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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에 이르는 길(1) : 인생의 가치를 어디에? (빌 3: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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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이르는 길(1) : 인생의 가치를 어디에? (빌 3:4-11)

<참된 행복을 찾아 떠나는 여행>

여성 포털 사이트인 아줌마닷컴(www.azoomma.com)이 추석 명절에 시어머니에게 가장 듣기 싫은 말이 무엇인지 설문 조사를 했답니다. 1위가 "더 있다 가라"는 말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벌써 가게?"하는 말이지요. 2위는 동서지간에 비교하는 말이었고, 음식 준비할 때 시어머니로부터 듣는 잔소리를 3위로 꼽았다고 합니다. 한편 시어머니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 1위는 "준비하느라 수고했다"였고, 2위는 "어서 친정에 가야지"로 조사됐다고 합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시어머니가 시집에 "더 있다 가라"하는 말은 듣기 싫은 말 1위인데 반하여, "빨리 친정에 안 가고 뭐하니"라는 말은 듣고 싶은 말 2위로 랭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시어머니가 "더 있다 가라"하면 듣기 싫고, 친정 어머니가 "더 있다 가라"하면 듣기 좋습니다. 반면에 시어머니가 "친정에 빨리 안 가고 뭐하니"하면 듣기 좋고, 친정 어머니가 "시집에 빨리 안 가고 뭐하니"하면 듣기 싫습니다. 바로 이런 것 때문에 "피는 물보다 진하다", 혹은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이번 추석에는 시어머니가 "더 있다 가라"하는 말이 듣기 좋은 말이 되시길 바랍니다. (며느리들 다같이 "아멘" 합시다.) 

저는 앞으로 12주 동안에 걸쳐서 '행복'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시리즈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기획했던 연속설교 중에 가장 긴 설교 중에 하나입니다. 이것은 행복이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일하고 결혼하고, 심지어 교회에 나오는 궁극적 목적도 다 행복해지기 위함입니다. 불행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 일을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궁극적 관심이 행복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행복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 썩 자신이 없습니다. 행복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혼란스럽습니다. 분명 불행한 것은 아닌데 영 행복하다는 확신은 서지 않습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과거 어느 시점에는 행복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만큼 행복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지만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국어 사전을 보면 '행복'(幸福)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 참 좋은 풀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충분한 만족이나 흐뭇한 느낌을 갖지 못한다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왜 행복하지 못할까요? 행복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기 위해서는 그 길을 가로막고 서 있는 장애물부터 먼저 치워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까닭에 저는 다음주부터 행복을 가로막는 11가지의 장애물들, 즉 욕심, 시기심, 근심, 이기심, 증오심, 불평, 교만, 고독, 권태, 열등감, 과거의 아픈 기억(trauma) 등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의 행복에 직결된 가치관>

오늘은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하여 가장 근본적인 문제, 즉 인생의 가치관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더 가치 있게 여기고 덜 가치 있게 여기는가 하는 것은 행복과 직결됩니다. 예컨대 돈이 전부라고 하는 가치관을 가진 분들은 돈을 많이 벌기 전에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명예에 가치를 두는 분들은 자신이 바라는 명예를 얻기 전까지 행복할 수 없지요. 사람 사는 맛이 쾌락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젊었을 때 좀 더 인생을 엔조이할 수 있을까, 거기에 관심을 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생의 행복은 어떤 대상에 가치를 두는가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우리의 행복이 가치관과 직결되어 있다고 할 때 세 가지 사실이 중요합니다.

첫째로, 사람마다 가치를 거는 대상이 각각 다릅니다.
사람마다 귀하게 여기는 대상이 다릅니다. 제가 군목으로 임관하기 전, 전라도 광주 상무대에서 16주 동안 훈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연대장님이 수석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수석하면 충북 단양의 수석이 제일 좋지 않습니까? 연대장님이 저희 훈육관님께 단양 출신 훈련병을 알아보라고 지시를 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제 처남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수석들 중에 몇 개를 선물로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연대장님이 고맙다며 훈육관님과 저를 공관에 불러 식사대접을 했습니다. 아마 그 때 훈련병으로서 하늘같은 연대장님으로부터 식사대접을 받은 사람은 저 하나였을 것입니다. 저는 수석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취미도 없었기에 상관의 부탁으로 그냥 선물로 줬을 뿐입니다. 그러나 수석의 가치를 중하게 여겼던 연대장님은 아직 임관도 하기 전에 훈련병에 불과한 저에게 식사대접을 할 만큼 대단하게 여겼습니다.

책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리 비싼 책이라고 할지라도 사고야 맙니다. 그러나 책에 취미가 없는 사람은 코 푸는 휴지정도로 생각합니다. 골동품도 마찬가지이지요. 저는 가끔「진품명품」이라는 TV 프로를 보는데 참 재미있습니다. 선대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골동품에 대한 감정평가를 받기 위해 도자기나 고문서를 의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진행자가 프로에 출연한 연기인들에게 값을 매겨보라고 합니다. 그런 뒤 의뢰한 당사자에게도 값을 적으라고 합니다. 이렇게 한 뒤, 감정 평가 전문단이 엄밀한 조사를 해서 최종적인 감정가를 보여줍니다. 출연자들과 전문가들의 감정가가 다른 것은 이해할 수 있는데 그 귀한 물건을 들고 나온 의뢰자와 전문가의 감정 시세가 엄청난 차이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예컨대 본인은 100만원을 썼는데 전문가는 1억원을 매기는 경우이지요. 중요한 것은 1억원을 호가하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그 유물을 수십 년 동안 보관해 온 당사자는 그 엄청난 가치를 모르고 살아왔다는 사실입니다.

거부가 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찬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꿈속에서 신으로부터 계시 비슷한 말을 들었습니다. "네가 내일 길에서 늙은 수도승 한 사람을 만날 터인데 그에게 보화를 청하면 얻게 될 것이다." 과연 그 이튿날 아주 초라해 보이는 수도승이 바랑을 메고 오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꿈 이야기를 한 뒤 자기에게 뭔가 줄 것이 없느냐고 했더니 자기가 가진 것이라곤 큰 돌멩이 하나밖에 없다고 하면서 원하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돌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던 청년이 그 돌을 자세히 살펴보니 큰 다이아몬드였습니다. 청년은 다시 노승에게 뛰어갔습니다. "선생님이 이 것을 돌로 여기고 주신 모양인데 이 보다 더 귀한 것이 있으면 그걸 얻고 싶습니다." 하면서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고 합니다.

똑같은 다이아몬드였지만 한 사람에게는 하나의 돌덩이에 지나지 않았고 또 한 사람에게는 엄청난 보석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사람마다 가치의 대상이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대상에 가치를 두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품격이 달라집니다. 품격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도 달라집니다.
     
둘째로, 진짜 행복은 시들지 않는 대상에 가치를 걸 때 주어집니다.
사람은 자기가 염원하는 것을 가질 때 행복해집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한 사람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가졌다고 해서 진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두세 살 먹은 어린아이가 손에 불을 갖고 싶어할 때 불을 가졌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되려 위험해집니다. 어떤 여성이 부와 명예와 권력을 한 몸에 안겨줄 수 있는 지위에 올라가기를 숙원했다가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지위가 이 여성의 인품이나 성격, 능력에 잘 맞지 않습니다. 그토록 바랬던 소원이 이루어졌기에 잠시 동안은 행복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그 자리 자체가 참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요. 얻기만 하면 행복해질 것만 같은 '외견상의 행복'과 막상 그 것을 얻었을 때 느끼는 '진짜 행복'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 즉 귀한 가치를 부여하는 대상을 가질 때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상들은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바로 가질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인기 가수가 되고 싶다고 해서 다 될 수 없고, 국회 의원이 되고 싶다고 해서 다 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세상의 냉엄한 현실은 우리가 갖고 싶다고 해서 다 수중에 저절로 굴러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막상 그 사모했던 것을 얻었다고 해도 곧바로 우리 손에서부터 덧없이 떠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큰 가치를 부여해서 얻으려 하는 대상은 그 것을 얻기 전까지는 아등바등하면서 우리에게 큰 괴로움을 주는가 하면, 막상 얻은 다음에도 언제 어떻게 잃어버릴지 알 수 없기에 또한 두려움을 안겨줍니다.

언젠가 대법원장을 지낸 분이 한강에 투신자살을 해서 놀란 적이 있습니다. 사모님을 여의고 지병에 시달리며 쓸쓸하게 지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입니다. 한 때 만인이 우러러보는 고위관직에 올라가 행복한 적이 있었지만 그 행복이 영원토록 지속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난주에「인간극장」인가 하는 프로를 보니까 한 때 인기 절정의 트로트 가수가 교통 사고를 당해 반신불수가 된 장면으로 나와 안타까웠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나 명예나 인기나 권세나 연인이나 그 어떤 대상도 그것을 얻기 전에는 얻어보려고 노심초사하게 만들고, 막상 얻은 다음에는 언제 어떻게 우리 곁을 떠나갈지 알 수 없기에 항상 전전긍긍 두렵습니다. 여러분, 이제 결론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의 참행복은 일시적이고 무상한 것이 아닌, 영원하고 지속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영원하고 지속적인 대상이 무엇일까요?   

셋째로, 영원하신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둘 때 우리의 인생은 행복해집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금방 사라지고 말, 덧없는 대상에 가치를 둘 때 우리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직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무궁토록 변함 없이 지속적인 대상을 찾을 때 행복해집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지요! 이런 이유 때문에 어거스틴은「고백록」에서 "우리 영혼이 주님 안에서 안식하기 전까지 참 평안이 없다"고 했습니다.

본문 말씀은 흔히 사도 바울의 이력서(Curriculum Vitae)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말씀은 빌립보 교회 안을 어지럽히는 사람들을 경계하기 위해 밝힌 자기 이력입니다. 바울은 이들을 '개들'과 '행악자들'(빌 3: 2)이라고 부를 만큼 혹평했는데 이스라엘과의 혈연관계를 강조하며 이방인들도 할례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입니다. 육신적인 혈통으로 치자면 이들에 비해 바울 자신도 손색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난 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족속 중에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습니다. 율법으로 치면 최고의 엘리트 바리새인이었으며, 열성으로는 교회를 핍박할 만큼 대단했고, 율법의 의로는 조금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육적이고 율법적인 것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었던 바울이 더 크고 놀라운 가치를 발견했을 때 그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 다같이 본문 7-11절을 읽어볼까요.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그 이전에 자기 인생을 걸었던 가치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고 절대적인 가치, 즉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다음에 자기 인생이 180도 달라졌다고 고백합니다. 이제 그리스도 때문에 예전에 자기에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해로 여겼습니다. 지난날의 성취와 업적이 한낮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이제 바울에게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지난날 자기가 귀하게 여겼던 모든 자랑을 다 해로 여기고, 심지어 똥오줌과 같은 배설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그러므로 이제 바울의 궁극적 관심은 율법을 지킴으로서 스스로 얻게 될 인간적인 의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는 의, 즉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얻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바울이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 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 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빌 3: 10). 결국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러했듯이 바울 자신도 죽은 사람들 가운데 다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 되었습니다(빌 3: 11).

여러분, 바울 사도는 절대적인 가치를 발견했을 때 그동안 자신의 명운을 걸었던 상대적 가치는 다 해가 되고 배설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참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가장 귀하고 아름답고 절대적인 가치, 영원히 시들지 않는 참행복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안 다음, 바울에게 옛날에는 그토록 귀하게 여겨졌던 모든 성취와 업적이 한갓 물거품이요 배설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 안에 참생명과 참행복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바울은 이제 과거와 같이 더 이상 헛된 것, 아침에 있다가 금방 사라지고 말 안개와 같은 것을 붙잡지 않고 믿음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영생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영원하고 지속적인 가치를 찾아서>
장영희 교수님의 글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청소년 시절부터 절도 성폭행 등, 많은 범죄를 저지르며 10년 간이나 감옥을 들락거리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홉 번째로 다시 감옥으로 후송되는 경찰차의 뒷좌석에 앉게 되었습니다. 밖은 이미 날이 어두워졌는데 때 마침 라디오에서 김세화의「눈물로 쓴 편지」가 흘러나왔습니다. "눈물로 쓴 편지는 읽을 수가 없어요. 눈물은 보이지 않으니까요. 눈물로 쓴 편지는 고칠 수가 없어요. 눈물은 지우지 못하니까요.…" 일순간 그 노랫소리가 이 사람의 영혼을 뒤흔들었습니다. 자신이 너무나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회한의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새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교도소에 들어간 뒤에 모범수가 되어서 여러 가지 악기를 배웠고 출소한 뒤에도 양로원이나 고아원을 다니며 자선 연주회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유선생이라고 하는 이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는 꿈에도 모르겠지만, 그 노래는 내 영혼의 구원자였다. 그 노래를 듣지 못했다면 아마 나는 아직 감옥에 있거나 아니면 이 세상에 해만 끼치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여러분, 때로 유행가 하나가 우리의 인생을 바꿀 수 있습니다.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사람이 자기 목숨까지 걸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면 극적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그 절대적이고 영원한 가치를 사모하십시오. 쉽게 왔다가 쉽게 사라지고 말, 육적이고 세상적인 것에 인생을 걸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참행복이 없습니다.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께 가치를 두십시오. 거기에 진짜 행복이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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