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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의 믿음(5) (고전 1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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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고전15:1-11
제목 : 바울의 믿음(5)

  학문 중에 가장 깊이 있는 분야를 보통 ‘철학’이라고 말합니다. 고대시대부터 시작된 철학은 인간의 생각이 얼마나 탁월한가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보통 사람은 철학자의 사상이나 깊이를 잘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실 철학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학문이 ‘신학’입니다. 신학은 성경연구라는 제한된 분야라서 아직까지 학문세계에서는 특수한 범주로 분류하지만 학문 자체로만 보면 철학보다 훨씬 더 깊고 오묘합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오랜 전통에 의하면 철학박사보다 신학박사를 더 인정해 줍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신학이야말로 세상에서 최고의 깊이 있는 학문이라는 것입니다.

  신학은 성경을 알고, 또 기독교의 교리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보통 신학가운데 성경의 교리를 연구하는 분야를 ‘조직신학’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기독교와 관련된 역사나 실천적 부분을 다루는 신학분야가 따로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성경의 교리를 배우는 것은 조직신학입니다. 조직신학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성경, 하나님, 인간, 예수님, 구원, 교회, 종말 등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만든 과정을 말합니다. 그런데 신학에서 보다 깊이 있는 연구를 위해 조직신학과 함께 ‘성경신학’이라는 분야가 생겼습니다. 성경신학은 성경 자체에서 교리와 신학을 배우는 체계입니다. 성경이 크게 둘로 나누어 있는 것처럼 성경신학에도 구약신학이 있고, 또 신약신학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신학을 연구할 때 하나 따로 세우는 신학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신학’입니다. 신약신학에서 바울신학을 별도로 세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신약성경에서 바울의 교리와 가르침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사상에서 신약의 모든 교리가 거의 나온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을 모르고 신약을 논할 수 없고, 성경과 신학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은 기독교와 성경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뛰어난 사람 바울의 귀한 믿음을 배우고 있습니다. 지난 4번에 걸쳐 그의 놀라운 믿음을 찾아보았습니다. 오늘 계속해서 본문을 통해 그의 믿음을 배우려고 합니다. 바울은 과연 어떤 믿음의 사람이었을까요?

  첫째, 부활의 믿음입니다. 본문을 포함한 고린도전서 15장을 부활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전체가 부활에 대하여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 가운데 본문은 부활의 확실한 증거를 실제로 본 사람을 소개하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 그 이후에도 오백여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고, 마지막으로 바울도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부활을 강조하는 것이 본문의 중심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믿음입니다. 바울의 믿음에서 부활신앙이 빠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바울의 믿음에 가장 핵심이라고 봅니다. 우리도 이런 바울의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믿음 중에 하나가 바로 부활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부활신앙은 부활절에만 생각할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순간순간 새기고 간직할 귀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은 부활신앙을 얼마나 확고하게 붙잡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부활의 믿음이란 한마디로 회복의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것을 다시 회복시켰습니다. 죽음이 고통이고, 수난이고, 아픔이고, 눈물이고, 괴로움이었다면, 부활은 기쁨이고, 승리이고, 환희이고, 영광이고,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부활로 모든 것이 다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가는 길이어야 합니다. 모든 아픔과 시련에서, 침체와 낙심에서, 죄와 허물에서, 신앙생활의 타성과 안일함에서 다시 믿음을 부활시키고, 처음사랑의 신앙을 회복하여 새롭게 출발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어떤 맥과 흐름이 있습니다. 창조, 타락, 회복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새 생명의 구도도 마찬가지로 재창조, 범죄, 그리고 회복입니다. 믿음의 삶도 같습니다. 출발, 역경, 그리고 회복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는 곤고함이 아픔으로 다가오지만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회복이 있습니다. 잠언의 말씀처럼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회복을 알던 시인은 시편 60편에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시고 분노하셨으나 이제는 우리를 회복시켜 주소서.” 분명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서 ‘회복’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인물이 ‘욥’ 입니다. 그래서 욥기는 바로 회복의 관점에서 늘 관찰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그가 어떻게 회복되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그는 우선 재물을 회복했습니다. 동방에서 당대에 최고의 갑부라고 불릴 만큼 부유했던 욥이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다시 회복이 되었습니다. 단순한 원상복구가 아니라 갑절의 회복입니다. 욥기의 결론에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라고 언급합니다.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모두가 갑절로 회복되었습니다.

  또한 욥은 가정도 회복이 됩니다. 처음 그에게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인 십남매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자녀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마치 연속극이나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두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물론 처음과 같은 자녀는 아니었지만 더 귀중한 자녀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새로 주신 욥의 자녀들이 얼마나 귀했는지 성경은 이렇게 강조합니다.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리고 욥은 건강도 회복이 되었습니다. 기와 장으로 몸을 긁으며 고통 속에서 살던 그에게 건강의 회복이 찾아왔습니다. 욥기의 마지막에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후에 욥이 일백 사십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보통 학자들은 욥이 고난을 당한 때를 대략 70세로 봅니다. 그렇다면 그는 적어도 210세를 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은 그가 ‘늙어 죽었다’고 유독 강조합니다. 질병이나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처음 같았으면 질병의 후유증으로 금방 끝날 것 같았는데 그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다가 자연사로 인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욥은 신앙도 회복되었습니다. 처음 욥은 아무리 보아도 회개할 것이 없던 사람입니다. 누구 보아도 욥은 잘못이 없었습니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당당했습니다. 처음 그는 자기가 당하는 시련에만 초점을 두었지, 죄와 내면까지는 들여다 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욥을 찾아온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는 중에 점점 욥은 고통 속에서 자기의 밑바닥까지 봅니다. 욥은 점점 깊은 신앙 속에서 하나님을 봅니다. 그리고 자기를 보았습니다. 그러자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티끌과 재 가운데서 가슴을 치며 통회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는 자기가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죄를 지어 죄인인 것도 알았고, 아니 죄인으로 태어난 것도 알았습니다. 하나님 외에 모두가 다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이제야 그의 믿음이 회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뛰어난 사람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이처럼 욥은 물질도, 가정도, 건강도, 심지어는 믿음도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이렇게 이끌어 가셨습니다. 욥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배웁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느 때 보다도 이 믿음의 축복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런 부활과 회복의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것이 다 회복되는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물질도, 건강도, 가정도, 무엇보다도 믿음도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절대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전진 아니면 퇴보입니다. 믿음은 나아가지 않으면 그만큼 뒤로 물러가는 것입니다. 다시 신앙에 불을 피워야 합니다. 나태하고 게으른 우리 믿음이 처음 열정으로, 내 신앙의 꽃을 피웠던 때로 돌아가야 합니다. 부활의 믿음, 회복의 믿음으로 새롭게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수고하는 믿음입니다. 바울은 부활의 믿음을 확고히 다지면서 부활과 복음을 위해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를 보여줍니다. 특히 10절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것이 바울의 믿음입니다. 그는 참 겸손한 사람,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하고, 그가 이룬 복음의 모든 업적은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밝힙니다. 그러면서 그가 강조하는 것이 수고의 삶입니다. 주님을 만나 지금까지 살면서 얼마나 수고하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보다도 수고하며 살았습니다. 바울의 생애는 한마디로 수고의 삶이었습니다. 많은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며 살았습니다. 이것의 그의 믿음입니다. 수고하며 사는 것, 지금보다 더 수고하고, 더 노력하고, 더 열정으로 살기를 다짐하고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인생이 무엇입니까? 얼굴에 땀을 흘리고, 수고의 땀을 흘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 수고로 식물을 먹고, 그 수고로 보람을 느끼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요, 삶의 질서입니다. 믿는 자는 이 원리를 따라가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한 것은 이 질서가 깨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한국은 복권열풍, 로또열풍이 불었습니다. 인생역전을 꿈꾸며 많은 사람들이 복권을 삽니다. 과연 복권으로 인생역전이 되는 것일까요? 혹이라도 복권으로 대박의 꿈을 갖는다면 잊어버리십시오. 그것은 성경적인 것이 않습니다. 요행주의, 한탕주의는 하나님의 질서를 깨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고의 땀을 흘리며 사는 것이지, 확률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보험회사에서 복권에 대한 통계를 낸 적이 있었습니다. 골프에서 ‘홀인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생에서 한번 있을까 말까 하는 일입니다. 홀인원은 2만분의 확률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교통사고로 사망할 확률은 3만분의 일이고, 벼락을 맞을 확률이 50만분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로또 복권에 맞을 확률은 8백만분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설령 당첨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렇게 얻은 재물로 행복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의 삶을 뒷조사 해보니 대부분이 이혼, 파탄, 불화, 살인, 요절 등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복권이 당첨된 사람과 인터뷰했는데, 불안하고, 먹지도 못하고, 잠도 이룰 수가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행복은 요행이나 한탕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솝의 우화 중에 ‘개미와 베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개미는 여름동안 정말 놀지 않고 수고하여 겨울에도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짱이는 여름동안 일하지 않고 기타를 치면서 놀다가 겨울에 먹을 것이 없어서 후회하게 됩니다. 열심히 수고하고 땀 흘리며 살라는 교훈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변한지 아십니까? 개미와 베짱이 2탄이 있습니다. 개미는 여름동안 그렇게 열심히 일하더니 결국 몸에 병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모아둔 재산을 다 병원비로 소모하고 여전히 낫지 않아 지금도 병원신세를 지고 말았습니다. 한편 베짱이는 그렇게 기타를 치며 노래를 잘 부르더니만 어느 날 연예기획사의 대표에게 발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수로 데뷔하여 떼돈을 벌었습니다. 그래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요즘 세대의 모습입니다. 수고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고, 너무도 쉽게 살고, 쉽게 돈도 벌려고 합니다. 더러운 것, 무서운 것, 어려운 것은 아예 손을 대려고 하지 않습니다. 요즘 청소년들의 꿈은 모두가 연예인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시대가 되었으니 이런 내용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되잖아요. 그래서 개미와 베짱이 3편이 나왔습니다. 개미는 병원에서 치료받다가 예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믿은 뒤에 모든 것이 회복되어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평안과 은혜 속에 살다가 천국에 갔다는 것입니다. 한편 베짱이는 그렇게 떼돈을 벌며 부와 인기를 누리며 살더니 어느 날 그만 마약에 손을 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기는 한순간에 추락하고 폐인이 되어 일생을 마쳤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서정주시인의 ‘국화 옆에서’ 라는 시가 있습니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동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이 시를 대할 때마다 잔잔한 감동이 있습니다. 한송이의 아름다운 꽃은 어느 날 갑자기 피어나지 않습니다. 봄부터 울어댄 새 울음소리와 먹구름 속에서 내려치는 천둥소리, 밤에 가득히 내려 쌓이는 무서리와 가슴 조이며 밤잠을 자지 못하던 시인의 설렘과 같은 많은 사연과 수고 뒤에야 피어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인생답게 살고, 믿음의 사람으로 우뚝 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최선을 다하는 수고와 하나님의 뜻, 도움으로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편지하면서,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수고의 땀을 흘리며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것이 성경적이요, 믿는 자의 삶입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이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주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의 수고를 보여주셨습니다. 겟세마네라는 뜻은 ‘기름틀’이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마치 기름을 짜듯이 그렇게 수고하며 간절히 기도하신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은 수고가 필요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이 피가 되기까지 기도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이처럼 수고했다면 우리는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수고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위해 수고하고, 땀 흘리고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믿음, 오늘은 회복의 믿음, 그리고 수고의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귀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결실의 계절 가을에 회복의 길로, 수고의 길로 힘 있게 출발하며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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