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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기도(2) :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사 31:1~3, 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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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2) :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사 31:1~3, 마 6:9~13)

마더 테레사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시끄러운 공항에서 어느 기자가 다가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미국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한마디 해 주시겠습니까?” 이때 마더 테레사는 “더 많이 베푸세요.”라든가 “서로 더욱 사랑하십시오.”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금도 주저 없이 “그래요, 미국인들은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마더 테레사가 미국인들을 향해 단호한 어조로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캘커타의 빈민들을 돌보던 테레사의 눈으로 볼 때, 미국인들은 기도의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풍요롭고 안정되게 살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더 테레사는 그들이 영적으로 매우 빈곤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또 지금의 모든 문명과 과학이 꽃피우고 있는 미국에서 말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그분의 자리는 매우 좁다는 것을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테레사에게는 기도하지 않는 것 자체가 인간의 교만이고 인간의 눈을 멀게 하는 어두움이었습니다. 

사람이 기도를 잊어버렸다고 하는 것은 진정한 자신을 잊어버렸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사람이 기도를 잃어버렸다고 하는 것은 삶의 방향을 잃어버렸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 아버지여, 라는 부름은 기도의 시작입니다.  또 이 부름말은 관계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우리는 아들과 딸이 되어 그분과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지난주에 말씀 드린 대로 우리는 이 부분을 아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라는 말은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로 수식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어떤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했을 때, 그것이 비행기가 다니고 우주선이 올라가는 하늘의 어떤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또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하늘나라라고 표현하는데, 그것도 공간적인 어떤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니고데모라는 유대인 지도자가 예수께 찾아왔을 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거듭난다는 말은 다시 난다는 말도 되지만 위로부터 난다는 말도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위로부터 라는 말이 바로 하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현실을 넘어서는 초월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계는 별도로 떨어진 어떤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새롭게 눈을 뜰 때, 내 앞에 전개되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늘이라고 할 때 하늘은 어디부터가 하늘입니까?  멀리 우주에서 보면, 우리 지구는 하늘 한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가 발을 딛는 땅 위의 공간은 모두 하늘입니다.  이렇게 땅과 하늘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우리가 사는 현실 너머에, 그리고 현실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있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있는 공간, 그곳이 하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심으로 우리와 다르십니다.  칼 바르트가 말한대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은 질적으로 다르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하늘에 계심으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하늘은 우리의 삶의 목적이며 고향이며 근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을 향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목적을 잃은 것입니다.  하늘을 그리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향을 잃은 것입니다.  하늘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근본을 잃어버리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첫 번째 기원은 하나님에게 관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우리는 이 기원을 드릴 때, 하나님이 뭔가 부족해서 인간들에게 이런 기원을 받으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니, 이 기도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뭔가를 필요로 하고 우리가 바치는 무엇으로 결핍을 채워가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중심해서 살라고 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이나 영광을 받고 싶어 하고, 당신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듣기를 바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대 중동의 신화들을 보면, 신들은 매우 인간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괴팍하기까지 한 것으로 나옵니다.  신들이 인간을 만들 때, 자신들을 섬길 종들로 만들었다든지 자신들의 수면을 방해한다고 해서 홍수를 내려 인간을 쓸어버리려고 한다든지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바벨론의 신화인 길가메쉬라고 하는 홍수 이야기를 보면, 우리 성경의 노아의 홍수와 매우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신들이 비를 내려 인간을 쓸어버리는 이유가 바로 자신들이 잠을 자는데 하도 인간들이 시끄럽게 떠들어서 홧김에 인간을 쓸어버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또 이 길가메쉬 서사시에 보면, 홍수가 끝나고 노아와 같이 방주로 구원받은 사람이 물이 걷히자 배에서 내려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는데, 신들은 그 제사를 받아먹으려고 파리 떼처럼 달려들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근히 하나님도 이런 분으로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노를 사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든지, 하나님을 섬기는데 무서워하면서 종처럼 섬긴다든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마치 그렇게 해야 하나님이 기분이 좋아져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라는 말이고 하나님을 통해 삶의 활력과 기쁨을 누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진정한 인간의 길을 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통해 내가 진정 누구인지 나의 참자아를 발견하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라는 말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라는 말은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하여 사람들에게 그런 높임을 받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실은 우리 사람을 위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때, 인간은 진실로 참다운 인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끈질기게 우리의 겉 사람을 내세우려는 거센 욕망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려는 끝없는 욕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선악의 열매를 따 먹은 이후에 인간의 끝없는 욕망입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것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반했던 이스라엘의 역사도, 위선적인 신앙으로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던 바리새인들의 모습도 다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남을 도우면서도 순수한 동기에서 돕기가 어렵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낼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성공하려는 동기도 여기서 옵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리지만 이렇게 우리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의 동기는 사실 내 중심적인 거짓자아의 활동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상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그런 모든 활동에는 거짓자아가 끼어듭니다.  아마도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살게 되면 될수록 이것을 깊이 느끼게 될 것입니다.

거짓자아가 얼마나 끈질기게 우리가 선택하는 새로운 삶의 스타일 안으로 따라들어 오는지를 토마스 키팅은 이런 예화를 들어 설명합니다.

어떤 건장한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술을 마시던 친구들을 먼저 곯아떨어지게 하는 것이 우세와 성공이라고 여기는 한 단체의 회원이었습니다.  그는 동네 주점에서 친구들이 술에 취해 의자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을 보는 것에 무한한 만족감을 얻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을 불러 술을 마시고는 다 곯아떨어진 것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 것에 무한한 긍지를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가 방송 설교가의 설교를 듣고 그의 악한 버릇에서 완전히 돌아섰습니다.  이제는 다시 술을 먹지 않기로 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욕망을 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엄격하기로 유명한 수도회를 찾아다니다가, 트라피스트 수도회를 찾아냈습니다.  트라피스트 수도회는 가장 금욕적인 수도회로 명성이 높았고, 그는 거기서는 음식을 거의 먹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수도회에 입회원서를 제출하였고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엄격한 금욕생활에 만족하고 그 엄격한 침묵의 규칙과 고된 일들에 빠져 들었습니다.

사순절이 오고 수도자들은 빵과 물만으로 단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나이든 형제들이 식당에 오는 일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극심한 단식으로 허약해졌기 때문에 의료실에서 식사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감기에 걸렸습니다.  고난주간에 들어서면서 식당에 오는 사람은 이제 자기뿐이었습니다.  성금요일 저녁 기도시간의 종이 울리자 그는 비틀거리며 식당으로 갔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이전에 주점에서 가졌던 것과 같은 자부심과 자아 환희 같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이제는 친구들을 술에 곯아떨어지게 하는 재미 대신에 다른 수도자들을 굶주림에 지쳐 떨어지게 한 것입니다.

토마스 키팅은 묻습니다.  이 젊은이에게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말해보라.  그의 주소, 머리 모양, 의복 밖에는 달라진 것이 없다.  이것이 바로 복음에서 말하는 세상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짓자아의 활동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안전과 즐거움과 존중과 힘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고 나아가서 미화시키려는 자아 중심적인 프로젝트와 프로그램과 끈질긴 요구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인간이 완전하게 인격자로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고 저해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라는 기원은 우리의 자아중심을 깊이 보면서, 그것의 허무함을 보면서, 그것의 거짓됨을 보면서, 이제 우리의 무게 중심을 옮기겠다는 말입니다.  그동안은 우리의 머리에 무게중심이 있어서 늘 불안했습니다.  늘 넘어졌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중심을 아래로 내려서, 배 깊숙한 곳에 중심을 두고 살겠다는 기원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중심을 두고 살겠다는 기원입니다.


이 시대는 깊은 영적 어두움에 처해 있습니다.  그 어두움은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생각하는 어두움입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도움을 청하러 이집트로 내려가는 자들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들은 군마를 의지하고 많은 병거를 믿고 기마병의 막강한 힘을 믿으면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바라보지도 않고 주님께 구하지도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이집트 사람은 사람일 뿐이요, 하나님이 아니며, 그들의 군마 또한 고깃덩이에 불과할 뿐이요, 영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단지 이스라엘만의 문제였을까요?  이것은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고 우리 시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는 무형의 우상들로 가득합니다.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여기며 거룩하게 하는 시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대에 우리가 사는 길은 우리가 얼마나 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려고 발버둥치는 지를 깊이 보면서,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한 것처럼 생각하며, 근본이 아닌 것을 근본이라고 생각하며 사는지를 깊이 꿰뚫어 보면서 하나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 우리의 삶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십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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