돌아 아버지에게 찾아갔고, 아버지는 그를 그 모습 그대로 안아주시고 반겨주셨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종으로써가 아니라 아들로써 안길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역시 작은 아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살다보니 우리가 안전히, 그리고 아들의 권리를 누리며 살아야 할, 아버지 집을 떠나 온 것을 알게 되고, 내가 지금 사는 삶이 온전한 기반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지금 본향을 그리워하고 있으며, 나의 삶은 온갖 상처들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지금 나는 돼지우리에서 주엄열매를 주어먹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누가 그렇게 만들었다기보다는 내 스스로가 나의 가치를 너무 내팽개쳐서 돼지우리 속에 처박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값진 것들을 모두 탕진하고 못쓰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어떤 희망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에, 아버지의 집이 있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아니 늘 생각났지만, 자존심이 있어 지워버리곤 했던 것을, 나 자신에게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게 되자, 아, 내가 태어났던 곳, 아버지 집이 있구나, 그곳을 희망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 아버지께서 아직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종으로가 아니라, 내 아들, 내 딸, 내 새끼야 부르시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아버지께서 아직 우리를 기다라고 계신다는 그 사실이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이고,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이며, 이 세상을 포기 하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참여해 가야 할 이유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진실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아셨고, 아버지의 집을 늘 경험했으며, 아버지의 품이 어떤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아니,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이셨고, 마지막 순간에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요20:17)’고 말씀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신 목표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아버지셨던 그 하나님이 드디어 우리에게도 아버지가 되는 길을 여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듯이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체험했듯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이것이 주님의 기도의 비밀이며, 복음의 비밀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우리 교회는 사실 매우 정적입니다.  어떤 교회를 보면, 복음송을 부르면서 손을 흔들고 찬양하고, 주여 삼창하고 부르짖으면서 기도하고, 또 말끝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인도하셨다, 하나님이 저렇게 말씀하셨다 하면서 지상의 아버지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그런 열정적인 찬양도 없고, 기도도 관상기도를 한다고 하고, 설교도 감정적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머리 쓰는 쪽으로 되어지곤 합니다.  저는 그렇게 안하려고 합니다마는, 제가 아직 미숙해서 그렇게 됩니다.  이러다가  우리의 신앙이 삭막한 지적 놀이가 될까봐 두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기독교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열린 마음입니다.  이 말에는 인격적인 친밀한 교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로 들어가는, 열려진 인격적인 친밀한 교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격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의인화하라는 말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만나라는 말입니다. 

예전의 영성가들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연애를 하는 관계로 말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진하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에로틱한 아가서가 하나님과 자신들과의 관계를 밝혀주는 본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는 마음을 여는 인격적인 사귐이 포함된다는 말입니다. 

저는 제가 하나님과 이런 관계를 맺기를 바랍니다.  삭막한 지적인 관계가 아니고, 그렇다고 감정에 따라 흔들리는 관계도 아니고, 어떤 무념무상의 정적인 관계도 아닌, 나의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어, 나의 온 삶을 열어, 나의 혼을 열어 전적으로 그분에게 투신하는 그런 관계이길 원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런 관계가 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진실한 의미에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 자매, 이웃들을 향해 ‘너’라고 부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자연들을 착취와 이용의 대상이 아닌, 너의 관계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말 속에 그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말씀이 길어져 “하늘에 계신”이라는 구절은 다음 주일로 미루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 드리며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일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  나는 에브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었고, 내 품에 안아서 길렀다.  죽을 고비에서 그들을 살려 주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원수의 손에 넘기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버리며,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너를 버리려고 하여도, 나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너를 불쌍히 여기는 애정이 나의 속에서 불길처럼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구나.  아무리 화가 나도, 화나는 대로 할 수 없구나.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나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너희 가운데 있는 거룩한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를 위협하러 온 것이 아니다.”(호11:1; 3~4;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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