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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해의 은혜 (창 4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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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의 은혜 (창 45:1-15)

민속의 명절 추석을 맞이하여 여러분의 가정과 삶위에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명절을 맞이하면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받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불신자들과 관계를 하는 문제도 있고 특히 갈등관계를 가족 친척들과 관계를 해야 하는 어려움들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족간의 관계를 하면서 어쩌면 가장 많은 기대를 하는 것만큼 많은 상처도 받습니다. 그래서 가정들마나 아픔의 과거를 갖고 지내는 가정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이런 미움과 상처의 가정들은 명절이  화해를 위한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과거의 갈등을 풀고 화해를 해 갈 것인가? 이것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과거의 상처를 풀어나가는 잘못된 해결방식 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거북이식 해결방법입니다.
이것은 문제로부터 거북이처럼 피해가는 방식입니다. 고통스러운 갈등의 문제 앞에서 이런 사람들은 무조건 도망가고자 합니다. “나를 괴롭히지 말아라, 나는 괴로운 문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하면서 자꾸 문제에서 도망가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더큰 문제를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상어식 접근방법입니다.
상어처럼 문제를 승리의 관점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방식입니다. 갈등의 문제 고통의 과거를 풀어나갈때에 ‘내가 이기고 너는 져야 한다“는 방식에서 접근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상대방을 패배시키기 위하여 자신이 이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접근합니다. 이것도 옳지 않습니다.

셋째 아기곰 접근방식입니다. 아기곰같이 따뜻한 마음의 사람들이 쓰는 방식입니다.
이 사람들은 기분좋게 져줍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먼저 잘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음 속에는 상처와 불만이 쌓여갑니다.무조건 양보하면서 해결하려고 하는 방식입니다.

넷째 여우식 접근방법입니다.
‘너도 양보해 나도 양보할께’와 같은 입장입니다. 그런데 양보하여서 해결되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무조건 양보하여서 문제가 다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양보하여서 문제는 해결할 때 해결이 안되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다섯째 부엉이식 접근방법입니다.
부엉이처럼 도망가지 않고 지혜롭게 해결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직면이하고 합니다. 문제에서 도망가지 않고 직면하여서 문제를 잘 해결하여 가는 방식입니다.
직면하여 과거의 아픔과 미움의 문제를 해결하여 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요셉은 갈등의 문제 아픔의 문제를 직면합니다. 그리고 형들과의 미움과 고통의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우리가 잘 알듯이 요셉은 17살의 나이에 형들에 의해서 외국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러니까 집으로 말하면 요셉은 인신매매가 된 것입니다.

왜 형들이 요셉을 미워했습니까? 아버지 야곱이 12명의 아들 중에서 요셉을 특별히 더 귀여워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아버지 야곱은 요셉에게 지금으로 말을 하면 명품옷을 사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자기가 높아지고 형들이 낮아지는 꿈을 꾼 것입니다. 그 마음에 동생에 대한 미움의 감정을 갖고 있다가 어느날 자기들의 도시락 배달을 온 요셉을 죽이려고 하다가 외국상인들에 판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애굽에 종으로 와서 고생하다가 하나님이 주신 영감과 지혜로 꿈을 해석하던 중 애굽왕 바로의 꿈을 해석하다가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나이 30살에 요셉은 총리가 되었지만 항상 형들과의 그 불편한 과거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에 흉년이 지고 식량난이 일어나게 되고 요셉의 꿈대로 준비를 잘 한 애굽은 이웃 나라 백성들에게까지 식량을 사갈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그때 요셉의 형들이 식량을 사러 왔고 결국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요셉은 상처를 주고 아픔을 준 형들과 직면하여 화해를 하게 됩니다. 요셉은 화해의 은혜가 있었던 사람입니다.오늘 우리의 삶에서 갈등과 상처의 과거를 갖고 힘들어하는 가정들 개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화해해야합니까?

1. 긍휼이 화해를 낳게 합니다.

1-2을 보십시오.
요셉이 형들을 보고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2절에 보면 큰 소리로 울었다고 합니다. 개역성경에서는 방성대곡하였다고 합니다. 14절-15절에 보면 요셉이 목을 안고 울었습니다. 형들과 입을 맞추고 울었습니다. 여기 요셉이 형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원한과 증오의 눈물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형들을 용서하고 마음으로 품는 긍휼의 눈물일 것입니다.

긍휼이 무엇입니까?
저주받고 심판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오히려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 형들을 저주하고 심판한다고 해도 솔직히 문제가 될 것없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분명히 요셉의 형들이 잘못하였고 잘못의 댓가를 지불받아도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원수갚은 것을 금하고 보복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왜냐하면 원수 갚는 것,보복하는 것 그것은 또다른 원수를 낳고 보복을 낳기 때문입니다.

성경 로마서12장19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하여서는 원수를 향해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원수갚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면서 살아갈 때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두리라“고 합니다.우리가 원수를 갚지 않고 축복하면 숯불을 머리에 쌓아두는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여기 숯불은 은혜의 표라고 해석 합니다. 이것은 곧 핍박자와 긍휼과 사랑을 베풀면서 숯불같은 따뜻한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승리의 삶을 위해서 먼저 걸러야 할 것은 우리의 감정의 원리를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분명히 요셉의 내면 속에 형들에 대한 상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감정이 100% 완전하게 치유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감정의 원리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내가 그리스도인들은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뜻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누가 긍휼의 눈물을 흘리면서 화해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누군가를 진정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긍휼의 눈물을 흘리는 자리는 아무나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엄청난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형들은 동생 요셉을 매정하게 거부하고 종으로 팔았습니다.사람이 누군가에게 거부를 당한 경우처럼 가슴이 깊은 상처가 없습니다. 특히 가정의 가족들에게서 거부당하는 상처를 받은 것은 너무 깊은 충격이 됩니다. 그런데 요셉은 모든 거역을 치유받았습니다. 모든 분노가 치유받았습니다. 요셉이 거역과 분노를 뛰어넘어 긍휼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긍휼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요셉은 바로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본질상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존재들인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진노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시고 긍휼의 대상으로 삼으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증거가 바로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증거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 있는 과정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하나님 앞에 범죄함없이 완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 속에서 이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긍휼히 여기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나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우리 중에 아무도 주님 앞에 법대로 한다면 온전하게 나갈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긍휼이요 은혜입니다. 이제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긍휼의 원리 은혜의 원리에 의하여 대할 수 있기를 주님은 기대하십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이면서 설교가인 미국의 아이언사이드 박사가 교회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엇습니다. 갑자기 청년 하나가 손을 들더니 큰소리를 말했습니다. “법대로 합시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이언사이드 박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젊은지 법대로 하기를 원하는가? 만약에 하나님께서 법대로 자네를 다루셨다면 자네는 어떻게 될 것같은가? 자네는 지옥에 가고 말 것일세”라고 했다고 합니다.

주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셨다면 이제 나도 다른 사람을 그렇게 대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몫인 것입니다. 요셉은 그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긍휼을 입은 대로 긍휼을 적용하였습니다. 자기를 종으로 판 형들을 긍휼히여기면서 화해한 것입니다. 긍휼의 원리대로 생각하고 긍휼의 방식대로 행동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긍휼이 화해를 낳습니다. 주님의 긍휼이 가정을 화해하고 인생을 화해의 길로 인도하는 줄로 믿습니다.


2. 형제의식이 화해를 낳게 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요셉은 자기를 판 자들을 향해서 자기가 동생리고 그들을 여전히 형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지금 애굽의 총리입니다. 형들은 식량이 없어서 구하런 가난한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그런 형들을 무시하지 않고 여전히 ‘당신들은 나의 형입니다’라고 그들을 존중합니다. 그들은 형제로 여깁니다. 요셉은 형들을 나의 형이요 자신을 그의 동생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그가 형제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관계가 틀어지고 상처를 받으면 ‘관계단절’을 선언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이런 인생구조로 살게되면 결국 모든 사람들과 벽을 쌓고 고립된 삶을 살아갑니다. 여전히 문제가 있고 어렵고 상처받은 관계이지만 더불어 사는 형제의식을 갖아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사는 길입니다. 교회로 말을 하면 상처받고 힘이들고 어려워도 공동체의식을 갖고 서로 상생하는 생각과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요셉을 보면 인생을 살면서 인간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한번 맺은 가족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형제들과의 관계가 소중한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종종 내가 성공하고 내가 잘살게 되면 나보다 못한 가족,힘들고 어려운 가족들을 외면하고 돌아보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종종 상처받고 힘들면 관계를 끓고 살아가는 벽을 쌓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형제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회 속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피차에 서로 관계를 맺어가다가 상처를 주고 받아 아픔이 있고 서로 불편하고 힘든 과정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흔히들 취하는 방식이 무엇입니까? 교회를 떠나거나 아예 교회를 출입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어디에 가도 또 그런 상처와 아픔이 있고 그런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지구상에 완전한 사람 완전한 교회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형제의식을 갖고 하나하나 풀어가야 할 과제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가 바로 언어폭력의 문제입니다.
특히 인터넷상에는 언어폭력이 도를 넘어섰습니다. 서로 얼굴을 보지 않는다는 것과 익명성 때문에 차마 입에 답을 수 없는 폭언과 욕들이 인터넷에 올려집니다. 얼마전에 아프카니스탄에 23명의 우리 청년들이 봉사를 하러갔다가 포로로 잡혔을때에 거기에 올려진 댓글들을 보면 “과연 이 사람들이 대한민국 사람이 맞는가?” 할 정도의 글을 올렸습니다. 같은 동족으로서 형제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언어 비난하는 언어 비판하는 언어는 화해로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비판하는 언어의 가정은 점점 더 망가집니다. 비난하고 정죄하는 언어의 교회는 부흥이 될 수 없습니다. 왜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 것일까요? 형제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여기에 요셉이 형들과의 관계를 형제의식을 갖지 않고 경쟁의식을 갖았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화해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비록 자기를 버린 형들이지만 여전히 형으로 의식하고 형제애로 대합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가인이 형이었고 아벨은 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의 제사는 열납되지 않고 동생의 제사가 열납되었습니다. 결국 가인은 분노하고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 최초의 살인자가 가정에 있었습니다. 왜 가인이 동생을 향해 그렇게  분노했을까요 가인은 자신이 공평하게 제대로 형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하나님께서 형인 자기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동생인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입니다. 자신이 거절당할때에 얼마나 분노가 나겠습니까?  “내가 지금 불공평한 대접을 받고 있다”라고 할때 우리는 얼마나 화가 납니까? 여기 가인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동생과의 관계중심의 형제의식을 갖지 않고 그는 동생이기이전에 동생을 자기의 경쟁상대로 본 것입니다.
“저 아벨 때문에 내가 손해를 보았어”저아벨은 나의 경쟁상대이다 내가 저 인간만 없으면 더 인정받을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교회 속에서 여러분들은 사람들을 어떻게 인식합니까? 형제입니까? 경쟁자입니까? 물론 현대는 경쟁시대입니다. 선의의 경쟁이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의 가정이 망가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형제들끼지 경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회사 사업이 화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경쟁의식때문입니다. 교회가 화해가 깨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나친 경쟁의식 때문입니다.

지나치게 경쟁의식이 강한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여유가 없습니다. 지나치게 긴장되어 있습니다. 조그마한 일에도 너무 많은 화를 냅니다. 표정이 항상 굳어져 있고 인상을 쓰고 다니게 됩니다.
이규태라고 하는 분이 쓴 “한국인의 의식구조”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동체의식이 강한 선량한 이웃관계를 맺으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말과 문화를 보면 공동체의식이 강합니다. 말가운데도 ‘우리 마을,우리 학교,우리교회,심지어는 우리 마누라“등으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서양사람들은 우리라는 말보다는 나라는 말 우리라는 표현보다는 나라는 표현이 더 익숙합니다. 우리나라는 음식을 먹어도 상에 된장찌개 하나를 여럿이 함께 먹습니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은 자기 음식은 자기 혼자 놓고 먹습니다. 우리는 잠을 잘때에도 한 이불을 여럿이 덮고 잡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 이불은 자기 혼자 덮고 잡니다. 우리는 마루에 앉을때에도 더불어 함깨 앉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의자에 혼자 앉습니다. 우리나라 교회가 이렇게 빠른 시간에 부흥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런 공동체의식 형제의식이 몸에 배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이런 좋은 공동체의식 형제의식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만 그런 것이 아니고 교회도 그렇습니다. 형제의식 공동체의식은 “같이 죽고 같이 살자”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경쟁의식의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너죽고 나살자” 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입니까?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한 주님 한 성령을 모시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서로 교회 속에서 형제의식을 갖고 화해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불신자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항상 주님처럼 화해의 삶으로 영광을 돌리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섭리의식이 화해를 낳습니다.

5절에 보십시오. 요셉은 하나님이 나를 애굽에 보내었다고 강조합니다.
8절에 보십시오. 요셉은 하나님이 나를 애굽의 통치자로 삼았가고 고백합니다.
내가 한 일이 아닙니다. 형들이 한일이 아닙니다. 나를 이렇게 만든 이는 바로 나도 아니고 형들도 아니고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팔아서 이곳에 왔고 하나님이 나를 세워 애굽의 총리로 세워다고 선언합니다. 바로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여러분 섭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권의 계획을 따라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대표적인 섭리의 일하시는 방식은 무엇입니까? 합력하여서 선을 이루시는 섭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방식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항상 선의 섭리라는 사실입니다. 제일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성경구절 중에서 롬8장 2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바라볼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일 모든 경험들이 하나님의 섭리 중에 있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것처럼 보입니다. 요셉의 입장을 본다면 분명히 형들이 요셉을 외국 상인에게 팔았습니다. 자연적인 안목으로 볼때에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섭리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판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할수록 그리고 더욱 성숙할수록 이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게 됩니다.

물론 요셉도 처음에는 형들을 원망하고 욕하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고난을 허용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떠나고 싶은 마음도 들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고백하고 증거하는 섭리의 의식이 있었고 섭리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섭리의 중심
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정과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대표적인 신적기관이 바로 가정과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가정과 교회를 통해서 오기도 하지만 많은 상처들이 가정과 교회를 통해서 오기도 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가정을 통해서 상처를 받고 고통을 받습니다.
아벨이 가인을 통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노아는 아들 함을 통해서 상처를 받고 함을 노아를 통해서 상처를 받습니다. 사라는 하갈을 통해서 상처를 받고 하갈은 사라를 통해서 상처를 받습니다. 이삭은 이스마엘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야곱은 에서에게 상처를 주고 에서는 야곱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모세의 가정,다윗의 가정,솔로몬의 가정,선지자들의 가정,많은 경건한 믿음의 가정들조차도 가정을 통해서 상처가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장 가까운 관계의 가정을 통하여 일어난 상처와 고통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죄악과 고통을 넘어선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입니까?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시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 섭리 중에는 나의 인격을 연단하는 선의 섭리가 있습니다. 그 섭리 중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선의 섭리가 있습니다. 그 섭리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선의 섭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악한일을 당해도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악한 일을 선한 일로 마침내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선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선의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이제 어떤 악한 가운데서도 선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선한 마음을 갖으시기 바랍니다. 선한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선한 행동을 하시기 바랍니다. 선하게 사람을 대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억울한 세상입니다. 악한 세상 고통의 세상입니다. 상처많은 세상 힘든 세상입니다. 그러나 항상 화해자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가 있습니다.
첫째 긍휼의 마음을 갖아야 합니다.
둘째 형제의식을 갖아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선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요셉처럼 화해자로 가정을 구하고 교회를 세우고 민족을 세워가는 화해의 도구로 드려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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