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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룩 없는 순전한 떡 (고전 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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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룩 없는 순전한 떡 (고전 5:1-13)

오래 전에 어느 미국의 한인교회 장로님 한 분이 제게 "요즘 교회가 권징하는 것을 못 봤습니다."라고 한탄을 해왔습니다.
  그 교회에 각 기관 연례 정기 감사(監査)를 했는데, 어느 기관의 회장이 공금을 어떤 개인에게 사적으로 빌려 준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당회가 열리자 그 감사를 했던 위원들은 그 당사자의 이름조차 밝히지 아니했습니다.
  꾸어갔던 돈은 이미 다 갚았으니 그냥 무마하고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교회 안에 쓸데없이 시끄러운 문제를 더 이상 일으키지 않는 상책이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교회의 공금을 개인적으로 함부로 쓰는 일이 엄연히 드러났는데 그것을 공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은근슬쩍 덮어주는 것이 과연 그 교회 안에 앞으로 '시끄러운 문제'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대책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당회에서는 그 당사자들에 대하여 엄중하게 공적 권징을 해야 함이 특히 장로교 교회에서는 상식에 불과한데도 오히려 그냥 쉬쉬 하면서 넘어가는 것을 보고 그 장로님께서는 너무나도 어이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교회의 삼표식' 즉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서 꼭 있어야 할 세 가지 기본 요건들이 있는데, 그것이 곧 '말씀전파, 성례시행, 권징실시'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가장 잘 이행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을 고른다면 역시 그 '권징'이 될 것입니다.
  그 삼표식 중에서 첫 두 가지, 즉 '설교'나 '세례와 성찬'은 장로교뿐 아니라 모든 개신교에서 거의 다 잘 시행되고 있는데 왜 '권징의 정당한 실시'는 장로교 안에서조차 그처럼 어정쩡하게 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아마도 앞의 사례에서도 나타났듯이 '사람의 얼굴 세워주는' 데에만 신경을 쓰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같은 교회 교인의 얼굴을 생각한다면 참 거북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교회는 권징을 꼭 실시해야만 합니까?
  우리는 이 시간 장로교 헌법에서 밝히고 있는 '권징의 네 가지 목적'들을 주신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1. 권징의 실시는 우선 '진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꼭 필요합니다.

  본문 1절과 2절에 "1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2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기록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내부의 온갖 문제와 시험들로 인하여 악명이 높았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음행"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정의하는 '음행'이란 정상적 결혼관계에서 벗어난 모든 성적 범죄를 포함합니다.
  즉 부부 간의 성생활은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꺼릴 이유가 없는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그 외에 혼전 혹은 혼외의 모든 성적 관계들은 다 음행인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서 벌어진 음행은 그 중에서도 근친상간이라는 정말 기가 막힐 일이었습니다.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 아비의 아내"는 곧 '어머니'가 되는 셈이지만 설마 친어머니는 아니었을 터이고, 아마도 아버지가 첩으로 데리고 살았던 여자, 따져 보자면 계모였던 것 같습니다.
  혹 그 아버지는 이미 죽고 여자 혼자 남아 있던 상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두고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 즉 불신 사회에서도 비윤리적인 일, 악한 일로 여겨지는 죄라고 단정했듯이, 근친상간이란 구약의 율법(레 18:8 등)은 물론이요 당시 로마법에서도 금지되어 있던 것입니다.

  그처럼 명백한 범죄가 저질러졌는데도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그것을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교만하여져"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 공적으로 드러난 중죄에 대하여 통분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나야 당연할 것인데, 이들은 그런 죄를 저지른 교인을 그냥 덮어주고 넘어가는 것이 오히려 잘하는 일인 줄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즉 자기네들이 이해심이 많고 관용을 베풀고 있는 양 교만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권징이란 것이 모든 교인에게 완벽한 성별생활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예수 믿고 나서도 여전히 누구나 다 크고 작은 자범죄들을 여전히 지으면서 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누구의 눈에도 '이것은 틀림없는 중죄'라고 판단되는 일이 교회 안에서 드러났을 때에는 마땅히 권징을 실시해야만 적어도 교회가 가르치는 '바른 길' 곧 '진리'가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지켜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음행은 죄'라는 것은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는 진리 중의 하나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한 재판과 징벌이 시행되지 않으면 나라의 법이 유지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불신사회의 윤리 기준에서 보아도 재고의 여지조차 없는 죄가 진리를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긴다는 교회 안에서 간과되고 넘어간 데서야 더더욱 말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성경의 진리로써 '세상을 판단하는' 위치를 지키기는커녕 '세상 앞에서 비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생명과도 같고 최고의 자산에 해당되는 '진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권징은 반드시 실시되어져야만 함을 꼭 깨닫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권징은 '그리스도의 권위와 영광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필수적입니다.

  3절과 4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3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내가"라는 말은 헬라어 문법상 강조용법으로 사용되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의무 이행에 실패했지만, 그와는 아주 대조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사도 바울의 입장은 아주 분명했고 그것을 대처하는 태도는 너무나도 확고부동했습니다.
  그는 고린도교회에서 육신적으로는 떠나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그 교회에 함께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 내려놓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이미 그 범죄자에 대한 권징을 실시했던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교회 담임목사도 아니고 그 교회 정기 출석자도 아니었던 사도 바울이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일을 했습니까?

  그는 그 권징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했다고 했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18장 15절부터 17절에 "15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17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백한 명령이 그런 권징의 정당성과 필연성을 확실히 뒷받침해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계속된 18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불리리라"고 그 권징의 권위는 곧 하늘 보좌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직결되어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어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라고, 곧 그런 권징이 결코 사적인 비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근거를 둔 공적 행위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권징의 권위는 사도직이나 교회 당회장 직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바로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즉 권징은 무슨 목사의 체면을 살려 주거나 당회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하여 실시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서 반드시 실시하도록 명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때로 은밀하게 실시되는 권징 역시 그 본래 성격은 어디까지나 공적인 일이며, 당회 혹은 노회나 총회와 같은 치리회에서 실시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권위는 오직 '주 예수의 이름'에 있는 것입니다.

  명령을 어긴 병사는 곧 자기의 사령관에게 불복종한 것이며, 그러므로 만약 그런 병사를 처벌하지 않고 넘어간다면 곧 사령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꼭 마찬가지로, 마땅히 행해야 할 경우가 생겼는데도 권징을 실시하지 않는 것은 곧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며 그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모든 '권면과 징계'들은 결코 목사나 장로라는 사람이 다른 교인을 비판하고 징벌하는 일이 결코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행하고 계시는 교회의 공적 사역인 것을 깨닫고 겸허하게 순종함으로써 함께 '그리스도의 권위와 영광을 견고케' 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권징은 또한 '덕을 세우고 범죄한 자의 신령적 유익을 도모'하게 해 줍니다.

  5절에 "5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라는 말은, 무슨 주술 따위로 귀신 씌우게 했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에서 출교시킴으로써 그 범죄자를 죄와 사단의 손 아래에 빠지도록 내버렸다는 뜻입니다.
  교회에서 시행하는 권징들은 '권계, 견책, 근신, 정직, 면직, 수찬 정지, 제명, 출교' 등 여덟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마지막 단계인 '출교'는 가장 중한 징계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 고린도교회의 음행 범죄자를 이처럼 출교시키면서 그 목적을 두고 "육신은 멸하고 영은...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 밝혔습니다.
  이것은 그렇게 엄히 징계함으로써 그 본인이 회개하게 되기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될 경우에는, 바로 그 회개를 통하여 "육신은 멸하고" 즉 그 범죄자의 '육의 것들이 죽게 되는' 새 삶이 시작될 것이며, 결국 예수님 재림의 날에 그의 영혼이 구원받는 자리에 갈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출교라는 제일 큰 중징계조차도 결코 보복이나 혐오의 감정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영혼을 끝까지 아끼는 마음으로 시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권징의 목적은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고 있듯이 '범죄한 자를 벌주기 위함'이 절대로 아닙니다.
  장로교 헌법의 '권징조례'에 보면 원래부터 그런 말은 '교회의 권징 목적'에 아예 들어가 있지도 않습니다.
  권징의 목적은 징벌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죄지은 자를 회개시키고 회복시키는 데에 주안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 1절에서도 "1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한 것입니다.
  즉 권징이야말로 형제의 영혼을 진정 아끼고 사랑하는 심령의 소유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범죄한 교인을 어찌하든지 '바로잡아서 신령의 유익을 도모'하려는 것이야말로 범죄한 교인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보다 훨씬 더 그 형제를 아끼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범죄한 교인을 권징을 통해서 지금 '바로잡고' 나중에 '영혼구원 얻게' 만드는 것이 지금 '그냥 얼굴 세워 주고 덮어 주다가' 끝내 '지옥에 떨어지게' 만드는 것보다 백배 더 '덕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고린도교회가 그랬듯이 오늘날의 맣은 교회들이 바로 이런 권징을 실시하지 않음으로써 그 범죄한 교인의 영혼을 완전히 죽도록 그냥 방치해 두는, 같은 교인으로서, 같은 '형제'로서 정말 못할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범죄한 형제를 오직 사랑이 담긴 권징으로 바로잡아 주어야만 그 교인의 '신령의 유익을 도모'하며 교회가 죄인을 변화시키고 죽을 자를 살려내는 덕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꼭 기억하고 실천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4. 권징은 결과적으로 '악행을 제거하고 교회를 정결'하게 만들어 줍니다.

  6절부터 8절까지에 기록하기를 "6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8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라고 했습니다.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말은 그처럼 범죄한 형제를 권징하지 않은 일을 두고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랬다.'라고 자찬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뜻입니다.
  "누룩"은 성경에서 좋은 뜻으로 쓰일 때도 있고 나쁜 뜻으로 비유될 때도 있는데, 여기에서는 물론 후자로서 '죄'를 뜻합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는 말 그대로, 누룩 즉 효모는 밀가루 반죽 속에 조금만 넣어도 반죽 전체에 퍼져서 그 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각 개인 성도라는 지체가 연합된 것이기 때문에, 한 지체에 병이 있어 썩어 들어가는 것을 방치해 두면 자연히 전체가 꼭 같이 썩게 되는 것입니다.

  팔이나 다리가 썩어 가면 온 몸에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잘라내는 수술이 필요하다는 것은 세상 의술에서도 상식이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교회 역시 전체의 '정결'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권징이 필요합니다.
  다른 교인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죄를 다스리지 않고 방치해 두면 그 죄는 교회 안에서 점점 더 확산되어 가게 되며 결국에는 교회 전체가 큰 병에 걸리게 될 것이 뻔한 것입니다.

  여기 "누룩 없는 자"란 구원의 확신을 얻은 후에 죄를 멀리하는 경건생활을 통하여 성화 과정에 있는 신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의 희생양'이 되신 이유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이처럼 죄에서 자유하고 거룩하게 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을 통하여 해방의 기쁨을 만끽했던 것처럼, 기독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감격을 마치 명절을 지키듯이 즐겁게 누릴 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기쁜 중생을 맛보고 사는 신자라면 더 이상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 즉 더 이상 악하고 더러운 죄에 빠지지 않고 "진실한"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그런 '죄의 누룩'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그처럼 은혜롭고 기쁘게 신앙생활하고 있는 대다수의 다른 교인들까지도 병들게 만들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독소가 됩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교회의 모든 교인들이 그처럼 죄에서 떠난 "새 덩어리"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약간의 "누룩"이라도 발견이 되면 그것이 퍼지기 전에 즉시 제거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정결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악행의 제거가 동반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이어지는 말씀에 나타납니다.
  9절부터 11절까지 말씀에 "9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10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11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이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쓰기 전에 고린도교회에 보내었던 어떤 서신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것은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하여튼 그 편지에서도 사도 바울이 이미 음행의 문제를 언급했으니, 이것은 고린도교회 내에서 일찍부터 이슈가 되어 왔던 것임에 분명한데도 여태껏 해결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음행 외에도 교회가 권징해야 할 명백한 악행들이 있습니다.
  "탐하는 자"란 욕심 많은 사람이며, "토색하는 자"란 사기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부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우상 숭배자"나 "술 취하는 자"란 설명이 필요 없으며, "후욕하는 자"란 상스러운 욕을 함부로 퍼붓는 사람을 뜻합니다.

  교회 밖에서 이런 자들을 만나고 교제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신자의 삶의 현장은 여전히 이 세상이며, 또 불신자를 전도하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도 역시 그들과 교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신자라 해도 "세상 밖으로 나가" 살 수는 없는 까닭에 교회 밖에서의 불신자와의 사회적 교류는 현실적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의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그런 악행을 저지를 때에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불릴 수 있는 특권은 아무렇게나 해도 유지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 출석만 한다고 절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이름으로 불리기 위해서는 최소한 지켜야 할 자격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언급된 기본적인 신자의 윤리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고, 즉 그런 사람은 '형제'라고 불러 줄 가치조차 없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세상 대학교에서는 그 학교의 학문적 수준을 유지하고자 채용하는 교수들을 철저히 스크린합니다.
  오케스트라는 정기적인 오디션을 통해서 실력 떨어지는 단원을 그때그때 도태시킴으로써 그 전체 화음의 맑음을 유지시킵니다.
  꼭 마찬가지로 교회는 오직 권징을 통하여서만이 '누룩 없는 떡' 즉 그 공동체 전체의 거룩함과 정결함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 명백한 공적 악행을 제거하고 불신 세상 앞에서 '교회의 정결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권징은 꼭 필요한 것임을 깨닫고, 교회에서 실시하는 정당한 권징을 조금도 꺼려하지 않고 오히려 귀중히 여길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12절과 13절에 결론적으로 "12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13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불신자 판단과 심판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지만, 권징을 통하여 교회를 성별되이 지키는 것은 분명히 해당 교회와 교인의 책임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회를 완전히 정화시키는 것이 교회의 최대 과제가 아니라, 교회 자체를 먼저 영적으로 깨끗하게 유지함으로써 불신 사회의 죄인들을 그 안으로 불러와서 함께 죄사함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 것이 교회의 기능이요 사명인 것입니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런 권징의 책임이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롬 14:10)라는 말씀과 모순되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사적으로 남의 티를 잡아내는 일, 그래서 믿음 약한 교인을 실족케 하는 일을 저지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권징은 뚜렷한 중죄를 저지른 교인에 대하여 어디까지나 공적으로 판단하고 치리하는 일입니다.

  또한 권징은 꼭 온 교회 앞에 드러나는 방식으로만 처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은밀하게 시행되는 것도 권징의 아주 훌륭한 실시입니다.
  그것은 꼭 재판소까지 가지 않더라도, 어차피 적용될 법을 미리 피차 따져 보고 사전 합의를 거쳐 해결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교역자들이 개인적으로 직접 권면해 주는 말을 듣고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회개하며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일이 크게 터지고 나서 당회에서 공개적으로 치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좋은 권징실시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당사자 한 사람만 상대하여 권고하는' 권징이 잘 시행되는 교회는 '두 세 증인의 입'이나 '교회의 말'의 권징 단계까지 나갈 필요도 없이, 조용한 가운데서도 큰 문제에 대한 '사전예방'이 이루어지며 '법도'가 제대로 지켜지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이민 교회에서 그 교회의 어떤 교인을 권징하기 전에 장로님 한 분이 그 본인을 만나서 "당신을 권징하면 기꺼이 받겠습니까?"라고 사전에 미리 의사를 타진(?)하는 것을 제가 전해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교인은 사실 아주 신앙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교회가 권징하면 당연히 받아야지요."라고 했고 그래서 결국 그 사람에게 권징이 내려졌다는 것입니다.
  정말 우스운 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회에서 어느 한 교인을 권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면 그냥 권징하면 될 일이지 그것을 본인에게 미리 양해를 구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경우입니까?
  권징해서 본인이 기분 나빠하고 교회를 나오지 않을 상 싶으면 권징하지 않고, 기꺼이 받겠다고 할 때만 권징해도 괜찮겠다는 말입니까?
  그때 만일 그 교인이 "나는 못 받겠습니다."라고 했더라면, 그 교회 당회가 어떤 조치를 취했을지 저는 참 궁금합니다.
  하여튼 그 교인이 권징을 기꺼이 받겠다고 하는 덕분에, 그 교회 당회는 체면을 세울 수 있게 된 셈입니다.

  제가 경향교회에 부임한 이후에도 두어 차례 공적인 권징이 있었고 또 몇 차례 은밀한 권징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무슨 사전조율(?) 따위는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에 우리 당회에서는 그 권징 대상자를 위한 눈물 어린 기도와 함께 결의를 했으며 우리 교역자들 역시 그 영혼을 오히려 더욱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권면과 징계를 실시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한, 아직까지는 그 권징 받은 교인들 중에 그 때문에 더 큰 시험에 빠졌다거나 교회 출석을 그만 두었다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이 권징이라는 것은 제대로 실시하기만 하면 결코 교인을 실족시키거나 교회를 혼란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진리를 보호하며, 그리스도의 권위와 영광을 견고하게 하며, 악행을 제거하고 교회를 정결하게 하며, 덕을 세우고 범죄한 자의 신령적 유익을 도모하는"(장로교헌법 권징조례 제1장 제2조 '권징의 목적'), 실로 그 본인과 교회 전체에 오직 유익을 가져다주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진리의 말씀에 기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기초한 권징을 그 영혼을 귀중히 여기는 뜻에서 실시할 때 그것을 오직 겸손한 마음자세로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죄의 누룩'을 깨끗이 제거하고 교회 전체를 통하여서는 '순전한 떡'의 정결함을 함께 이루어 가는 경향의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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