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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의 믿음(6) (딤후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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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믿음(6) (딤후 4:1-8)

  지금 우리는 매주 바울의 뛰어난 믿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신약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입니다. 바울은 성경만이 아니라 기독교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신학에서도 그를 깊이 연구할 만큼 뛰어납니다. 그런데 이런 것만이 아니라 그는 세상적인 배경 면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 더 놀라운 일입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자신의 배경을 소개합니다. 우선, 유대인중의 유대인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인종, 모든 족속이 다 자기민족이 뛰어나다고 말하겠지만 유대인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두가 인정하는 우수한 민족입니다.

또한, 바울은 유대인 중에 베냐민지파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가운데 베냐민지파는 유다지파와 함께 왕족에 속합니다. 귀족 중에 귀족이요, 고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이라고 강조합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 당시 많은 잘못에 대한 지적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세상적인 배경으로 하면 당시 바리새인만큼 안정된 사람이 없었습니다. 물질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장 부유했던 사람들입니다.

또한, 바울은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 당시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되는 것은 바리새인이라도, 귀족이라도, 부유층이라도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최고중의 최고라는 것입니다. 학문과 격식과 부귀를 갖춘 최고 상류층을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유대인이 우수하고 유대인 중에 최고라고 해도 로마를 통하지 않으면 우물 안의 개구리였습니다. 당시 로마의 시민권은 아무에게나 주지 않았습니다. 세계 최고 강대국이었던 로마는 자기들의 필요에 의해 시민권을 부여했고, 시민권을 가진 자는 최고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지만 누가보아도 바울은 육체를 자랑할 만한 사람이고, 세상적인 배경을 훌륭하게 갖춘 사람입니다. 바울은 성경과 역사와 신학과 심지어는 세상에서도 인정받을만한 뛰어난 사람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런 탁월한 사람 바울의 귀한 믿음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6번째로 그의 믿음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바울은 과연 어떤 믿음의 사람이었을까요?

  우선, 전도하는 믿음입니다. 본문을 포함한 디모데서는 바울의 생애 마지막에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여러 사람 중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던 디모데에게 자신이 걸어왔던 삶과 앞으로의 방향을 마치 유언처럼 기록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자기가 걸어왔던 지난날을 회상하고, 자기가 못 다한 일에 대해 디모데와 후대의 성도들에게 부탁하는 것을 봅니다.

그 가운데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울이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우선, 바울은 그것을 명령으로 선포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 신앙인에게 위로나 권면이 아니라 강한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신앙인의 삶에 전도는 몸에 배어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라는 말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우리 삶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는 습관이 있어서 하루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전도도 마치 어떤 이벤트나 행사가 아니라 믿는 자라면 모든 사람을 전도대상자로 삼고 영혼사랑의 열정으로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의 어려움에 대해 언급합니다. 점점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교회로부터, 성경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하는 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절과 4절에 그것을 말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이처럼 전도는 명령이고, 습관이어야 하며, 어렵고 힘들지만 감당해야 함을 디모데에게 강조합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전도를 디모데와 성도들에게 전하는 것으로만 끝났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바울의 지난날의 모든 삶은 한마디로 복음을 전하는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복음 때문에 세상의 배경을 배설물로 여긴 사람입니다.

오직 복음전파를 위해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며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바울의 생애에 복음을 빼면 남는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는 온통 복음을 위해, 말씀을 전파하는 일을 위해 살던 사람입니다. 그는 복음이 기뻤고, 복음이 자랑스러웠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로마서에서 고백한 것처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을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하면서 평생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살았습니다. 그리고 못 이룬 복음전파의 사명을 디모데와 당시 성도들과 오늘 말씀을 전하는 우리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믿음입니다. 전도하는 믿음, 평생 복음을 위해 살겠다는 각오와 다짐과 헌신이 우리의 삶과 믿음 속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복음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까? 전도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 것입니까? 누군가가 나에게 복음을 전하여 내가 예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우리는 믿음으로 살기를 다짐하면서 믿음의 사람들이 귀한 믿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진들의 많은 믿음을 배우고 본받아야 하겠지만, 바울처럼 복음을 위한 삶의 결단과 헌신이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벤트나 행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순간 우리 마음에 거룩한 부담을 갖고 감당해야 할 고귀하고 아름다운 습관이어야 합니다. 물론 복음을 전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간과 노력과 희생과 열정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게 해도 사람들이 귀담아 듣지 않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도 해야 합니다. 마땅한 신앙인의 우선순위요,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진 이유입니다.

  우리 교회가 해마다 10월에 전도 축제를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많은 관심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기도하면서 태신자를 작정하십시오. 그들을 교회로 초대하여 복음을 듣게 해야 합니다. 나만 구원받아 행복하지 마시고 바울처럼 많은 영혼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데 쓰임 받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떠날 기약을 아는 믿음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에 보면 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바울은 여기에서 떠날 기약이 점점 가까이 온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믿음입니다. 참 귀한 믿음입니다. 물론 바울의 이 말이 그의 생애 마지막이 가까이 오기 때문에 하는 말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결코 그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누구나 죽을 때가 가까이 오면 나는 이제 떠난다, 죽는다, 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는 그런 정도의 의미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그가 주님을 만난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마음에 새기고 있던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여기 ‘관제’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관제라는 것은 제물위에 포도주를 붓는 제사로서 민수기에 의하면 ‘전제’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즉 관제와 같다는 것은 바울이 순교의 피를 흘린다는 것을 말합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는 비장한 각오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믿음이요, 삶이었습니다.

그는 처음 주님을 만난 순간부터 어쩌면 그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늘 하고 살았습니다. 모든 인생이 다 한번 가겠지만, 빨리 갈지도 모른다는 것이 바울의 믿음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을 나그네처럼, 행인처럼 살았고, 미련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언제 떠날지 모르기에 늘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말하면 늘 비관적으로, 때론 무겁고, 나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 많습니다. 동양사상은 죽음이 우리와 가까이 있지 않습니다. 죽음은 늘 멀게 말하고, 가까이 두려하지 않고, 우리의 입 밖에 꺼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동양문화나 사상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저주요 고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문화, 성경문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를 더 귀하게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늘 비관적이지만 않습니다. 죽음은 멀게 보고 나쁘게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죽음이라는 것이 가장 가까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멀리만 두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면에서 죽음을 이해하고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죽음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나의 이야기입니다. 죽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코끝에 있다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면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내쉰 숨을 다시 들이마시지 못하는 순간 우리는 끝나는 것입니다. 죽음은 결코 거창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사는 것과 죽는 것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는 것과 사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떠날 기약이 가까이 온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사는 것 같지만 어쩌면 매일 하루씩 죽는다고 봐도 맞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모르면 매일 죽습니다. 하지만 정말 죽음을 아는 사람은 매일 새롭게 삽니다. 우리는 점점 하늘이 우리 앞에 다가오고, 점점 주님 앞으로 가까이 갑니다. 떠날 기약이 가까이 오기에 우리는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우리의 본향은 세상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있습니다. 점점 영원한 본향을 향해 나아갑니다. 바울처럼, 믿음의 선진들처럼, 떠날 기약을 아는 믿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바로 아는 귀한 믿음으로 날마다 새롭게, 날마다 천성을 향하여, 그렇게 승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달려갈 길로 가는 믿음입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그의 생애를 뒤돌아보며 총체적인 결론에 해당되는 개인적인 고백을 합니다. 그것은 분명 믿음의 고백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내가 선한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이 말씀은 한마디로 그가 지금까지 잘 달려왔고 앞으로 달려갈 길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 인생에 커다란 변화와 전환점을 이룬 뒤 달려온 지난날의 삶에 후회도 아쉬움도 부끄러움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입니다.

  그가 달려갈 길로 갔다는 것을 여기에서 몇 가지의 의미 있는 표현으로 알려줍니다. 먼저, 선한 싸움의 길로 달려갔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싸웠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선을 원하는 자기의 속과 악을 행하려는 자기의 육체와 싸웠습니다. 자기를 하나님에게 멀어지게 하려는 사탄과 싸웠고, 정욕과 욕심으로 가득 찬 세상과 싸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영적싸움에서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달려갈 길로 잘 달리며 승리하며 살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믿음의 길로 달렸습니다. 지금보다 그때는 훨씬 믿음을 지키기가 어려웠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곧 죽음과 연결된 시대이기에 지금과 같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택한 주님에 대해 후회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붙잡으며 살았고, 결국 그 믿음으로 천국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달려갈 길을 알았기에 흔들림이 없이 그 길로 달려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상급의 길로 달려갔습니다. 믿는 자가 세상에서 주어진 인생을 살다가 그는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자기 삶을 평가하시는 하나님께서 삶이 마치고 천국에 가면 그에게 마련된 상급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위에서 부르는 부름의 상을 위하여 그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달려간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달려간 길이고, 또한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믿음으로 나갈 길입니다. 바울이 갔고, 주님이 가신 길입니다. 우리가 이 길로 가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이어야 합니다. 믿음은 달려갈 길로 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던 것처럼, 우리는 계속해서 선한싸움의 길로 가야 합니다. 신앙은 영적싸움입니다. 이번 한주간도 우리는 선한싸움을 싸우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죄와 싸우고, 세상과 싸우고, 사탄과 싸우고, 자기와 싸우면서 살아야 합니다. 전쟁은 무서운 것이지만 일단 싸우면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더 이상 패배자, 낙오자가 아니라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계속해서 믿음의 길로 가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주님을 붙잡는 신앙의 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종종 나에게 불어오는 시련의 때에, 환난과 고통의 때에는 더욱 주님을 붙잡고 나가야 합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나를 사랑하는 주님께서 그때마다 힘과 용기와 위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시련의 때에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주시고,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주님과 더불어 간다면 내 삶에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상급의 길로 가야 합니다. 분명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대가없이 받았지만, 상급은 다릅니다. 구원받았다고 다 똑같지는 않습니다. 온전한 구원이 있고, 부끄러운 구원이 있습니다.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영접하여 천국에 들어간 강도와 평생 복음을 위해 땀과 눈물과 피로 헌신하며 살았던 사도바울과 같을 수 없습니다. 그게 모두가 같다면 우리는 지금 수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할 이유도 없고, 땀 흘리며 헌신할 이유도 없고, 나의 소중한 보물을 인색함 없이, 자발적으로, 기쁨과 감사로 드릴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을 평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잘한 사람에게는 후한 상을 주시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큼의 대우를 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달려갈 길로 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 분명 그 길은 넓은 길이 아닙니다. 좁은 길입니다. 우리가 가는 그 길은 빨리 가는 길은 아닙니다. 하지만 더디더라도 바르게 가는 길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세상에서는 영예를 얻는 길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늘나라에서 영예와 축복을 얻는 길입니다. 분명 세상의 영예와 상이 있는 것처럼 하늘에서도 상이 있습니다. 믿는 자가 가는 길, 지금까지 달려간 길이고, 앞으로 가야 할 길입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우리 모두 바울처럼 달려갈 길로만 잘 달려가는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믿음, 오늘은 전도하는 믿음, 떠날 기약을 아는 믿음, 그리고 달려갈 길로 가는 믿음입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한 주간도 승리의 길, 믿음의 길로 힘차게 나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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